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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롬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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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좋은 일꾼이 됩시다 (롬 16:1-2)


(롬 16: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롬 16: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1976년 정월 자스페에 있는 케이블카가 고장이 나서 18명의 사람들이나 태운 채로 공중에 달려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을 돕기 위해 용감한 사람들이 구조에 나서다 그들을 구조한 뒤 눈사태로 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가 영생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우리 형제자매를 위하여 기꺼이 우리의 생명을 바칠 것을 명하고 계십니다. -루터 룩크징거-
일꾼의 주된 임무는 돌보는 일 섬기는 일입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동쪽 15㎞ 지점에 위치한 항구로서 에베소, 안디옥, 알렉산드리아와 연결된 무역항입니다. 이곳에는 비너스, 이시스, 에스큐라피어스 등의 이방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는데 바울은 이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행 18:18)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사도 바울은 뵈뵈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다소 재산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럴지라도 자기가 교회의 종이 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고 구제와 손 대접을 하는 섬기는 일을 했다고 봅니다.
여기서 교회의 일꾼은 각자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교회를 섬기며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좋은 일꾼은 어떠한 일꾼일까요
일꾼이라고 인정 받아야 합니다.
뵈뵈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인정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인정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자기의 짐을 감당해야 합니다. 

보부상 두명이 함께 고갯길을 넘게 되었습니다. 짐은 무겁고 길은 험하여 힘이 들자 한 명이 털썩 주저 앉으며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난 더 이상 못 가겠으니 당신 혼자 먼저 가시오. 난 여기서 좀 쉬었다 갈 테니.""이 근처에는 쉴 만한 곳도 없고 점점 날도 저물어 가니 정 힘이 들면 그 짐을 내게 주시오. 그리고 어서 갑시다."  그 이야기를 들은 보부상은 슬며시 짐을 넘겨주고 모른 척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두 명은 개울을 건너가게 되었는데 물살이 대단히 빨랐습니다.  짐을 다 건네준 보부상은 빠른 물살에 떠밀려 넘어졌지만 짐을 지고 있던 보부상은 짐의 무게덕분에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었습니다. 고갯길을 넘을 때는 무거운 짐이 힘들게 여겨지겠지만 물살이 심한 개울에서는 그 짐이 눌러주는 힘으로 그 물살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 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해야 할 여러 가지 일들 중에서 쉬운 일만 하려고 하고 어려운 일은 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미루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힘들고 어렵게 여겨지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을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유익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로는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도 함께 주십니다.
우리가 그 고난에 당당히 맞서 이겨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잘했다"는 칭찬과 위로를 해 주실 겁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짐을 감당하며 일꾼으로 인정받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추천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추천은 아무나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본이 될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분들의 삶의 본이 감동과 감화를 주기 때문입니다.
손 종일 장로님이 칠원읍 교회에서 길 선주 목사님 모시고 부흥회를 하는 때에 논 5 마지기 중 3마지기를 건축헌금으로 작정하자 사모님이 다시 남은 2마지기를 바치자 농사지을 일이 없으니 아들 손 문주 씨가 일본 가서 돈 벌어 보내는데 문전옥답 20마지기를 사게 되고 후에 손 문주 씨는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텐톤은 링컨을 저급하고 교활한 어릿광대 고릴라의 원종이라고 비난했지만 그를 국방장관으로 기용했습니다. 그러나 계속 비난하던 그가 링컨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해 앞에서 여기 세상에 가장 훌륭한 통치자가 누워 있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유엔 사무총장 함마슐드는 죽은 후에 다른 사람이  울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했는데 그가 사고로 죽은 후 세계가 그를 위하여 애도하였다고 합니다.
계 원식 장로님은 이북 평양 교외 기성리에서 개인 병원을 경영하며 선교사들 협조아래 옥구 익산 김제 지방 순회 진료 중 1920년 익산군 황등면 황등리에 교회를 세우고 기성의원을 세웠고 6.25때 피난도 가지 아니하고 교인과 면민 치료를 위해 일하는 중 며느리 안 인호 집사가 순교를 당하기도 했으며 자기 재산도 사회사업에 사용했으며 계 일승 박사 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합니다.

워싱톤이 시찰 중 일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는데 한사람이 당신은 왜 보고만 있느냐 하니 나는 십장이요 라고 하자 나는 이런 사람인데 도울 일이 있으면 부르시오 하고 자기의 명함을 내주자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합니다.
우리도 삶의 본을 보여 추천하고 추천 받을 수 있는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우리라고  불리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뵈뵈를 우리 자매(1절)라고 합니다. 육으로 된 자매가 아니라 은혜로 된 자매입니다.
모든 일꾼들은 우리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고전 4: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나 너 우리는 인간 세계에서 없앨 수 없는 관계입니다. 82년 이전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제일 먼저 가르쳤던 말이 나 너 우리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대상을 인식하는 주체요 천지 만물에 대하여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한 개의 인격이라고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너는 친구나 손아랫사람에게 쓰이는 2인칭 대명사이지만 또한 나를 떠나서 존재하는 이웃이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나와 네가 만남으로 인하여 우리라는 공동체가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와 한 공동체가 된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동질적인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우리는 가정 학교 직장 사회 등 여러 종류의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특별히 우리란 말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가정적인 우리도 있을 수 있고 사회적인 우리 혹은 국가적인 우리도 있겠지만 성경이 말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적인 우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의 우리 곧 구원받은 우리인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사랑으로 일하며 땀과 눈물 피 흘리는 수고와 희생이 따르는 관계 입니다.

그림 '기도하는 손'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뒤에는 감동적인 사랑과 희생의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15세기 후반, 알베르히트와 프란츠라는 젊은 미술학도가 있었습니다. 친한 친구였던 두 사람은 함께 그림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매우 가난했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두 사람이 함께 공부하기에는 시간과 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제비를 뽑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알베르히트가 프란츠의 도움으로 먼저 그림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알베르히트는  자신이 공부를 마친 후 꼭  프란츠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학업을 끝내고 돌아온 알베르히트는 친구 프란츠가 자신을 위해 어떤 희생을 치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프란츠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거친 일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결국 그의 손가락은 휘어지고 굳어져서 더 이상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 알베르히트의 성공을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알베르히트는 친구 프란츠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프란츠는 거칠어진  두 손을 모으고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알베르히트는 재빨리 친구의 손을 스케치했습니다. 이것이 후에 알베르히트 뒤러의 명작 '기도하는 손'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조지 나이트 -하얀 마음을 만드는 소중한 이야기-)

우리라는 개념은 일체감 공통성 동질성을 주는 관계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도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우리 하나님을 가르치셨습니다.
(엡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와 너 너와 나와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의 세계인 것입니다.
  
로댕의 조각 중 칼레의 시민이란 군상의 작품이 있습니다. 같은 제명으로 독일의 극작가 게올로그 카이서가 쓴 희곡이 있습니다. 칼레는 도버해협의 프랑스쪽 요새로 영국에서 도버로 불리는 이 해협을 프랑스는 요새 이름을 붙여 칼레 해협이라 부른다합니다. 그 옛날 영국군이 칼레로 쳐들어 와서 이 요항을 점거했을 떼 포위를 풀어 주는 조건으로 칼레의 시민 5 명의 목숨을 요구해 왔습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 희생하기로 자청한 사람이 6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원한 사람들은 한 사람도 양보를 하지 않자 제비를 뽑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비에서 떨어진 사람이 5명이 적진을 향하여 가기 전에 먼저 자결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영국군은 5명의 시민을 돌려보내고 칼레에 손 하나 대지 않은 채 군사를 철수시키고 말았습니다. 1명의 희생자는 목숨을 바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5명의 목숨과 조국을 위기에서 구원하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관계를 잘 유지하며 좋은 일꾼들이 됩시다.

부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 16: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사도 바울은 이러한 그녀를 주안에서…영접하라. 즉 그녀를 대접하라고 합니다.
뵈뵈를 교회의 가족과 같이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주안에서는 인종과 피부 색깔이 다르고,서로 다른 지역과 이질적 문화를 가지고 있다 해도 언제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사람이 만든 이 모든 장벽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이 벽이 남아 있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간디는 학생 시절에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서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고려했었다고 그의 자서전에 쓰여져 있다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인도 사람들을 구별했던 카스트라는 계급제도에 대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주일,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 예배를 드리고 목사님께 기독교인이 되는 것에 대해 묻고자 했으나 그가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안내원은 그에게 자리를 내 주기를 거부하며 같은 계층의 사람들과 예배를 드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간디는 만약 기독교인들에게도 계급의 상하가 있다면 그냥 힌두교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합니다.

그 안내원의 편견은 예수님을 배반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려고 했던 사람들까지 돌려보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인종과 사회적인 신분에 관계없이 따뜻하게 반겨주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도 다문화 사회로 가고 있으나 편견은 아직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합니다.
모든 성도는 한 분이신 하나님의 자녀이고,한분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였으며 한분이신 성령의 인도와 지도를 받습니다
(엡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외지의 그리스도인이더라도 주 안에서는 하나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합니다.
그녀는 여자요, 로마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도움이 필요하였습니다. 이러한 그녀를 돕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서로의 일에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뵈뵈는 분명히 로마교회를 돕기 위해 로마에 갔으며,그녀가 원만히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로마 교회 성도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올은 지금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그녀의 곁에서 그녀에게 필요한 바를 도와주도록 부탁한 것입니다.

바울이 의도하는 바는 그녀로 하여금 성도와 교회가 주안에서 모든 것을 초욀하여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일 것입니다.
편협한 지역주의라든지 민족주의,인종주의 같은 것에 얽매이는 것은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못합니다.
일제시대 때에 황철도 목사님이 도쿄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이라 합니다. 그는 방학 동안에 학비를 벌기 위하여 노동자를 소개하는 일을 하였다합니다. 한번은 나고야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모아 도쿄로 인솔하게 되었는데 나고야 역에서 만나기로 한 인부들 중 이 씨라는 사람이 노름을 하다가 경찰서에 붙잡혀 있으면서 거짓으로 자기가 죽게 되었으니 와달라고 사람을 황 목사에게 보냈다합니다. 

황 목사는 화가 났으나 참고 경찰서에 아는 경부를 통해 그를 풀려나게 하고 이 씨를 데리고 나고야 역에 나오니 어제 먼저 가라고 했던 사람들이 안가고 황 목사를 기다리고 있었다합니다. 황 목사는 도쿄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을 생각하니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일로 다시 화가 났으나 어쩔 수 없이 기차를 타려고 들어갔더니 도쿄에 지진이 나서 기차가 못 간다는 것이었다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만약 도와주어야 할 일 이 없어서 어제 마차로 도쿄로 떠났었으면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지진을 만났을 텐데 그 재해를 피하게 해 주셨던 것임을 깨닫고 감사를 드렸다합니다. 
  
인간들은 수많은 장벽들을 만들어 서로 대치하는 관계가 되게 했지만 그리스도는 이것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하나가 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중국의 횡 장군은 아주 훌륭한 크리스챤이었습니다. 그가 청소년 시절인 1900년도에는 중국에서 북청사변이라는 폭동이 일어났는데. 이 폭동은 중국에서 외국 사람들을 몰아내자는 비밀 결사 단체의 운동이었습니다. 청소년 시절의 횡 장군은 폭도들이 한 선교사를 죽이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폭도들은 난폭하고 잔인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들은 선교사의 손목을 잘랐습니다. 

그리고 팔목을 잘랐습니다. 그리고는 선교사의 발목을 잘랐습니다. 그들은 이어서 그의 두 무릎을 잘랐습니다. 처참한 선교사의 몸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습니다. 폭도들은 죽어가는 선교사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선교사의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나의 아들에게 말을 전해주시오. 나의 아들에게. 선교사로 중국에 와서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가라는 말을 전해주시오.” 그러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장면은 횡 청년에게 강렬한 충격을 주었고. 그것은 너무나 거룩한 장면이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나라에 아들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고 구령을 위하여 도우라는 선교사님의 외침과 죽음의 사건은 횡 장군으로 하여금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그리스도 안의 신앙을 버리지 않는 군인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도움을 부탁하며 부탁 받을 수 있는 좋은 일꾼들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롬 16:2)...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사도 바울이 그녀가 베푼일에 대하여 말하며 보호자가 되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보호자(프로스타티스)는 후원자를 나타내는 말로 큰 도움을 주었음을 말합니다. 그녀는 고난과 궁핍에 처해 있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크게 도와주었음을 말합니다.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아침 구두 수선공인 콘라트는 매우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는 작업장을 청소하고 난로에 불을 붙인 후 식탁에 식탁보를 깔았습니다. 오늘 그는 일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아주 고귀한 손님 한 분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손님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는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지난 밤 꿈에 주님께서 "내가 내일 너에게 손님으로 가겠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따뜻한 방안에서 식탁에 앉아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가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를 들었다고 느꼈을 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오셨나보다"라고  생각한 그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우편 배달부였습니다. 우편배달부는 바깥의 추운 날씨 때문에 완전히 꽁꽁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편지를 내밀고는 난로 위에서 끓고 있는 뜨거운 차를 갈망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그는 우편배달부를 안으로 불러 들여 차 한잔을 대접하고는 온통 얼어 버린 그의 몸을 녹이도록 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우편배달부는 다시 추위 속으로 걸어갔습니다. 우편배달부가 집에서 나가자마자 그는 재빨리 찻잔을 치우고 탁자 위를 깨끗이 정돈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그의 손님이 오는지를 보기 위해 창가에 앉았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곧 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서 입니다. 점심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주님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한 어린 소년을 보았습니다. 그는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유리창 가까이 갔습니다. 그는 어린 소년의 조그마한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즉시 어린 소년에게 달려가 우는 이유를 물었습니다. 곧 그는 소년이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어머니를 잃었으며 더 이상 집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급히 쪽지 위에 무엇인가를 쓴 다음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쪽지 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 저를 기다려 주세요 저는 곧 돌아옵니다' 

그는 문을 잠그지 않은 채 소년의 손을 잡고 그를 집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의 집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멀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두워진 후에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방 창가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방망이 질 쳤습니다. 이제 드디어 주님께서 그에게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자신과 같은 집의 위층에 사는 한 부인을 자신의 방 창가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녀는 피곤에 지치고 슬퍼 보였습니다. 그는 부인의 어린 아들 페트야가 아팠기 때문에 부인이 삼일 동안 한 숨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할 정도로 곤경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페트야는 고열에 시달리며 조용히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페트야는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인은 자신을 도와주는 그에게 미안해했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남편이 불행한 사고로 죽은 후부터 이 어린 아들과 단 둘이 살아왔기 때문에 도와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인을 도와 페트야를 젖은 수건에 돌돌 싼 다음 부인이 잠시 쉬는 동안 아픈 아이의 침대 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가 그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자정이 훨씬 지나서였습니다. 그는 매우 실망하여 피곤한 몸으로 침대에 누었습니다. 하루는 다 지나갔습니다. 결국 주님께서는 오시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는 갑자기 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콘라트야 내 몸을 따뜻하게 녹여주어서 고맙구나 나에게 집으로 가는 길을 가리켜 주어서 고맙구나 그리고 도움과 위안을 내게 주어서 고맙구나 콘라트야 내가 오늘 너의 손님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무척 기뻤단다"(청소년 예화)
  
우리도 보호자가되고 보호 받으며 감사하며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감사하는 자녀가 효도하는 자녀요 스승님께 감사하는 학생이 모범 학생이요 임금님께 감사하는 신하가 충성하는 신하요 하나님께 감사하는 성도가 헌신하는 성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기도 합니다.

어느 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주일 저녁 이른 시각에 교회 종이 울렸습니다. 시계를 보니 정해진 예배시간보다 30분이나 빠릅니다. '누가 장난치나?' 그러나 종 칠 사람은 김성혜 집사님 뿐입니다. 아직 저녁 설거지도 마치지 않은 집사람과 같이 웃으며 "빨리들 나와서 기도를 하라는 게지"라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론 내심 걱정이 됩니다. 김 집사님은 중풍을 맞고 난 뒤 거동뿐만 아니라 생각도 많이 흐려지셨습니다. "몸이 더 나빠지신 건가." 빨리 종친 이유를 달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올 여름이 고비인데…" "재발하면 안 되는데…" 아내와 함께 걱정을 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예배당 바닥에 가지런히 정돈된 방석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실은 오늘부터 저녁 예배시간이 30분 앞당겨졌다는 사실을!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알았습니다. 편견과 잘못은 시간과 기계에 있지 않습니다. 더위도 아닙니다. 부실한 몸 김 집사님도 아닙니다. 내겐 잘못 없을 거라는 오만한 자신입니다. 종종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을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하며 최선을 다 하므로 좋은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다니엘 웹스터는 일생동안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지금 하는 모든 일을 이다음에 내가 하늘나라에 가서 내가 책임질 것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당신을 사랑 하리 하루뿐만 아니라 1년뿐만 아니라 항상 사랑 하리 라는 사랑의 노래의 가사처럼 전 생애를 주님 위해 헌신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은 일꾼이라고 인정 받아야 하고 추천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우리라고 불리어 질 수 있어야 하고 부탁하고 부탁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보호자가 되고 보호 받은 일로 감사하는 일꾼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좋은 일꾼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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