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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출 33:9-11, 요 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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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 (출 33:9-11, 요 4:20-24)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참일 때 영국정부는 온 국민이 존경하는 윌리엄 템플 감독에게 전쟁공포에 떨고 있는 영국 국민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템플 감독은 전 영국국민들에게 라디오메시지를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은 우리가 다른 어떤 때보다도 전능하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 예배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상처받고 신음할 때, 하나님의 사람이 빛을 잃을 때가 예배할 때입니다. 세계가 전쟁과 테러와 갈등 가운데 고통당하고 있을 때가 예배할 때입니다. 자연과 환경이 신음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동물과 식물이 죽어갈 때 우리는 예배할 때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꾸시는 일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시는 일입니다. 토미 테니는 “어떤 것도 열정적인 예배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찾으신다면 어떤 사람을 찾으시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찾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예배 때문에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구약에는 두 천사가 아브라함을 찾아와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이 두 천사는 다시 소돔에 가서 롯의 집을 찾아갑니다. 천사들은 롯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하고 가족들과 함께 떠날 것을 일러줍니다. 천사들은 의인을 구하려고 소돔에 찾아온 것입니다. 신약에는 천사가 가이사랴의 고넬료를 찾아갑니다. 그는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구제에 힘쓰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는 고넬료에게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라고 하였고 베드로가 와서 고넬료의 집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자를 찾으십니다. 
  
천사가 세상에 내려와 찾을 때마다 의인을 찾습니다. 경건한 자를 찾습니다. 진실한 자를 찾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막 예배는 예배의 원형입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는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 문에 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실 때 구름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마다 하나님은 내려오셔서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10에는 “모든 백성이 회막 문에 구름 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 문에 서서 예배하며”라고 합니다. 광야에서 회막을 지으신 뜻은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11절에는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대화는 인격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지혜 중 가장 뛰어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 중 가장 뛰어난 행위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오신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예배자가 되심을 축하합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오늘 여러분들을 바로 찾으셨습니다. 우리의 평생의 삶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되고 주일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예배가 되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버지께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4:21에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합니다. 아버지께 예배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예배는 예배의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배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예배를 받을만한 바른 대상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드리라고 하나님의 백성을 출애급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배의 대상으로 합당하신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배의 유일한 대상입니다. 시편 29:2에는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고 합니다.  
  
브라우닝은 모든 예배는 하나님과 같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배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주를 찬미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는 한 마디로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데서 시작합니다.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1:3에서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예배하라고 해방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배를 잊었다는 하나님의 한탄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이방신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가나안의 신은 ‘바알’이라는 남신과 그의 배우자 ‘아세라’가 있습니다. 모압에는 ‘그모스’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블레셋에는 ‘다곤’이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암몬에는 ‘몰렉’이라는 신과 ‘밀곰’이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변방국가가 가지고 있던 이런 신들을 받아들여 하나님과 바꾸는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런 이방의 신이 이스라엘에 들어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아합왕의 왕비인 이세벨은 ‘아세라’를 들여와 하나님을 대치하여 악을 행하고 하나님은 노엽게 하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숭배본능이 있습니다. 해, 달, 별, 나무, 바위, 산, 바다, 짐승 그 외에 닥치는 대로 신을 만드는 인간의 본능이 있습니다. 이 숭배본능으로 예배하는 대상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본에는 팔백만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일억의 신이 있다고 합니다. 놀라지 마세요. 한국에도 팔만팔천 신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민족이 가지고 있는 신도 만만찮습니다. 
  
사도행전 17:23에는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고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아테네에 갔을 때에 얼마나 많은 신이 있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너무 많아 이름이 없는 신도 있었습니다. 
  
월터 윙크(Walter Wink)는 “예배란 집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행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합니다. 교회는 누구의 집입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우리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이곳에서 오로지 하나님만 예배의 대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에서 어떤 다른 대상도 예배의 주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느헤미야 7:1에는 “성벽이 건축되매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들을 세운 후에”라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마친 다음에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문지기를 세우는 일입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는 일입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성벽을 잘 쌓고 문단속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침입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 일이 예배자를 세운 일입니다. 노래하는 자들인 찬양대를 세우고, 레위사람으로 하여금 성전 봉사자로 세웠습니다. 이들을 세워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하게 하려고 예배자를 세운 것입니다. 바른 예배자를 세우고 바른 예배를 드리는 것은 가장 우선적인 일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목사나 장로가 아닙니다. 돈이 많고 지식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로지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참 예배자를 찾으십니다. 
  
시편 84:10에는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합니다. 성전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참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이 되려면 좋은 예배자가 되세요. 좋은 예배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찬송가 503장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하도다”. 이런 사람들이 세상이 많이 있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여기 오면 있더라’라고 할 수 있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인 우리교회를 통하여 이 집의 주인인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교회가 참 예배하는 교회, 하나님의 찾으시는 사람들을 만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참되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요한복음 4:23에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되 참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참 예배란 말은 참 예배가 아닌 예배가 있다는 뜻입니다. 참 예배가 아닌 예배는 영과 진리가 빠진 예배입니다. 알맹이가 없는 의식적인 예배입니다. 바리새인의 형식적인 예배를 예수님은 책망하십니다. 마태복음 15:8에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고 하십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마음에 없는 찬송, 입으로 하는 기도, 가슴에 담지 않는 말씀, 정성이 없는 봉헌,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예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기록은 성경에 두 차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성전을 숙정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또 한 번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성전을 숙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성이 없는 예배를 책망하신 것입니다. 당시에 제사는 정성이 빠져 있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성전에 올라와 성전 뜰에 와서 적당히 돈을 바꾸고 제물을 사서 제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가 어떤 예배일까요? 21절에서 말하는 ‘아버지께 예배’와 같은 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는 영과 진리의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시므로 진리의 예배를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영과 진리의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것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도 같은 말입니다. 왜냐하면 ‘참’이란 말은 ‘진리’라는 말입니다. 참 예배는 진리의 예배인데 진리의 예배란 그리스도의 메시야성을 믿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이고 진리의 예배입니다. 
  
히브리서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예배하는 자입니다. 예배하는 자의 도리는 하나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아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고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라는 말입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란 예배의 예복을 잘 갖춘 예배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예배의 내용과 형식이 잘 갖추어져야 합니다. 영과 진리의 예배란 경건성과 축제성을 겸비한 예배입니다. 이 중에 어느 하나도 상실하면 참 예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2:11-12 상반절에는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이라고 합니다. 임금의 잔치에 초대 받아 갈 때에는 최소한의 예복이 필요합니다. 왕에게 나아갈 때는 예의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최소한의 예복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복은 예배하는 자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예배는 경건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예배자의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배자의 마음이 필요하고, 예배자의 의복이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과 형식이 없이는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방 사원게 가보면 어떤 사원에는 꼭 모자를 써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원에는 다리를 보이지 않게 가려야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지난 번 발리에 갔을 때 ‘울루와뚜 절벽사원’에 가보니 그 사원에 들어갈 때는 허리에 띠를 묶어야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사원에도 들어가는 최소한의 예복이 있는데 하물며 교회이겠습니까? 
  
신학자 하비 콕스는 세 가지 유형의 교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기의 교회입니다. 둘째는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의 교회입니다. 셋째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계시록의 교회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나 계시록보다 시편이 훨씬 더 깁니다. 이건 저의 해석인데 우리의 교회생활에서는 감사와 축제가 다른 것보다 더 많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비 콕스는 “예배에서 축제성이 상실된 다음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축제와 같은 기쁨이 없으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죽었다고 한다는 말입니다. 예배가 역동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대한 경축입니다. 예배는 즐거움이 있는 잔치입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볼 때 가장 기독교가 강하게 성장하는 지역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입니다. 이 지역의 교회들은 열정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가 축제입니다. 찬송과 춤이 하나가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예배에 참여해보면 3시간 이상을 쉬지 않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습니다. 찬송과 기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성장하고, 기쁨이 충만한 교회입니다. 
  
우간다에 가서 그들의 예배에 참여해 보니까 작은 북인 봉고를 껴안고 치면서 쉴 새 없이 ‘하나님 사랑합니다’란 뜻의 ‘아포요 뭉구’를 외칩니다. 예배 전체가 춤이며, 찬양이며, 축제입니다. 오래 전에 브라질에서 예배를 드리고, 코스타리카에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이 사람들은 서서 노래하고 몸 찬양을 하는데 거의 3시간가량 예배합니다. 쉬지 않고 웃으며 즐거워하며, 박수치며 예배하는 것이 마치 잔칫집이었습니다. 
  
시편 118:24에는 “이 날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것이라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예배는 경건함과 더불어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의 기자는 이런 예배를 드릴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결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가 즐거워야 한답니다. 첫째, 눈이 즐거워야합니다. 둘째, 입이 즐거워야합니다. 셋째, 귀가 즐거워야 합니다. 넷째, 몸이 즐거워야합니다. 다섯째, 마음이 즐거워야합니다. 예배는 우러러 하나님을 보면 눈이 즐겁고, 찬송하면 입이 즐겁고, 말씀을 경청하면 귀가 즐겁고, 교회에 오고가면 몸이 즐겁고, 성도가 서로 교제하면 마음이 즐겁습니다. 예배야말로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참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일마다 마음이 흥분되고, 즐거움이 살아나고, 새로움이 샘솟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들어오시는 모습만 보아도 설렘이 있고 기대가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보다 더 설레고 더 크게 웃고 계실 것입니다. 
  
예배 받기를 즐겨하시고, 예배 받으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고 예배하는 자를 행복하게 하십니다. 오늘도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서 “너 왔구나”, “너도 왔구나” 할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반면에 ‘어, 아무개 안 보이네“ 하시는 하나님의 근심이 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랍니다.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예배자가 됩시다. 우리 예배가 경건하고, 축제 있는 예배가 되어 하나님도 우리도 기쁨이 충만한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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