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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죽음, 절망도 되고 희망도 된다 (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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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절망도 되고 희망도 된다 (요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중략)…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최근 언론보도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청소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1위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인구 10만 명당 자살 사망자는 2009년을 기준으로 28.3명, 하루 평균 42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10년새 5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잘먹고 잘입고 잘살게 되면 더 행복할줄 알았는데 6븡25때 피난살이로 고달프고 괴로울 때보다도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사람의 행복이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절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잠재의식 속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면 누구든지 자살 충동이 마음에 생겨나고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고 난 다음 저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의 저 건너편에 있는 죽음의 세계에 관해서 알려면 주 예수께 나오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추측을 우리가 믿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었고 사람으로 오셔서 세상에 사셨고 또 죽으셔서 음부에 내려갔다가 부활하고 승천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천국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그 가르침에 순종하면 죽음은 큰 영광과 희망이 됩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그 자체로 처절한 절망이 될 수도 있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인생이란 이 갈림길에서 사는 것입니다.

1. 인간의 삶 - 절망 위의 모래성

첫째로, 하나님 없는 인간의 삶은 절망의 토대 위에 있는 모래성입니다. 이 세상에 부귀영화 공명이 아무리 많아도 그 삶은 모래성입니다. 언제 폭풍우가 불어오면 날아가 버릴지 모릅니다. 폭우가 오면 떠내려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삶에 대해 ‘삼대절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죄책과 정죄의 절망이 하나이며, 다음이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이고, 나머지가 죽음의 절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난 다음 에덴에서 쫓겨났으니 인생들은 쫓겨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의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당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저주받은 땅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아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주한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 가시와 엉겅퀴가 납니다. 

가정을 이루고 나니 부부간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고 부모 자식 간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고 형제간에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고 사업상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나고 아무리 치우고 또 치워도 가시와 엉겅퀴가 되살아나는 저주의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절망인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아담을 보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병들고 고통을 당하며 죽는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1장 1절로 11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고 기록된 것처럼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극도의 영화를 누렸습니다만 그가 그 영화 가운데 이처럼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전도서를 지었고 이렇게 절망적인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러한 절망을 누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세계에 머리 좋은 철학자들이 모여서도 인간의 존재는 절망의 존재라고 말하고 성경도 인간을 절망의 존재라고 말했는데 이 가운데서 우리가 희망을 얻고 살 수 있는 길이 있겠습니까? 돈을 벌면 희망이 있겠다 싶은데 돈을 벌고 난 다음 그 돈을 지키는데도 절망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지위나 명예도 얻으면 얼마 있지 아니하여 밑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그것을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키기에 절망이요, 위로 치고 올라가자니 힘들고 절망이요, 지위도 명예도 금전도 청춘도 다 절망이 꽉 들어차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항상 기쁘고 즐거운 사람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절망을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죽으심 - 희망과 꿈의 토대

둘째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희망과 꿈의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로 21절에 기록된 오늘 읽은 말씀처럼 예수님이 바로 길이고 예수님이 바로 진리고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고 예수님이 바로 빛인 것입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5장 24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항상 큰 소망을 가지고 봐야 될 것은 예수님이 한사람 한사람을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통하여 모든 것을 다 청산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허물, 질병, 저주, 죽음, 고통, 슬픔, 절망, 일체 인생에 대한 부정적인 세력을 다 짊어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그 대가를 청산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공짜로 받았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생기면 “나는 예수로 말미암아 새사람이 되었다”는 입술의 고백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듣고 보고 믿고 입술로 시인하면 성령이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마음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큰 평안과 확신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져도 겁나지 아니하는 것은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3절에 예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값없이 영생을 얻습니다. 이 땅에 사는 것은 잠시 잠깐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영원한 생명이 저 세상에 예비 된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장해 주십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 조상 아담의 죄로 인해 사망을 상속받아서 이미 죽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예수님을 믿으면 아무 공로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갈보리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날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을 바라보십시오. 예수의 죽음을 우리 몸에 짊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죽음 내 죽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난 후에 예수님이 그 짐을 다 청산한 것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이 운행하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역사하고 운행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 나의 죽음 - 절망인가 희망인가?

셋째로, 나의 죽음은 과연 절망인가 희망인가를 알아봐야 됩니다. 내가 오늘 죽으면 절망이 기다리고 있는가? 희망이 기다리고 있는가? 누가복음 16장 19절로 26절에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부자는 죄책의 절망,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 죽음의 절망, 이러한 삼대절망 중에 살면서 어찌하든지 순간적인 쾌락을 누려보려고 음주를 하고 쾌락을 취하고 살다가 죽어 그 영혼이 음부에 떨어져서 불 가운데 허덕였습니다. 그러나 그 대문밖에 내버려진 거지 나사로는 비록 거지였고 온 몸이 병들었으나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을 갖고 하나님을 섬기고 모셨기 때문에 그 육신이 죽었을 때 사라지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의 품안에 안겨 낙원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죽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부자도 죽어서 음부로 들어가고 나사로도 죽어서 낙원으로 들어가며 반드시 이 땅에 산 생명의 결과가 저 세상에서 다가온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시인하면 예수 공로로 말미암아 낙원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의 종말은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다 망합니다.

시편 90편 10절로 12절에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록합니다. 우리가 칠십 아니면 팔십, 그 중간에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갈지 모르니까 갈 준비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천년만년 살 것 같이 세상에서 죄악 가운데 살다가 지옥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기록합니다. 죽는 것이 화가되는 죽음도 있고 복이 있는 죽음이 있는데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이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발표된 국민 여론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의 45%가 자신을 하층민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또한 국민의 57%가 상위 계층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학생들이 대학 졸업을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답한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절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일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잃어버리면 꿈이 사라지고 방종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희망이 없으면 행복도 사라집니다. 국민들이 마음에 희망을 가져야 마음이 설레고 마음에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희망을 주는 정치, 희망을 주는 정부, 희망을 주는 기업, 희망을 주는 사회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치의 무서운 독가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터 플랭클 박사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온다”고 말하며 그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삶의 희망’을 꼭 잡고 있어야 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독일 나치 수용소에서 600만명이 독가스를 마시고 죽을 때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좌절하고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났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삶의 희망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이 세계가 희망을 가졌든, 못가졌든 우리는 하나님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서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앞길이 캄캄하고 사는 것이 그렇게 고통스러울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셨다는 그 소식이 진정으로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듯이 마음이 상쾌해지고 희망이 생기고 살아갈 힘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희망이 생기니까 용기와 능력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이야 희망이 있든 없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예수 믿는 사람만은 희망을 가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시므로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천로역정」으로 유명한 존 번연은 “만약 예수님이 나를 맞이하실 때 칼을 들고 나오실지라도, 나는 그분의 발아래 내 몸을 던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나의 최후의 희망이 되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예수님만이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아무리 지어서 세상이 버린 죄인 괴수도 용서하는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허물진 인생이 되어 버림받은 사람도 예수님 앞에 용서받고 성령 받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지독한 병이 들어서 의사가 다 내버린 사람도 예수님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버림받은 사람도 다시 재기할 희망이 있습니다. 지옥갈 인생도 마지막에 예수님을 고백하면 구원을 받는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좌우간 예수님은 희망의 원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전도자나 선각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구원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희망은 오직 예수님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애플을 세워 억만장자가 된 스티브 잡스도 얼마 전에 죽었습니다. 희대의 흉악한 독재자 김정일도 죽었습니다. 그들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 난 다음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동안 이 영원한 여행을 위해 언제나 가방을 싸 놓고 살아야 됩니다. 제가 한참 해외 선교를 다닐 때 언제나 제 방에 가면 가방을 싸놓았습니다. 언제고 주일 예배 드리고 집에 들어가면 가방 들고 비행장으로 뛰어 나가야 되니까 가방을 싸놓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은퇴하고 난 후에는 이제 해외 선교를 많이 안하니까 가방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에 가방을 싸놓고 살아야 됩니다. 그것이 지혜롭습니다. 마음을 다잡아 정리정돈 해놓고 언제 주님이 부르실지라도 후회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양에서는 동네 가운데 혹은 교회당 뜰에 묘지가 있습니다. 공원처럼 가꿔진 묘지에는 묘비들이 가지런히 세워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서 먼저 죽은 사람들이 기록한 글을 읽습니다. 그런데 어떤 묘지에 단 세 줄로 짤막했지만, 흥미로운 글이 적혀 있는 묘비가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묘비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첫 줄은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자리에 그렇게 서서 남의 묘비를 읽었소” 첫 줄을 읽은 그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줄에 “나도 전에는 당신처럼 그 곳에 서서 그렇게 피식 웃었소”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재빨리 다음 줄을 보자 거기에는 “이제 당신도 나처럼 죽을 것이니까 빨리 준비하시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며 성실하게 살아가야 된다는 경고였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남의 묘비를 읽을 때 자신은 죽지 않을 줄 착각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묘비를 읽을 때가 다가옵니다. 

사람들은 평소 죽음은 나와 상관없는 일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죽음과 종말은 반드시 다가오는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에서 우리가 절망할 것인지, 더욱 큰 소망 안에서 기뻐할 것인지는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소망을 향한 죽음인지 절망을 향한 죽음인지 이제 살펴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의 종말은 반드시 다가오며, 죽음 이후에는 심판이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희망의 십자가를 잡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 때, 우리는 영생 천국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깨닫고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것을 믿으면서 입술로 고백하며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면 성령께서 운행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십자가를 바라본 사람은 누구든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란 우리 힘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성령이 와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속에 성령이 와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성령이 우리에게 운행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찬송할 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이루어주는 것입니다.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죽음은 생명으로, 흑암은 광명으로, 무질서는 질서로, 무는 유로 창조적인 역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과 더불어 사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믿고 성령 안에서 신앙 생활하다가 성령의 품에 안겨 예수님 품인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절대절망입니다. 삶의 허무와 무의미 그리고 죽음의 공포는 항상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절대절망의 인생이 절대 희망의 인생으로 바뀐 것을 고백합니다. 성령님 동행하여 주셔서 주님 만나는 날까지 그 희망을 품고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조용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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