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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삼손 : 거룩과 세속 사이 (삿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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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 거룩과 세속 사이 (삿 13:1-7) 
 
  
❚거룩과 세속 사이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은 어떤 고민을 하며 살까요? 어떤 여론조사에 보니 여러 가지 고민 중에서 1위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신앙과 현실 사이의 갈등!’ 그렇습니다. 주일과 월요일부터 토요일 사이의 삶에 갈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 와서 은혜 받고 들은 말씀과 교회를 떠나 세상으로 가서 사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에 이런 저런 갈등이 있다는 것이지요. 특별히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 물었습니다. 구체적인 신앙과 현실 사이의 갈등에는 어떤 것이 있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술 담배 문제, 회식 문화, 직장에서 이루어지는 관행 문제, 돈의 유혹’ 등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직장이나 사업에서 이런 고민 한 번 안 해본 분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참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목사님은 설교하면서 너무 쉽게 말씀하시지만 솔직히 저희들은 나름 고민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유혹이 너무 많아요. 손해볼까봐, 직장에서 남들 다 하는데 혼자만 왕따 당할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저는 목사이고, 일찍이 목회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에 직장생활도 사업도 안 해봤습니다. 그래서 너무 쉽게 “죄 짓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도 여러분의 아픔이나 고민을 압니다.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겪는 갈등도 압니다. 저인들 어찌 쉽게 여러분에게 “당신들은 이렇게 사세요” 하고 말하겠습니까? 저 또한 목회자지만 신앙과 현실 사이에 갈등도 있습니다. 솔직히 제가 설교하는 대로 다 실천하며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고민입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여러분 보고 그렇게 쉽게 말하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연약하고 너무나 쉽게 세속의 유혹에 빠지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고민과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요?

오늘부터 네 주 동안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이라는 인물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삼손이냐? 삼손이야말로 우리의 이런 고민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제목인 “삼손 : 거룩과 세속 사이”처럼 삼손은 거룩한 삶과 세속적인 유혹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한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때로는 세상적인 유혹을 따라 살고, 그러다가 큰 낭패와 고통을 겪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하는 그런 인물입니다. 

그래서 삼손이야말로 오늘날 거룩한 성도로서의 삶과 세속적인 유혹 사이에 고민하고 갈등하는 현대 크리스천들, 바로 우리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성경의 인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삼손은 어떻게 하면 이런 고민과 갈등을 해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수 있을지 잘 보여줍니다. 오늘부터 네 주 동안 저와 함께 삼손이라는 인물을 탐구하면서 그의 고민과 갈등, 그의 선택, 그 결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 주시고 우리가 가야 할 바른 길을 보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힘센 삼손?

1910년, 제스 슈웨이더라는 사람이 미국 덴버 시에서 작은 가방 제조 회사를 설립합니다. 처음에는 단 열 명의 직원을 데리고 회사를 시작했지만 제스 슈웨이더의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오랜 여행에도 끄떡없는 튼튼한 여행가방을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의 직업관이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1940년대가 되면서 비행기 여행객이 점점 늘어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비행기 수하물로 부치는 가방은 툭하면 파손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항공회사 직원들은 짐을 나를 때 조심하지 않고 집어던지기 일쑤여서 가방이 찢어진 것입니다. 

제스 슈웨이더는 늘 “제가 사람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잘 파손되지 않는 튼튼한 가방을 만들어 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드디어 1941년에 아주 튼튼하고 값도 저렴한 새로운 가방을 만들면서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고민하던 중 성경을 읽는데 ‘삼손’(영어로 Samson)이라는 이름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삼손만큼 힘이 세다”는 뜻을 담아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샘소나이트(Samsonite) 가방’입니다. 그만큼 삼손은 힘세고 강한 사람의 상징인 것입니다. 저희 집에도 샘소나이트 여행가방이 있는데 값은 좀 비싸지만 정말 튼튼하고 좋습니다. 아무리 집어던져도 잘 파손되지 않고 오래 씁니다. 이름 참 잘 지은 것 같습니다.

저는 ‘삼손’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영화관에 가서 <삼손과 데릴라>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1949년 만들어진 영화인데 영화 <십계>를 만든 세실 B. 드밀 감독에 빅터 마추어와 헤디 라마가 각각 삼손과 데릴라 역을 맡았습니다. 여기서도 삼손은 근육질 남성,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도 삼손을 ‘힘센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 이야기는 단순히 삼손이라는 힘센 영웅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은 삼손이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려는 것입니다. “삼손을 봐라. 그가 하나님이 주신 힘과 능력을 어떻게 쓰는가, 그 힘과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의 정욕과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쓸 때 어떻게 되는지.” 나아가 삼손은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거룩과 세속 사이에서 고민하는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삼손의 시대, 삼손의 등장

우리가 이 삼손이라는 인물에 대해 바로 알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해 봐야 합니다. 첫째는 본문 1절에 나오는 ‘삼손의 시대’입니다. 1절을 같이 읽지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1절은 삼손이 출생할 당시, 즉 구약성경 사사시대 말기의 암울한 영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앞서 사사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범죄해서 그때마다 이방민족을 통해 하나님께 얻어맞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하나님께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같은 죄를 계속 반복하면 죄질이 더 나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끝까지 정신 못 차립니다. 베드로후서 2:22에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는 속담이 나오는 것처럼 같은 죄를 거듭 범합니다. 그렇게 얻어맞고 혼나도 정신 못 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철천지원수인 블레셋에게 40년 동안이나 붙여 그들의 압제를 받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십시오. 같은 죄를 반복하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한 번 죄는 실수라고 할 수수 있지만 계속 같은 죄를 범하는 것은 고의적입니다. 그래서 벌이 더 큽니다. 특히 얻어맞고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같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어떤 도구나 방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것도 아주 세게, 오랫동안 말입니다. 그러니 제가 늘 하는 표현처럼 “좋은 말로 할 때 죄 짓지 말고 순종”하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는 본문 5절과 7절에 나오는 ‘나실인’입니다. 삼손은 단순히 힘 센 사람이 아니라 사사요 나실인이었습니다. ‘사사’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이후 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도자들입니다. 사사기에는 열두 명의 사사가 등장하는데 사사란 평상시 평화로울 때에는 재판관(=사사) 역할을 하다가 이방인이 쳐들어와 전쟁이 벌어지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는 전쟁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삼손은 바로 하나님이 이런 사사 역할을 하게 하려고 세우신 사람입니다. 

또한 삼손은 ‘나실인’으로 구별된 사람입니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나실인’으로 구별됩니다. 나실인(Nazirite)이란 ‘하나님께 성별(聖別)된 사람’이라는 뜻인데 오늘 본문에도 나왔지만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은 반드시 세 가지 규정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할 것. 둘째, 삭도를 머리에 대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 것. 셋째, 시체, 심지어 부모 형제자매가 죽은 때에라도 시체를 만지지 말 것, 이 세 가지입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라는 것은 술에 취하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넓게는 모든 세상적, 인간적 즐거움을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머리카락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상징하므로 머리를 밀지 말라고 한 것처럼 나실인의 거룩한 헌신을 상징하고,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힘의 근원을 상징하므로 깍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그만큼 부정한 것, 더러운 것으로부터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나실인 규정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합니다. 하지만 나실인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해 드려진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만큼 철저히 구별되어야 하고 또 세상적인 것과 단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려면 세상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모든 부정한 것,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 성도들도 다 나실인이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2:9 말씀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비록 이 말씀에 ‘나실인’이라는 표현이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말이 바로 나실인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나실인처럼 철저하게 성결한 삶을 지켜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2:21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하신 것처럼, 물론 이렇게 하나님께 선택된 삶, 하나님께 바쳐진 삶을 살기 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러기에 더욱 귀한 길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실인으로는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대표적으로 ‘성공한 나실인’은 사무엘입니다. 반대로 삼손은 ‘실패한 나실인’입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비교는 다음 시간에 다루겠습니다.

셋째는 ‘삼손의 출생’ 이야기입니다. 방금 살펴본 1절 말씀처럼 영적으로 너무나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대에 하나님은 삼손이 필요해서 그를 잉태하게 하시고 그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소라 땅에 단 지파에 속한 마노아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던 중 여호와의 사자가 아내에게 나타나 아들을 잉태할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무엘이나 세례 요한, 예수님이 태어날 때 이렇게 천사가 예고를 하지요. 기억하세요!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은 오직 하나님 소관입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건강과 생명연장이 필요하신 분은 하나님께 의지하십시오. 새 생명의 잉태가 필요한 가정도 물론입니다.

그런데 사자는 마노아의 부인에게 두 가지를 금지합니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부정한 것을 먹지 말라.” 나실인 자신뿐 아니라 그를 잉태한 어머니도 이런 것들을 금하고 자신을 정결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요즈음 태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임산부가 먹는 것, 보는 것, 듣는 것까지 조심하는데 하물며 영적인 태교는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기도하고 말씀 보고 좋은 것, 은혜로운 것만 대해야지요. 임산부뿐 아니라 모든 부모의 영적인 상태는 자녀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본문 뒤에 나오는 24절을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예언한 대로 아들이 태어납니다. 이름은 ‘삼손’이라고 붙이는데 히브리말로 ‘쉼숀’으로 ‘태양 같은, 태양의 사람, 태양의 자녀’라는 뜻입니다. 이름이 얼마나 멋지고 거창합니까? 이름대로라면 삼손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민족의 태양 역할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암울한 이스라엘 역사에 찬란한 햇빛을 비춰주는 희망이 되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과연 이름값을 합니까? 오히려 삼손의 삶을 보면 ‘햇빛’이 아니라 ‘먹구름’이라고 지었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이름을 어떻게 짓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며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자녀가 이름값을 하며 살도록 말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값을 하도록 말입니다. 계속해서 24절에 보면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십니다. 또 나중에 삼손이 장성하자 ‘여호와의 영’ 즉 성령께서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십니다. 

장차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요 태양으로 쓰기 위해 성령이 그에게 임하신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모두 그런 것처럼 삼손도 성령의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그가 어떻게 살아갔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여기 대해서는 다음 주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지만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한 마디로 실망입니다. 이만저만 실망이 아닙니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이를테면 결혼) 그는 세상적인 기준, 정욕의 기준으로 결정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힘, 그 모든 복과 성령의 감동까지도 그는 죄다 자신의 정욕과 개인적인 복수심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 모든 까닭은 설교 첫머리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삼손이 거룩한 사명과 세속적인 세상의 정욕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세속 편, 세상 편’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나실인, 하나님의 종조차 이럴진대 지극히 평범한 우리는 얼마나 갈등이 많겠습니까? 그 위대한 하나님의 종인 사도 바울조차 로마서 7장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하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 뜻대로 거룩하게 살고 싶은데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법이 나를 사로잡아 자꾸 자신을 죄짓는 길로, 세상의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연약합니다.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죄짓기 쉽고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렵고 갈등이 있기 때문에 굳게 결단하고 손해 볼 각오 하고 ‘거룩의 편’에 서기로 결정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참으로 귀히 보십니다. 쉬운 일이라면 뭐가 귀하겠습니까?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큰 결단이 필요합니다. 고민 되십니까? 어렵습니까? 그러기에 더욱 굳은 결단으로 세속이 아닌 거룩의 편에 서십시오. 

이 세상에 시험들 일, 유혹이 얼마나 많습니까? 넘어질 일, 무너질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자라나는 자녀들은 또 어떻고요? 걱정 안 되십니까? 그러므로 어떤 결정이나 선택을 할 때마다 반드시 거룩의 편에 서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만 따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을 지켜주시고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과 자녀들이,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네가 손해 볼 줄 뻔히 알면서, 힘든 줄 알면서도 내 편에 서니 너무 귀하다. 네가 내 편에 섰으니 나도 네 편에 서겠다.” 여러분이 하나님 편을 택하시면 하나님도 여러분 편에 서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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