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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룻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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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습니까? (룻 1:1-6)
 

1. 모든 것은 자기 자리가 있습니다. 

지난 구정 연휴 방송된 MBC 다큐멘터리 <남극의 눈물>을 통해 황제 펭귄의 生態를 생생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황제 펭귄들은 짝짓기 철이 되면 더 추운 남극대륙의 안쪽으로 이동하는데요. 그 이유는 자신들과 곧 태어날 새끼들을 괴롭힐 天敵들이 살 수 없는 곳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영하 50도 이하까지 떨어지는 추위는 천적 뿐 아니라 황제 펭귄 자신들에게도 괴롭고 힘든 환경입니다. 거기서 그들은 알을 낳습니다. 그런데 암컷이 알을 낳으면 그 알을 품는 것은 수컷입니다. 수컷이 발과 배 사이에 알을 품고, 대신 암컷은 먹이를 구하러 먼 바다로 나갑니다. 사람과 반대지요? 그렇지만 남극 대륙에서는 먹이를 구하는 것보다 그 추위 속에 약 2개월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알을 품는 것이 더 힘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알을 품고 있는 수컷들에게서 정말 놀라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름하여 “허들링”이라고 하는데요. 그것은 각자 자기 알을 품은 수컷들이 서로의 몸을 밀착시켜서 體溫을 유지하고 또 외부로부터의 적의 공격을 警戒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면 무리 속에 있는 펭귄도 있고 무리 바깥쪽에서 그 매서운 바람을 그대로 맞고 적들의 공격도 먼저 받을 수밖에 없는 펭귄도 있지 않겠습니까? 남극 대륙의 바람은 강할 때는 시속 100km에 이르고, 기온은 최하 영하 80도까지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알과 어린 새끼들을 노리는 적들이 언제 어떻게 달려들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쪽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치열한 자리싸움을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황제 펭귄들은 일정한 시간을 두고 서로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추위도 나누고 위험도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런 펭귄들의 모습은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더 높은 자리, 더 좋은 자리에 오르려고 서로 치고 받으면서 심각하게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들도 펭귄처럼 좋은 자리, 나은 자리, 안전한 자리를 서로 나누어 가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게까지는 안 되더라도 자기 자리를 알고 그 자리에 만족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대단한 일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물에는 다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이지요. 간장 종지에 설렁탕을 담지 않으며, 설렁탕 뚝배기에 간장을 담지 않고, 버섯이 아무리 고와도 화분에 기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도 저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있을 자리, 자기가 설 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분별력 있게 행동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지요.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자기 자리를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자신이 있어야할 곳에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는 자기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상황 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실까요? 우선 본문 1절에는 룻기의 시대 상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사사시대가 어떤 때입니까?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끝내고 죽으면서 시작된 사사시대는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을 세우기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첫 사사 옷니엘이 등장할 때가 B.C. 1367년경이고, 사무엘이 사울 왕을 세울 때가 B.C. 1025년경이니, 대략 342년 정도의 기간을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사시대의 형편은 어떠했을까요? 사사기 17장 6절,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리고 21장 25절,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이 두 구절은 사사시대의 형편을 잘 설명해 줍니다. 사사시대는 한 마디로 ‘사람마다 각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았던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괜찮았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어느 시대보다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했고, 그 결과 외적의 침입을 받아 고난에 빠지고,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께 ‘잘못했다’며 ‘살려 달라’고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사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여 평안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이 한 번이 아니라 수차례 반복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사시대에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광야 끝, 가나안 입구에 도착했을 때, 모세는 애굽과 가나안 땅을 비교하기를 ‘애굽은 灌漑水路가 발전되어서 언제든지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인 반면, 가나안 땅은 산악지대라서 물을 가둘 수 없어 인간의 노력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신명기 11장에 그 말씀이 있습니다(신11:11~15). 즉 가나안 땅은 믿음으로 볼 때만 기름진 땅으로 보이지, 사실 사람이 살기 힘든 땅이요, 농사짓기에 척박한 땅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가나안 땅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먹여 살려 주시겠지 하는 믿음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가나안은 광야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가나안 역시 광야처럼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셔야 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定着해서,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 뿐, 가나안 역시 철저히 “하늘바라기” 삶을 살아야 하는 곳이었지요. 

그런데 믿음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가나안에 살던 가나안 정착 세대 사람들은 하늘만 쳐다보고 살라고 하니까 그것을 힘들어 했습니다. 잘 못해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만으로는 현실 세상을 살수 없다는 이유로 가나안 原住民들을 부러워하면서 바라보았고, 그러다가 그들의 神들을 섬기면서 그들의 방법,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하늘만 바라보면서, 말씀과 기도로 살라고 하지만, 그것이 현실적으로 무슨 도움이 됩니까? 믿음으로 하늘만 바라본다고 돈이 나옵니까? 밥이 나옵니까?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버겁고, 내일은 不安합니다. 그러다 보니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붙잡게 되고,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주겠다고 속삭이는 세상의 神들이 더 나아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사기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사람들이 “각각 그 소견대로 옳은 대로 행하였다”고 평가합니다. 즉 하나님만 바라보고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다들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하나님을 떠나고, 말씀을 떠나고, 예배를 떠난 모습이라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안’이라는 자리, ‘하나님의 言約 안’이라는 자리를 떠났다는 것, 이것이 사사시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렇게 해서 그들이 잘 먹고 잘 살았을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성도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약 사사 시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 언약을 떠나서 잘 살았다면 사사기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고, 사사 시대의 한 가정의 모습, 한 개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룻기 역시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룻기의 두 번째 상황은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흉년은 단순한 自然災害가 아니었습니다. 地政學的인 이유나 氣候 때문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징벌의 결과, 즉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학자들 간에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룻기의 시대 배경은 기드온이 사사로 활동하기 직전으로 봅니다(사사기 6장). 기드온이 사사로 부름 받았을 때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떠했습니까? 당시는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가난한 때였습니다. 미디안의 괴롭힘이 심하여 마을이나 집에서는 살 수가 없어 산이나 들로 피신해서 거기에 웅덩이나 굴을 파서 지냈습니다. 

웅덩이란 들판에서 밑으로 굴을 파서 그 속에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미디안 군인들은 농사를 지으면 모든 수확물을 다 거두어 갔고, 소나 나귀 역시 남김없이 끌고 갔으며, 심지어 다음해에 뿌릴 種子까지 강탈해 갔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1절의 “흉년”은 그냥 ‘흉년’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버린 결과, 自然災難, 人災, 외국의 침입 등 복합적인 징벌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말이지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있던 자리는 하나님을 벗어난 자리, 말씀이 없는 자리, 자신이 왕이 된 자리였습니다. 

2. 자기 자리를 떠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내용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자리를 떠나면 어떻게 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은 유다 지파 사람으로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입니다. 엘리멜렉과 그 가족들은 이스라엘이 만날 적들의 공격과 침탈로 편히 살 수 없는 곳이라는 것, 게다가 하늘마저 돕지 않아 계속 흉년이 드는 것이 싫어 약속의 땅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베들레헴을 떠나서 모압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압으로 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요단강과 사해 바다를 끼고 인접해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도 당시 이스라엘은 흉년으로 시달린 반면 모압은 풍년이었고, 안정되어 있었고,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 가족이 그리로 간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거의 같은 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강 하나 사이에 끼고 있는데도 형편이 이렇게 다르다면, 뭔가 다른 원인이 있지 않겠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엘리멜렉이나 그 가족들 역시 그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곳으로 갈 필요 없이 거기서도 해결이 될 가능성은 충분했습니다. 즉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멜렉 가족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데로 가더라도 모압으로는 가면 안 됩니다. 왜요? 여러분, 이스라엘에게 모압은 어떤 땅입니까? “모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발람과 발락입니다. 출애굽 시대에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매수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막으셨고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발락이 제시한 돈에 눈이 어두워진 발람은 꾀를 내어서 싯딤 골짜기에서 여자 舞姬들을 동원해서 美人計를 써서 광야 노정에 지친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음행케 만들었고, 결국엔 이방신인 바알브올을 섬기게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전염병에 걸려 무려 2만 4천명이나 죽었습니다. 

그 비극적인 일이 모압에서, 그리고 모압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었습니다. 즉 모압은 이스라엘에게 원수의 나라이자 저주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멜렉은 가족들을 거느리고 원수의 나라 저주 받은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눈앞에 있는 고통을 해결하고, 좀 더 잘 살아보겠다고, 성공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엘리멜렉의 결정은 하나님과 말씀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정말 살기 힘들고, 극심한 흉년의 때를 어떻게든 버텨볼 심산으로 그렇게 했겠지만, 이런 엘리멜렉의 모습은 그가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해서는 눈이 멀고, 세상을 향해서는 눈이 밝은 사람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사사시대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던 사람들이나, 오늘 자신의 현실에서 하나님과 말씀과 믿음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똑 같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치 엘리멜렉이 겉은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속은 하나님 없는 이방인과 같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게 살아가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어떤 면에서 엘리멜렉은 ‘변화의 시기에 발 빠르게 움직인 유연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기업이 斜陽産業이 되었기에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재빠르게 움직여 잘 나가는 유망 업종으로 전환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의 선택이 정말 그러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엘리멜렉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는 선택할 수 없는 세속적인 업종으로 전환한 것과 같습니다. 

즉 성도가 호프집이나 나이트클럽이 유망하다고 그런 업종을 개업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그의 선택에는 기준도 신앙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무기력함이요,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백기를 들고 항복해 버린 무능력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는 이런 모습을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 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리를 떠난 엘리멜렉 一家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엘리멜렉은 모압 드림(the Moabite Dream)을 이루었을까요? 엘리멜렉이 모압으로 간 것이 처음에는 잘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보십시오! 너무나 비극적인 몰락이 왔습니다. 엘리멜렉이 거기 거주한지 몇 년도 못 되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젊디젊은 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잃은 完全한 敗北, 철저한 失敗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처음에 모압은 행복이 넘치고 성공을 보장해 주는 파라다이스인 것처럼 다가오지만, 그러나 그 결말은 철저한 패배와 아픔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엘리멜렉처럼 살지 않는다는 착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대의 모압이 손짓하는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성도들이 모압으로 다가가고 있거나, 이미 모압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압에 마음을 두면, 모압으로 한걸음씩 다가가면, 모압에 살면 어떻게 됩니까?

이런 현대인의 모습을 일찍이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에서 상징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오랫동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노인이 먼 바다로 나가 엄청나게 큰 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배에 매달고 항구로 돌아오는 도중에 그만 상어 떼를 만나 모두 뜯기고, 고기의 뼈만 달랑 가지고 왔습니다. 이 소설은 노인이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死鬪를 벌여 얻은 것이라고는 앙상한 뼈뿐이라는 사실을 통렬하게 꼬집었습니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노인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자신도 허무를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노인이 사투를 벌여 잡은 거대한 물고기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앙상한 뼈밖에 남지 않았던 것처럼, 엘리멜렉 역시 인생의 항구에 정박하고 보니 남은 것이라고는 죽어 있는 자신의 시신 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엘리멜렉이 선택한 모압의 실상이요, 현대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모압의 환상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말씀과 예배를 소홀히 하면서는 절대로 성공 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뭔가 얻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그 모든 것을 다 잃을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주님 안에 사는 인생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엘리멜렉을 통하여 이것을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압 경험은 엘리멜렉 한 사람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분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언제쯤 엘리멜렉을 통한 호소가 우리의 귀에 절실하게 들릴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어렵습니까? 괴로우십니까? 실패하셨습니까? 혹시 그 자리가 하나님을 떠난 자리라면 얼른 돌이키시고, 주님 안에 있는데도 그런 일이 있다면, 그래도 그 자리를 떠나지 마시고 그 자리에서 그것을 해결하십시오. 그것만이 여러분이 살 길입니다.

3.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십시오!

하나님을 떠난 자리가 이렇게 비참한 실패의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6절은 자신이 현재 있는 자리를 알게 된 성도의 올바른 결단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삶의 자리가 여럿 있다’고 속삭입니다. ‘이것도 선택할 수 있고 저것도 선택할 수 있다’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두 가지를 말하면서도, 그 중에 성도가 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라고 말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 안’과 ‘하나님을 떠난 자리, 주님 밖’이라는 두 자리가 있는데, 그 중 여러분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룻기는 두 가지 삶의 자리를 말하지만, 결론적으로 전하고자는 메시지는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비록 잘못된 선택으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자리에 있을지라도, 그 자리는 돌이키기 힘든 실패의 자리요,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주님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거기에 새로운 시작이 있고, 새로운 만남이 있고, 새로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본문 6절의 나오미는 비록 늦었지만 바로 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실패의 자리요, 다시 제 자리로 돌이킬 수 없는 형편에 있던 그가 거기서 눈과 귀를 어디로 향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땅, 자신들이 있어야 했던 그 땅으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들려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소식은 무엇입니까? 6절,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나오미는 죽은 남편과 자신이 찾고자 했던 풍요를 정작 모압에서는 얻지 못하고 떠나온 원래의 자리, 바로 이스라엘에 그 풍요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듣습니다. 

원래 자신이 있던 자리가 복의 자리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자기 자리를 떠난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6:1).” 이미 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하나님께로, 언약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나오미의 결단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6절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룻기의 시작은 悲劇입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 비극이 어떻게 주 안에서 喜劇으로 바뀌는 지를 보여주는 성경입니다. 그리고 룻기는 나오미가 스스로를 ‘마라’라 하여 인생이 너무나 쓰디쓰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꿀처럼 달콤하게 바꾸어 주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룻기는 하나님 안에 사는 의미, 언약의 의미를 바로 깨달은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렇게 되라’는 것이 룻기의 결론이 아닙니다. 룻기의 결론적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리를 잘 지키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예배하는 그 자리, 말씀의 자리, 기도의 자리, 봉사와 섬김의 자리, 그 자리를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지 않고 떠나면 어떻게 됩니까? 19절을 보면, 모압으로 갔다가 10년 만에 敗家亡身하여 비참하고 부끄러운 모습으로 돌아오는 나오미를 맞이하는 고향 베들레헴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때는 보리 수확 철, 그들은 豊年歌를 부르면서 나오미와 그 며느리 룻을 맞이했습니다.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자리를 잘 지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 말씀 안,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봉사의 자리,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잘 지키심으로 주님의 더 크고 놀라운 복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룻기서의 진정한 결론은 하나님을 떠난 것, 말씀을 버린 것을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안으로, 언약 안으로 다시 들어선 자에게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잃었던 한 마리 양의 새로운 역사, 돌아온 탕자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역사를 말하는 것이 룻기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 가운데 주님과 말씀의 자리, 언약과 약속의 자리를 떠나 있는 분이 있다면 빨리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새 일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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