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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 가운데 행하라 (요 3: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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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 행하라 (요 3:16-21)


혹독한 추위가 지나갔습니다. 60년만의 제일 추운 날씨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 큰 추위를 겪은 사람에게는 그러한 추위도 한낱 별것이 아닌 것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가장 긴 밤’ 등을 집필한 작가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5년간 암으로 투병하다가 사망했습니다. 그는 투병 중에도 매일 아침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좋은 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이언은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한결같은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무엇이 그렇게 감사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라이언이 대답합니다.
“새날을 맞는 다섯 가지 기쁨이 있어요. 첫째, 사랑하는 당신을 다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가족들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셋째, 병들어 눕기 전에 작품을 탈고한 것이 감사하지요. 넷째, 병마와 싸울 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지금 저와 가까운 곳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참 신앙은 죽음 앞에서 빛을 발합니다. 평온할 때는 모두가 참 신앙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 비로소 신앙의 진위가 가려집니다.
지금 나라 안팎으로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가 한결같이 위축되고 있습니다. 수출로 먹고살 수밖에 없는 경제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우리 역시 똑같은 추위를 느끼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난 IMF 시절보다도 더 어려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위기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더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중국 내지선교의 개척자 허드슨 테일러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중국에서 선교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신자가 되는 데는 몇 년이 걸립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테일러 목사가 “램프의 심지에 얼마 동안 불을 붙여야 빛을 발합니까?” 라고 반문하자 청년은 “그야 심지에 불이 붙는 순간부터 빛을 내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테일러 목사는 청년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삶의 빛이 그 영혼에서 타오르게 된답니다.”

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에 심지의 불이 깜빡거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으로 바람을 막기도 하고 심지 주위에 갓을 씌워서 바람을 막아줌으로 꺼짐을 방지합니다. 또한 심지에 그을음이 짙게 끼면 심지를 다듬어줌으로 심지가 밝게 타오르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내 영혼의 빛은 밝게 타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바람 앞의 등불처럼 그 명맥마저 유지하기 어렵지는 않은지요? 아니면 세상의 때로 가득차서 제대로 빛을 내지 못하고 그을림만 내뿜는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의 참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누가 알까요? 자식들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마음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아버지가 되어보고 나야 어렴풋이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뿐이지 아주 그 마음 깊숙이까지 알지는 못합니다. 자식들 마음 상할까봐 하고 싶은 말도 다 하지 못하고 그건 아닌데 하면서도 끝까지 자기주장도 펴지 못하는 것이 아버지의 인생입니다.

만일 오늘이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후회하게 될까요? 돈이나 명예 따위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만 구체적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임종의 순간을 미리 맞았던 타인들의 ‘깨달음’을 참고하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영국 “가디언”은 1일 최근 영어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책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다섯 가지”를 소개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말기환자들을 돌봤던 간호사 브로니 웨어가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모아 펴낸 책입니다.

이 간호사는 수년간 말기환자 병동에서 일하며 환자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통찰’을 꼼꼼히 기록했습니다. 그가 지켜본 사람들은 임종 때 경이로울 정도로 맑은 정신을 갖게 됐는데,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놀랍게도 후회하는 것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가장 큰 후회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지 말고, 스스로에게 진실한 삶을 살 용기가 있었더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삶이 끝나갈 때쯤 돼서야 얼마나 많은 꿈을 이루지 못했던가 ‘명확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기로 한 자신의 ‘선택’ 때문에 꿈의 절반조차 이루지 못한 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일 좀 덜 할걸’ 하는 후회는 ‘모든 남성’에게서 나타난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들은 회사에서 쳇바퀴를 도느라 아이들의 어린 시절과 배우자와의 친밀감을 놓친 것을 ‘깊이’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감정’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부작용’을 지적했습니다. 그들은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해 내면에 쌓인 냉소와 분노가 ‘병’을 만들었다고 여겼습니다.
사람들은 또 임종 직전에야 ‘오랜 친구’의 소중함을 깨닫곤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땐 친구들의 연락처도 수소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좀 더 행복하게 놔두지 않은 것도 큰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게 웃고 삶의 활력소를 찾고 싶었다는 걸 깨닫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때는 마음으로는 간절했지만 결코 내색조차 하지 못한 채 지나가버린 세월도 있고 어떤 길은 뒤늦게 후회하면서 결코 가서는 안 될 길이었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누군가가 “부부가 서로 싸우는 것이 꼭 불필요한 것만도 아니다. 

오히려 부부는 서로 싸우면서 서로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동반자이다”라고도 표현했지만 문제는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것인지 행복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이야기도 있고 답답해서 하는 이야기도 있고 웃자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는 것을 우리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화가 참으로 힘든 것은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으면 그대로 듣고 있지를 못합니다. 꼭 무언가 지적을 하고 답을 주어야 하는 줄 압니다. 하지만 그냥 들어주는 것이 제일 좋은 것입니다. 말을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주면 말하는 가운데 내가 답을 주지 않아도 스스로 답을 다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알아서 덕이 되지 않을 일은 그냥 혼자 간직하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귀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이야기를 항상 귀담아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어떤 죄라고 해도 다 용서하십니다. 용서하실 뿐 아니라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우리 죄를 옮겨 버리시고 더러운 것을 페인트칠을 하듯 도말하시며 우리의 묵은 때를 벗기듯 다 벗겨버리십니다. 그리고 이제 깨끗해진 내 모습만 보시는 분이십니다. 한 번도 너 전에 이랬던 적이 있잖아 하는 말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언가 답을 주어야 하는 줄로 압니다. 하지만 답이 없는 경우가 더 많고 답이 있다고 해도 말하는 사람이 원하는 답과 내가 생각하는 답이 다를 경우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정답이 있다면 우리 함께 기도하자 나도 너를 위해 기도할게 하는 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누구를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요 우리에게 살릴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누군들 아픔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걸 쉽게 드러내어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슴에만 품고 사는 사람도 있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 털어 놓으라는 것입니다. 

제게도 그런 아픔이 있습니다. 자식들 구김살 없이 잘 컸다고 하나 지금은 자기 살기에 바쁜 아이들을 보면서 자녀를 낳아서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아이들을 보면서 한두 번 아픈 마음에 이야기도 해 봤지만 여전한 숙제가 남아 있습니다. 그건 자녀들과 함께 예배하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아이들은 자기애들에게 유익한 예배가 진행되는 그런 교회를 찾아갑니다. 거기다가 아버지 밑에서는 목회자의 자녀라고 하는 굴레가 감당하기 쉽지 않다고 하니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해도 그저 마음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뿐이죠. 어떤 때는 그런 자녀들이 참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미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식인데 거기다가 손주들을 위해서 그런다는데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어요. 그래도 어쨌든 함께 예배하지 못한다는 아픔 그리고 성도들의 본이 되지 못한다는 마음의 아픔은 큰 응어리로 남아 있고 그래서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더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녀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한번 헤아릴 수 있다면 정말 자식을 위해서 내 몸 아끼지 아니하고 온 몸을 불사르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한다면 달려오는 차를 보면서 자기가 다칠지언정 자식을 지키기 위해 온 몸으로 감싸 안는 그 부모의 마음을 우리가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주고 또 주고 마지막 자기 목숨까지 내어주신 분입니다. 아무리 다 망가지고 거지꼴이 되었어도 돌아오는 아들을 뛰어나가 맞아주며 새 신을 신기고 새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세상에 비친 빛입니다. 

온갖 탐욕과 욕심으로 가득한 세상을 어떻게 밝힐 수가 있습니까?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어둠을 무엇으로 밝힐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불사르기로 하신 것입니다. 한 줄기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불사르셨습니다. 세상을 위한 제물이 되셨습니다.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히듯 초를 녹여 불살라 어둠을 밝히듯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멸망 가운데 내던져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 누구도 어둠 가운데 그냥 버려지도록 내두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애써 어둠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인생들이 있습니다. 자꾸만 감추려고만 듭니다. 아니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아픔이 내비쳐지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어둠으로 표현되는 아픔들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 평생 살아오는 동안 감추고만 싶은 일들이 어찌 하나둘이겠습니까? 말 못할 사연들 가슴 속 깊이 감추어둔 상처들은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겉으로는 웃어도 속으로는 울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감추고만 싶은 일들 때문에 우리는 또 도망칩니다. 

도망치면 거기서는 나의 아픔을 모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다고 궁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친 상처는 다 아물었어도 그 흉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가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그래서 더 큽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라는 것이 한번 상처 입은 마음은 쉽게 상처를 다시 받게 되더라는 것이죠. 그래 더욱 힘이 듭니다. 마치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하는 우리 말 속담처럼 그런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사람들이 이 세상에 만들어졌을 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나서 처음 허락하신 것이 안식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안식 즉 쉼을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평안을 누리는 삶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그런 우리의 모든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어떻게 우리가 이런 평안을 누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다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할 수 있고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걸림돌이 하나도 없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빛 가운데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죄의 형벌을 믿음 안에서 다 면제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이미 심판이 면제되었습니다. 그 누구도 이제는 더 이상 우리를 죄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다릅니다. 그는 믿지 않기 까닭에 이미 심판을 받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구원의 효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빛이 비쳐도 어둠의 동굴 속에 남아 있으면 그 빛이 비쳐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오히려 빛이 싫습니다. 그래서 자꾸 빛을 피해 숨습니다. 아니 애써 빛을 외면합니다.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만 내 코가 석자라고 하는 자식들처럼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의 낯을 애써 피합니다. 아니 오히려 거기에 반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 세상에 돈 한 푼 벌기도 얼마나 어려운데 하늘나라를 그래 ‘믿습니다’ 하고 한 마디 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다니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냐?”고 합니다. 그래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어도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보십시오. 
여기 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이라고 하는 것이 두 가지 원소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하나는 수소고 또 하나는 산소입니다. 수소 둘에 산소 하나가 만나서 이루어진 것이 물입니다. 수소도 기체이고 산소도 기체입니다. 그런데 그 둘이 만나면 물이 됩니다. 액체가 됩니다. 산소도 불에 잘 타고 수소도 불에 잘 탑니다. 그런데 그 둘이 합쳐지면 오히려 불을 끄는 물이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모든 것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자 안에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런데도 우리는, 나는 안 된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그런 말을 함부로 합니다. 하지만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믿음이 능력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통해서 오늘날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믿는 자는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과거에 어찌됐던 지금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행합니다. 누가 과거의 부끄러운 일을 들추어낸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상처 받지 않습니다. “맞다 내가 과거에는 그랬다. 그런데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다”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숨지 마십시오. 부끄러운 일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움츠러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런 나를 품에 안아 주셨습니다. 아니 나를 품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더 큰 아픔을 겪으셨습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오늘 나를 감싸 안아주십니다. 그리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들의 모든 삶을 주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허다한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결코 다시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나는 기억합니다. 아니 내 안에 죄성이, 내 안을 기웃거리는 마귀가 너 옛날에 그랬잖아 하고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상처를 건드립니다. 하지만 상처는 흔적일 뿐이지 그 상처를 건드린다고 해서 아픈 것은 아니잖습니까? 이미 하나님이 다 용서하시고 기억도 하지 않는 일을 왜 내가 기억하고 다시 끄집어내서 이래서 나는 안 된다고 하십니까? 아니에요. 하나님의 용서는 기억도 하지 않는 용서요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계속하시는 용서에요. 

그리고 우리 손을 여전히 붙잡아 주시고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여전히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을 바울 사도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으십시오. 하나님이 나의 능력되심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일하시도록 나를 맡기십시오.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주님에게 나아가십시오. 그 주님 앞에 모든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나 혼자 짊어지고 끙끙거리던 모든 일들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자녀된 나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신다는 뜻도 됩니다. 자녀가 아쉬운 것이 있으면 부모에게 손을 벌리듯이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아버지께 당당하게 구하십시오. 힘든 것은 힘들다고 하십시오. 필요한 것은 당당하게 말씀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한 번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니까 숨기지 말고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지 말고 그 모든 아픔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십시오. 하나님께 그 모든 아픔을 다 말하십시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말을 끝까지 다 들어주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씻어주실 뿐 아니라 궁극적인 해결책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아픈 상처도 다 싸매주시고 고쳐주십니다. 우리 삶에 필요한 모든 것도 은혜 가운데 풍성하도록 채워주심으로 우리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넘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에 품에 언제든지 안기십시오. 그래서 주님의 모든 은혜와 영광으로 가득한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문제에 부딪치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인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 시간도 우리의 삶 가운데 넘쳐납니다. 문제에 부딪쳤을 때 많은 사람들은 절망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도 보이지 않고, 귀에는 아무 소리 들리지 않고, 손에는 잡히는 것이 없을 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의 팔로 안아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능력으로 붙드시기에 우리는 능히 원수의 위협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 된 자들은 위대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우리 속에 담긴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으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으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항상 예수님을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고 다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80세가 된 모세는 막차 탄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호렙산 불꽃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팡이 하나로 애굽으로 건너가 이스라엘의 독립을 기어이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는 거대한 애굽과 바로 왕에게, 그리고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끝내는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까지 이끌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역사 선생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매우 진지하게 말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는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군사들을 피해 갈라진 바닷물 사이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단다. 왜냐하면 그 당시 홍해의 깊이는 겨우 무릎이 잠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자 믿음이 좋은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나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얼마나 놀랍습니까? 겨우 무릎 깊이의 물에 이집트의 군사들을 모두 빠져 죽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직 나를 위하여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에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기를 바랍니다.

자기 외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서 믿음 안에서 우리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고 우리들에게 공급해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하시고 믿음으로 말씀 안에서 순종하여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항상 감사하며 우리도 그런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빛의 사람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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