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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가? : 예수님의 물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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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가? : 예수님의 물음(2) 
 
우리는 나를 통해 세상을 봅니다. 

한 여행자가 어떤 도시에 이르러 길가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 물어봅니다. 
“이 도시 사람들의 인심은 어떠합니까? 
그러자 노인이 되묻습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들렀던 도시 사람들의 인심은 어땠소?”
여행자가 말합니다. 
“너무 천박했어요. 믿을 친구가 하나도 없었답니다. 정말 최악이었습니다.”
노인이 다시 말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이 도시도 비슷할 겁니다.”
얼마 후에 다른 여행자가 이 도시에 와서 노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노인은 여행자가 이전에 들렀던 다른 도시 사람들의 모습을 물어봅니다. 여행자가 말합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친절하고 성실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인이 대답합니다. 
“아마 이 도시도 그럴 겁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통해서 남을 보게 됩니다. 일종의 자기 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남도 존중 받아야 함을 알고 존중합니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정이 많다고 느끼면서 정중하게 상대방을 대합니다. 그러나 자기를 비하하고 자기에 대한 존중감이 없는 사람은 남을 볼 때도 삐딱하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심리적인 방어기제가 있습니다. 자기를 방어하려는 방어기제가 늘 세상을 향해서 투사되고 있습니다. 즉 자기 내면의 세계가 바깥 세계에 보여지는 것입니다. 때로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의 잘못을 타인에게 책임지우고 싶어 하는 심리적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비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 자신도 남에게 비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향한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그 속에 냉소적인 조롱이나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자꾸만 커진다면, 내 안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나의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시대적인 비판정신은 멋진 것입니다. 개인적인 성숙을 위해서는 철저한 비판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발전도 비판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같은 비판정신에 기초하고 있는 종교입니다. 개혁되기를 열망하는 기독교의 특성이 신앙의 모습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자리에 머물러있지 않고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정신이 비난과 냉소로만 흐르면 결코 멋진 것이 되지 않습니다. 추하고 천박한 것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에게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비판적 정신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비판적 정신이 어느 순간부터 너무 쉽게 비난하고, 조롱하고, 비아냥거리는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이 매몰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비판의 사전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난은 전혀 다릅니다. 비난은,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하는 것’, 더 나아가서는 ‘사실과 맞지 않게 터무니없이 헐뜯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의 말씀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태복음 7:1)

이것은 비판적 능력을 없애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비판하셨습니다. 시대적 비판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에 대해서 엄정하게 비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비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남을 조롱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더욱 뚜렷해집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7:3)

비난의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형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기서의 형제란 가까이에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래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없습니다. 결국 우리가 비난하는 사람은 매일 보는, 내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혈육이나 형제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믿음의 친구일 수도 있고, 항상 대화를 나누는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운 사람, 즉 형제가 형제처럼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소중하게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친밀하게 안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면서 4절에서 이렇게 경고를 하십니다.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마태복음 7:4)

들보란 기둥, 대들보를 뜻합니다. 그리고 티란 티끌과 같은 먼지를 말합니다. 이는 엄청난 대조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을 때 선조들이 만든 속담, ‘가랑잎이 솔잎더러 바스락 거린다고 한다.’가 생각납니다. 자기가 시끄러우면서 남에게 더 시끄럽다고 소리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라는 속담도 생각이 납니다. 자기 자신은 더 큰 흠이 있으면서 작은 흠이 있는 사람을 흉보고 꾸짖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비판정신을 무디게 해서는 안 됩니다. 비판정신은 우리의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비판과 시대적인 비판은 우리 자신을 성숙하게 하고 사회를 발전시키는 하나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비난과 조롱과 비아냥거리는 모습이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삶이, 내 생각이, 내 정서가 뭔가 병 들어가고 있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부정적인 자화상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내 말과 행동에 스스로 책임지기보다는 누군가의 탓을 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냉소적인 생각들로 점점 가득차기 시작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들춰내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는 모습은 이 시대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얼마나 안타깝고 슬픈지 모르겠습니다. 왜 이렇게 됐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차가워졌기 때문입니다. 아니 차가워진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잔인해졌습니다. 사회적인 냉소주의는 우리 모두의 정서를 파괴합니다. 감정에 상처를 줍니다.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들을 다 빼앗아 갑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이 점점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해야할 사람들을 험담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사랑이 사라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때로 잘못하고 실수를 해도 엄마, 아빠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비난하기보다 가슴이 아픕니다. 그리고 앞으로를 위해 충고와 비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마음으로부터 사랑한다면 그들의 실패와 잘못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 비난의 자리까지 가게 되면, 모든 인간관계는 거기서 단절이 됩니다. 이런 잘못된 현상들을 향한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마태복음 7:5)

‘외식하는 자’는, 형식 속에 갇혀있는 자입니다. 자기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남에게 전가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밝히 보아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눈이 깨끗하면 온 몸이 깨끗하고,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다’고 하였습니다. 올바르게 보고 명백하게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사소한 일에 필요 이상으로 과잉반응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남의 티끌이 거대한 대들보처럼 보입니까? 우리 마음에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남의 작은 잘못이 자꾸만 커져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크기 때문입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에 그렇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시기와 질투는 자기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남의 탓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많이 배우고 많이 가져서, 그 결과 오만해지고 뻔뻔스러워져서 남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든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내면세계 속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남에게 쉽게 상처를 줍니다. 너도 한 번 상처받고 한 번 견뎌보라는 것입니다. 아예 쓰러져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 못된 심성의 발로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난과 조롱, 그리고 냉소주의는 거기에 돈과 재물이 걸려있으면 더욱더 치열해 집니다. 권력쟁탈이라는 권력게임이 되면 아주 광분의 분위기로 빠져 들어갑니다. 더 나아가 광기적인 현상마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올해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뽑는 해입니다. 그러다보니 책임을 지려는 분위기보다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분위기가 더욱 만연하게 됩니다. 권력과 재물이 걸리면 거의 예외없이 이런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치, 경제, 교육,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이런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대의명분을 찾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의를 위해서, 자유를 위해서, 민주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갈등하고 서로를 비난하고 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먼저 내 안에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피해자면서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가해자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함께 신음하고 있는 피해자입니다. 우리들 한 명 한 명은, 서로를 높여줄 수도, 반대로 가차없이 다른 사람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칠 수도 있는 존재들입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판단을 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그것은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이 시대적인 냉소주의를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과 평화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내 안에서 나 자신과 평화를 누리지 못하면 우린 결코 남과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자신과 화해를 하지 못하면 이 세상 누구와도 화해를 하기 어렵습니다. 자신과의 화해가 세상과의 화해로 이어진다는 것은 마치 철칙과도 같습니다. 

가정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만납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립니다. 휴가를 내서 여유를 누립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나 자신과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잠깐일 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내 안에 진정한 쉼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진정한 회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내 안에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를 안아줘야 됩니다. 누군가가 나의 상처를 만져줘야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 그렇게 잘난 존재가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소리치는 나와 비난하는 나 사이에서 울부짖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부드럽게 안아주어야 우리 안에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유희경이 쓴 ‘꿈 속에서’라는 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가슴만 한 신음을 낳고 누군가 밤새 울었다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안겨 있는 나를 보았다
하얗게 빛이 났다. 나머지는 어두웠으므로
비명 같은 내가 빈 종(鐘)이 되었다

시인은 꿈 속에서 밤새 신음하다가 울고 있는 누군가를 보고 안아주게 됩니다. 아마 자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에 자신도 누구에게 안겨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절망 속에서 어두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사랑받고 안겨있는 자신이 빛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던 상태에서 마치 빈 종처럼 침묵의 자리로, 평안의 자리로 되돌아온다고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앙이란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끌어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고통 받으시고 울고 계신 예수님을 우리가 껴안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신음하시면서 소리치시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을 우리가 끌어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께서 나를 끌어안으시는 사랑의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신앙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품 안에 안겨져야 마음의 평안이 내게 돌아옵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을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인이기도 합니다. 바로 그렇게 주님의 품에 안길 때 내 속에 있는 열등감, 분노, 쓴 뿌리와 같은 것들이 주님의 사랑 가운데 다 녹아집니다. 그 뒤에 우리의 눈은 밝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야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사람이 왜 사랑을 받아야하는 존재인지, 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축복을 받아야하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죄악과 어리석음까지도 끌어안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고통을 대신 받으셨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던져 버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의 역사를 확인하기 전에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시간 예배드리면서 ‘하나님, 내 속에 어두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분노와 비명이 내 가슴에 있음을 주님이 아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내가 안겠습니다. 주님, 나를 안아주세요. 가슴 속에 하늘의 평안을 주세요. 그리고 사람을 사랑으로 바르게 대할 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남이 나를 미워하고 싫어하면 나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남이 나를 한 대 치면 두 대 때리고 싶은 것이 바로 우리들의 속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못된 나를 끌어안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이 세상 속에서 멋지게 살라고 오늘도 이 시간 주님 앞에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품에 안겨 느끼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주님의 귀한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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