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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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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에 대한 복의 설명은 세 가지 내용이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웃에 관계없이 혼자만의 노력으로 성령님의 도움 안에서 이 세 가지는 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네 번째 말씀의 복은 이웃이 관계되어지는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신약 성경에 가장 뚜렷한 신약의 초점은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큰 은혜 설명이 신약의 초점이고, 구약 성경에서 제일 많이 강조되는 신학의 초점은 하나님의 “공의”, “의”를 기준으로 말씀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불교의 자비라든가 공자의 인애 교육이라든가 종교마다 조금씩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런데 의에 대한 강조는 기독교가 아주 가장 뚜렷하게, 특별히 구약 성경 가운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의란 무엇인가? 옳은 일이라고 우리가 쉽게 해석할 수 있는데 구약 성경에 나타나는 그 많은 예언자들은 평생을 통해서 그토록 열심히 했던 일이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예언자들의 의의 선포는 사회복음주의에 맞추어서 이루어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설교를 보아도 알 수가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앞에 모였을 때 세례 요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니까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구제 활동입니다. 그 다음에 그곳에 세관원들이 많이 왔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질문했더니 “너희들은 부과된 세금 외에 절대로 거두지 말라.” 공직자의 비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군인들도 많이 왔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무력의 힘을 가지고 절대로 강포하지 말라.” 의에 대해서 그러한 설교를 많이 했던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세례 요한은 구약의 예언자와 신약의 예언자를 연결하는 그 중간 지점의 예언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무엇을 기준해서 정했는가? 이 문제를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주”라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 “주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가 뭔가?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이 몇 가지로 성경 가운데 사용이 된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하여 “주여!”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가 아브라함에게 “내 주여!” 이렇게 불렀습니다. 

또 종이 주인을 부를 때 “주여!” 이렇게 불렀고, 사람이 하나님을 부를 때 똑같이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용도로 주라는 말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의 뜻은 “당신은 나의 주인이 되십니다. 나는 당신의 소유입니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요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 선언을 하실 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므로 주여!” 주님이 되셨습니다. 모든 것의 주인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주”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주 분명한 방향이 주어지는데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소유는 모두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확실한 진리를 알게 되는데 그 중에서 의란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권리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 세상에 어떤 권세 있는 자가 그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리를 대행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이 권세가 자기 것인 것처럼 자신의 마음이 결정하는 옳지 아니하는 일을 마구 행하면서 살아가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감옥에 투옥시키기도 하고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일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의를 행하려는 사람들은 오늘 성경말씀이 무엇을 의무화했느냐 하면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그에게서 빼앗아서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게 의입니다. 부정한 힘에 빼앗긴 의를 되찾아서 의의 주인인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일을 말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국가에 그렇게 민주화 운동이 많이 일어났고 독재정권 타도가 그렇게 많았던 것입니다. “네가 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권세를 네 의와 권세인양 사용하느냐?” 그래서 그런 것입니다. 옛날 히틀러 정권과 교회가 마찰을 빚었을 때 히틀러가 교회를 향해서 제안했습니다. “하늘의 일은 교회가 맡으라. 내가 참견하지 않겠다. 땅의 일은 내가 맡겠다. 교회가 참견하지 말라.” 

이렇게 히틀러가 제안했습니다. “절대로 분리해서 우리가 관리하자. 그런 것이 피차 좋겠다.” 이렇게 했을 때 독일 교회는 두 가지 반응이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히틀러 철학에 동조하는 교회요, 하나는 반대하는 그룹으로 갈라졌습니다. 찬송하는 교회는 “차라리 교회는 영적인 일만 생각하자. 세상은 어떻게 되든지 어차피 주님이 심판하실 때 다 불타버릴 세상이니까 그때 망하나 지금 망하나 마찬가지이다.” 안일한 신학주의 세상에 빠져버린 교회들이 히틀러에게 동조했습니다. 

다른 한 교회는 “그게 무슨 도깨비 같은 소리를 하느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게 하나님의 공의이다. 우리는 이 땅에,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사명 받은 자녀들이다.” 그래서 항거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본회퍼 목사 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히틀러 정권에 반대하다가 비밀경찰에 잡혀서 약혼녀를 남겨둔 채 30대의 젊은 나이로 사형을 당해 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만약 이 말씀이 “의는 복이 있다”든지 “의로운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면 다소 우리가 갈등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처음부터 없는 것이라고 하나님 자신이 선언하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도다.” 다만 오늘 말씀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했는데 그러면 누구냐? 죄인들을 말합니다. “죄인의 상태에 있지만 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마치 주리고 목마른 자 같이 하는 자가 복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주리고 목마른’ 의미는 우리가 생리적으로 항상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제일 급한 요청의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주리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이 “주리다”라는 말은 일시적으로 배고픈 상태를 말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내가 일이 너무나 바빠서 점심을 못 먹어서 밥 먹을 틈이 없어서 지금 배가 고프다.” 그런 사람을 놓고 “저 사람 주리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 “주리다”는 말은 적어도 계속적으로 식량 공급이 잘되지 않아서 굶주리고 있는 상태의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 사람의 소원은 한가지입니다. ‘언제 배부르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다 경험이 있기 때문에 넉넉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고픈 주림이 일시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항상 계속될 때 오는 고통이란 인간이 견딜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인 가정 중에 아버님 때문에 그 가정의 며느리나 자녀들이 아주 고난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항상 준비하신다고 하는데 그 가정에 가보면 부엌에 쌀이 많이 쌓여있습니다. 쌀이 한 20포대가 늘 있습니다. 그것을 언제 다 먹습니까? 그래도 항상 있다고 합니다. 아버님 때문에 준비해 놓는 것입니다. 쌀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을 일 년 내내 먹어도 반도 못 먹는 것을 괜히 쌓아놓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버님은 이것만 쳐다보면 그렇게 흐뭇하고 좋아하십니다.” 아버님의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없이 안 먹는 쌀이지만 항상 쌓아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님은 너무나 많은 굶주림의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쌀만 보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쌀만 집안에 쌓여있으면 괜히 좋고 행복하고 배부르기 때문에 아버님이 행복해 하시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 아버님은 너무나도 굶주렸던 그 쓰라린 경험을 지금 만족하게 누리시는 것입니다. 지금 쌀이 그렇게 비싸지 않으니까 쌓아두고 날마다 그것을 쳐다보시면 좋아하고 행복해 하시는 것입니다. 주리는 문제는 인간 경험 가운데 가장 뼈아픈 경험을 남겨줍니다. 

여러분! 동물 훈련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도 훈련이 힘든데 어떻게 말이 통하지 않는 동물을 훈련시킵니까? 사실 훈련된 동물들은 참 순종을 잘합니다. 돌고래나 물개, 호랑이, 사자 같은 동물은 사람이 하라는 대로 100퍼센트 순종합니다. 인도네시아는 호랑이가 많은 나라라서 호랑이 쇼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집채같이 엄청나게 큰 호랑이 한 20여 마리가 울안에 있는데 처녀 혼자서 수영복만 입고 채찍 하나만 가지고 그것을 마음대로 다루는 겁니다. 

저도 인도네시아에 갔다가 쇼 입장권을 내고 그 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쇼를 보면서 계속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수영복만 입고 왔다 갔다 하는 저 처녀를 호랑이가 달려들어서 한 입에 물면 어떡합니까? 저는 기도까지 했습니다. ‘어휴! 저거 큰일이다.’ 아슬아슬했는데 그 처녀가 하라는 대로 하나도 반항하지 않고 다 움직입니다.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호랑이를 교육하시나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주리게 해버리면 말을 듣는답니다. 먹이를 안주면 됩니다. 그리고 하라는 대로 했을 때 조건반사적으로 먹이를 던져주면 동물을 단순생각이니까 ‘아! 이렇게 하면 먹는구나.’ 그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같은 동작으로 계속하다 보면 똑같이 언제나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먹이를 주니까 훈련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먹이를 얻어먹는 것과 같이 의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게 의를 행하며 사는 길은 어떤 길이 있는가? 우리가 그 길을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먼저 의가 무엇인가 생각하면 됩니다. 무엇을 보고 우리가 세상에서 의를 찾을 것인가? 로마서 1장 17절에 보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성경말씀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초로 삼은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도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의로운 삶인가 하는 이 문제에 있어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복음서라고 하는 성경은 하나님의 의의 교과서라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복음서를 읽으면 되는 것이다.” 기독교 신문과 신앙 잡지에 성경에 대한 교인의 통계가 났습니다. 언론기관에서 조사한 것입니다. 50퍼센트 이상의 교인은 성경을 안 읽는다고 나타났습니다. 그러니까 교과서도 안 읽고 학교 다니는 학생들과 똑같이 교회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50퍼센트는 절대로 성경을 교회 와서도 잠깐 동안 읽는 것 외에는 집에서는 성경을 전혀 안 읽는 사람이 50퍼센트 이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사한 것이니까 틀림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의의 교과서, 기독교의 교과서는 성경인데 그 중에서도 로마서에는 복음서의 하나님의 의가 정확히 나타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고자 하면 복음서를 읽으라. 그러면 교과서적으로 나와 있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샤머니즘의 세계적 권위자인 디펙 박사라고 계신데 “아메리칸 인디언의 샤머니즘과 한국의 무당 종교의 샤머니즘은 같은 맥락이다.” 그렇게 연구를 해서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도 무당을 연구하기 위해서 오랫동안 무당과 접촉했습니다. 이 샤머니즘 무당 종교에는 의가 없습니다. 옳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원통하게 죽은 인간의 혼을 불러서 그를 위로하는 굿을 할 뿐이지 원혼을 달래준다는 민속 종교만 있을 뿐이지 옳은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절대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무당종교 샤머니즘이 우리나라에는 역사가 5천년이나 뿌리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불교인도 기독교인도 마지막에는 샤머니즘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이 한국의 교회이다.” 상당히 훌륭한 학자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란 뭐냐? 하나님의 의의 솜씨이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을 해보면 이렇게 예화를 들 수가 있습니다. 모세는 당시 최대 강국인 애굽의 왕자로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왕이 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류 가운데 가장 즐겁게 살았던 사람들은 옛날의 왕들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은 뭐든지 다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솔로몬도 “내가 내 마음에 원하는 것을 다 해봤다.” 그렇게 성경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모세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의가 주어졌습니다. “너는 그렇게 있지 말고 내 백성을 데리고 가라” 이러한 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루고 싶어 하시는 의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이 주어졌을 때 히브리서에서는 11장에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모세는 그때에 바로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왕자의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그 쪽을 선택했다.” 바로 이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내가 이 길을 갈 수도 있고 저 길을 갈 수도 있는 그 중앙 입장에 내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이것이라고 했는데 그 길은 모세에게 매우 험하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얼마나 고난스러웠습니까? 너무나 고난스러워서 모세는 하나님께 엎드려서 지금 당장 나를 죽여 달라고 기도할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했는가?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바로가 가지고 있는 자기 것인 줄 알고 가지고 있는 그 권세를 빼앗아서 하나님께로 의를 되돌리는 작업의 중심에 자기가 서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내가 이 십자가를 질 것인가, 말 것인가?’ 겟세마네동산에서 밤새도록 고민했을 때 마지막에 하나님의 의를 선택함으로 인류 구원의 완성이 거기에서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바로 너는 그러한 의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실현시키고 싶어 하시는 그 일을 주리고 목마른 자와 같이 사모하고 실천하라. 그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한번 나 자신을 이렇게 객관성 있게 살펴봅시다. 내가 이렇게 섰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옆에 서 계십니다. 내가 누구인가? 죄인입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예수님이 나의 죄는 다 뽑아서 예수님이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의는 나한테 주셨습니다. 그러면 나는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이 되었고 예수님은 의인의 자리에서 죄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나뿐만 아니고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예수님이 가져가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다 의를 주시고 자신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옛날 구약 시대에 인간의 죄를 끄집어내서 양에게 덮어씌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습니까? 양을 죽여야 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는데 예수님의 의가 우리에게 주어져서 구원받은 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게 기독교의 아주 기본적인 교리 진리입니다. 어느 교회나 해당되며, 어느 교회나 이런 사람이 있어온 예화가 한편 있습니다. 옛날부터 딸이 먼저 예수를 믿었는데 연세 많으신 어머니에게 “엄마 교회가자.” 전도했습니다. 어머니는 “그러자.”하고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려면 세례공부하고 세례 문답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딸이 조바심이 나는 겁니다. ‘목사님이 질문을 하실 텐데 엄마가 대답을 잘해야 세례를 받을 텐데….’ 그래서 딸이 엄마에게 세례 공부를 시키는 겁니다. “엄마! 제일 중요한 질문이 있는데 예수님이 누구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느냐고 목사님이 틀림없이 물으실 거야! 그러면 나 때문에 죽었다고 말해야 돼.”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목사님이 그 질문을 꼭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나요? 누구 때문에 그렇게 되셨습니까?” 

그러니까 옆에 있는 딸을 보고 “얘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데요?” 인간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죄인된 우리는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살아난 진리,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시킨 그 의를 의인된 우리들이 마치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을 때 식량을 갈급함 같이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해서 갈급한 사람이 되어라.” 이게 하나의 책임으로 주어지는 산상보훈이란 말입니다. 

이렇게도 우리가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이 의를 잘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에 대해서 성경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탕자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실 아버지는 그 아들 때문에 얼마나 심적으로 고통을 많이 당했습니까? 날마다 불면증에 걸리고 온갖 나쁜 소리를 전해줄 때마다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죄인의 모습을 가지고 거지꼴이 되어서 돌아왔을 때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가 얼마나 반가워하셨습니까? 사실 그 아들은 최소한의 양심은 살아있어서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나를 이제부터 품꾼의 하나로 써주옵소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의 요청을 무시해버리고 옛날 아들의 모습으로 바꾸어주었습니다. 거지라고 하는, 죄인이라고 하는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금방 목욕을 시켜버리고 비단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이는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은 내 아들이다.” 선언해버리고 경비를 들여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아들이 아주 겸손한 것과 같이 아버지께 끝까지 고집을 합니다. “아버지! 아닙니다. 저는 이미 이 집의 아들의 자격은 잃었습니다. 나는 품꾼의 하나로 이 집에서 살겠습니다.”라고 고집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의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시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의인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약 이 아들이 끝까지 자기는 아들의 자리를 포기했다면 또 한 번 아버지의 탕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가! 나는 너 같은 품꾼이 필요 없어. 나는 아들이 필요한 것이지 품꾼 하나 쓰는 것이 나한테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 그렇다면 너는 내 집에서 필요 없다.” 이렇게 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염치, 겸손 이런 거보다도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대로 따르면 그게 의가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강도를 보십시오. “내가 여태까지 나쁜 일만 하다가 어찌 하늘나라를 가겠습니까? 나는 지옥 가야 마땅합니다.” 그러지 않았습니다.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할 때 예수님은 그 즉시 그에게 의를 베풀어 주셨지 않습니까? 주님이 시켜주는 대로 따르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분명히 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판사가 “당신의 죄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모든 주변 상황을 참작해서 사면하겠습니다. 석방!”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그래도 내가 죄가 있는데 양심이 있지 어떻게 석방을….” 이러는 사람이 있습니까? 판사의 명령을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미국에도 보니까 집결심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사람이 저를 찾아와서 “목사님! 나를 좀 도와주십시오.” “뭘 도와드릴까요?” “이걸 보십시오.” 내어놓는 것을 보니까 “무단침입(Trespassing)”이라는 죄를 지었습니다. 들어말라는 집에 무단으로 남의 집을 들어갔다고 집결심판을 받으러 오라고 법정 통지문을 받고 저한테 왔습니다. 

“왜 그 집에 들어갔습니까?” “그 집에 있는 남자가 본래 제 남편이었습니다. 거기 있는 아들딸이 제 아들딸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나를 절대로 들어오지 말라고 법적으로 만들어버렸는데 내가 견딜 수 없어서 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우리 아이들 만나봤습니다. 그랬더니 고소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변호사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그래요? 그게 그렇게 큰 죄가 되나?” “그런데 그 집에서는 강력해서 감옥에 집어넣으려 합니다. 

목사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도와주어야 하는지 저는 변호사도 아닌데…. 하여튼 한번 가봅시다.” 그리고 한번 가보았습니다.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그 여자와 나, 판사 이렇게 세 사람 밖에 없는 것입니다. 판사가 나더러 “당신은 누구십니까?” 물었습니다. “목사입니다.” “왜 오셨습니까?” “도와주려고 왔습니다.” “무엇을 도와주실 겁니까?” “판사가 시키는 대로 도와주겠습니다.” “정말 도와줄 수 있습니까?” “네.” “이 여자의 죄가 뭔지 아십니까?” “네. 알고 있습니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목사가 교육시켜줄 수 있으면 석방하겠습니다.” “네.” “사인할 수 있습니까?” “네.” 사인했습니다. “됐습니다. 가십시오.” 나왔습니다. 

판사가 나가라고 했는데 “에이, 그래도 일주일은 구류로 살아야지 어떻게 그냥 나가겠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나가라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 분과 저는 나왔습니다. “나는 당신을 교육할 책임의 사인을 했습니다. 이제부터 내가 교육할 테니 들으십시오. 당신 그 집에 또 가겠습니까, 안가겠습니까? 이것을 나와 약속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나까지 나중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사인도 하고 제 전화번호도 거기 다 적었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더러 도와 달라 하셨지 않습니까?” “이제는 안가겠습니다. 목사님까지 어려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런 적이 있습니다. 판사가 그 자리에서 가라고 하면 가면 그만이고 죄 없다고 하면 죄 없는 겁니다. 

아무리 죄가 커도 하나님이 “네 죄는 다 사했다.”라고 선언해 주시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과거에 흉악한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목사된 사람도 얼마나 많습니까? 이게 기독교의 의입니다. 재판관이 무죄 석방을 선언했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뭔가? 아버지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버지가 선언해준 대로 살면 그만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노력하면서 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여호와의 것이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다 주님의 것인데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여 하나님의 의의 성취를 무시하고 제 세상을 만드는 인간의 마귀 역사를 보고 순교의 피를 흘리면서 이 모든 권리와 소유를 빼앗아서 하나님께 되돌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의에 주린 자들 때문에 이렇게 행복한 세상이 되는 거 아닙니까? “끝이 보이지 아니하는 불의의 사막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의 의의 샘터를 목마르게 타고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침내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온 세상을 향하여 의를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는 희망이고 우리의 사는 목표입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우리 갈보리 교회가 끝까지 그런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존재하는 여러분과 저와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원하시고 주님이 바라시는 바는 어떤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의의 교과서에 말씀하신대로 따를 수 있는 영적인 결단과 판단이 주어지게 해주시사 내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의가 나를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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