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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흠 없는 자녀로 살라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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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없는 자녀로 살라 (빌 2:12-18)
  

들어가는 말

서울 온누리교회 권사이며,‘여러분’이란 노래를 부른 윤복희씨의 간증이 국민일보(2012.2.1)에 나왔습니다.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끼이익∼” 
달리던 차가 급정거하면서 내는 날카로운 소리가 고막을 찢는 듯했습니다. 
차가 몇 바퀴를 굴러 중앙 분리대를 넘어 역주행선에 뒤집힌 채로 드러누웠습니다.“복희야, 많이 놀랐지? 안심해라.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란다.”1976년 2월 27일 새벽. 전주 공연을 마치고 대구로 이동하던 중 고속도로에서 내가 타고 있던 자동차가 큰 사고를 냈습니다. 

차는 완전히 망가졌지만 정신은 멀쩡했습니다. 
사고 과정이 너무나 생생했습니다. 
그러면서 내 귀에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아, 하나님이 나를 터치하고 계시는구나.’순찰차와 구급차, 견인차가 연이어 달려오고 사고 주변은 전쟁터가 된 듯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자동차 밖으로 나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비 내리는 고속도로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윤복희다! 살아있다.” 사람들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왠지 모를 눈물이 마구 솟구쳤습니다. 
호텔 방으로 들어서니 오전 11시쯤 됐습니다. 
누구에겐지 모를 감사가 마음속 가득 밀려들었습니다. 
창문으로 바깥을 내다봤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비를 맞으며 걸어서 공연장까지 갔습니다. 이제 공연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쿵’ 하는 소리가 나더니 극장 안이 깜깜해졌습니다. 
예기치 못한 정전에 공연 관계자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습니다. 
누군가가 횃불을 들고 와 무대를 밝혔습니다. 
마음속으로 분위기에 맞는 노래를 오프닝 곡으로 선정했습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막상 무대에 올라선 난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부르는 노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였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했습니다. 
그동안 유행가만 불러왔던 내가 처음으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불렀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간증을 길게 인용한 이유는, ‘하나님을 만만히 보지 말자.’는 것입니다.
본문에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을 의식하며 두려워해야 합니다.

지난 11월에 이어 다시 빌립보서를 강해합니다.
오늘 본문 빌2:12-18절의 말씀은 자기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정진을 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권면하는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이 함께 있을 때보다 신앙이 퇴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 ‘너희 구원을 이루라.’

우리는 ‘이미’ 구원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완전한, 종말론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칭의적인 구원은 얻었으나 성령의 도움으로 성결케 되는 성화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3:12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그러므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빌립보 교회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영적 성숙을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는 어떤 비판을 받았느냐 하면 ‘예수는 싫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참 좋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가 싫은 이유는 예수라는 이름이 고대 사회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좋은 이유는 그들의 인격이 이방인이 흉내 낼 수 없을 정도로 고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어떤 비판을 받고 있느냐 하면, ‘예수는 좋은데, 예수쟁이들은 싫다’는 소리를 왕왕 듣습니다.
예수가 좋은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의 삶과 사상이 얼마나 고상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쟁이가 싫은 이유는 그들의 인격이 너무 실망스럽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는 세 종류의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① 제자리에 앉아서 앉은뱅이 노릇하는 이들 - 퇴보도 진보도 없이 겨우 제자리만 지키는 신자들입니다.
② 점점 신앙 인격이 뒷걸음질 치는 이들 - 작년만도 못하고 어제 만도 못한 모습으로 퇴보하는 신자들입니다.
③ 앞을 향해 정진하는 이들 - 온전한 인격을 향해 꾸준히 정진하는 신자들입니다.

아기를 낳았는데, 커가면서 사고능력과 지혜가 자라지 않는 아이를 뭐라고 부르지요? 
정신지체아라고 부릅니다.
아기를 낳았는데, 세월이 지나도 몸이 자라지 않는 아이를 뭐라고 부르지요? 
발육부진아라고 부릅니다.
이런 아이를 가진 부모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집트에서 이런 분야의 사역을 해 봤기 때문에 어떤 사람보다 그들의 입장을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런데 영적인 지체아, 영적인 부진아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리스도인이 시간이 흘러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으면, 인격이 성장하지 않으면 바로 영적 지체아이고 영적 부진아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성장해야 합니다. 
성숙해야 합니다.

2. ‘두렵고 떨림으로’

그러면 구원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태도는 무엇입니까?
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이 말의 희랍어적인 의미는 ‘어떤 사물이나 사람 앞에서 전율하는 두려움’을 말합니다.
우리도 ‘다리가 후둘거릴 정도로 떨렸다.’라는 말을 하잖아요?
성도가 자기 자신의 뿌리 깊은 죄성과 그에 따르는 지옥의 형벌을 보고, 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확인할 때 오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 가져야할 성도들의 기본자세입니다.

서구인들과 한국인들의 죄에 대한 태도를 비교한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서구인들은 죄를 지으면 죄책감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적인 배경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은 죄를 지으면 수치심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유교적인 배경으로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의 현장에 카메라를 들이대면 사람들은 얼굴부터 가립니다.

그것은 수치심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깊이 뿌리박힌 죄성을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적인 무능력을 인정함으로써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공동체의 영적인 증진을 이루어 가길 명령합니다.

3.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그러면 공동체의 영적인 증진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4절을 읽습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공동체의 성화를 가장 방해하는 것은 원망과 시비입니다.
어쩌면 바울 사도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와 하나님께 원망하고 시비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민14:27-28절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기억하십시오.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① 원망이라는 희랍어 단어는 ‘불평을 품고 투덜대는 것’을 말합니다.
② 시비라는 단어는 ‘악한 의도로 다툼을 일으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말씀으로 보아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원망과 시비가 일어났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큰 일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더라.’는 가십(gossip)으로 망한다.’ 
목회학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작은 원망과 시비의 싹이 자라서 위태롭게 됩니다.

4. 이렇게 교회 공동체가 성숙하면 두 가지 결과를 얻게 됩니다.

1) 세상의 빛이 됩니다.

15절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빛의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빛은 자기 존재를 주위 것들과 구별시킵니다.
‘내가 여기 있다.’라고 사람들 앞에서 나팔을 불지 않아도 됩니다.
누구든지 빛을 알아봅니다.
빛 자체가 주위의 사물로부터 자신을 구별시킵니다. 

② 어두움은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 하더라도 빛이 비치면 어두움은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빛의 분량에 따라서 어두움을 정복하는 분량이 결정됩니다. 
빛의 분량이 적으면 주변만을 밝힙니다.
그러나 빛의 분량이 많으면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두움이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③ 빛은 자기소멸에서 나옵니다.
등잔불이 계속 빛을 발하자면 기름이 타들어가야 합니다.
촛불이 계속 빛을 발하자면 초가 타들어가야 합니다.
초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빛이 주는 의미는 ‘영향력’과 ‘희생’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성도란 영향력이 있어야 하고, 그 영향력은 희생을 통하여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 정치인 중에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25세 때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후부터 빛 된 삶을 살고자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영국에 잡혀온 아프리카 노예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습니다.
노예들의 고통이 그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사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27살 때 노예폐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노예를 매매하는 일이 국가재정 수입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도 노예문제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윌버포스가 노예폐지 운동을 벌이자 당시 영국의 거물급 정치인인 에빙턴 백작은 “인간의 존엄을 따지는 것은 사적인 감정이다. 인간의 존엄이라고 하는 것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을 따지는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정치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런 반대와 암살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싸웠습니다.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노예해방을 위해 헌신한 지 56년 만에 영국의회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는 사회에 영향력을 가진 크리스쳔 정치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성화되어 세상에 영향력을 가진 성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2) 하나님 앞에서의 자랑이 됩니다.

16절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날에 주님 앞에서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면류관을 주실 때 그 판단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해서 믿게 된 사람, 우리가 가르쳐서 성숙해진 그리스도인, 이들이 바로 우리의 면류관의 판단기준입니다.

그래서 어린 코흘리개들을 무릎 앞에 앉혀놓고, 갈등하는 청소년들의 등을 두드려주고, 번민하고 회의하는 청년들의 손을 붙잡고 상담하는 교회학교 교사들의 사역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핏덩이 같은 새가족을 보살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는 속회지도자들과 섬김이의 사역에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의 자랑이요, 내가 받을 상이 될 것입니다.
살전 2:19절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여기 이 사람들을 보십시오. 저가 뿌리고 양육한 사람들입니다. 잘했죠?”
‘복음주의의 맏형’이라고 불리는 홍정길 목사님이 은퇴했습니다. 

인터뷰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 기사 중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46년간 긴 시간 목회를 펼치셨는데, 은퇴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과연 무엇이 남았습니까?” “내 주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남습니다. 그래요. 그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 외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이름이요? 그거, 금세 지나갑니다.”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닙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십시오.
그래서 세상의 빛이 되시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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