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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사 40:21-31, 막 :29-39, 고전 9: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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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사 40:21-31, 막 :29-39, 고전 9:16-23)

  
<인생에 속아 넘어갈 때에는>

푸시킨의 유명한 시가 있지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입니다. 어렸을 때 머리 깎으러 이발소에 가면 흔히 볼 수 있었던 시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슬픈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되리니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하거나 서러워하지 말라 
절망의 나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반드시 찾아오리라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고야 말리니

오늘 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의 구약 성서정과인 이사야 40: 21-31절 말씀은 왠지 모르게 푸시킨의 시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지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너무 고달픕니다. 지쳐버렸습니다. 그들의 삶을 속이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셨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고 했는데 지금 그 하나님은 도무지 무능한 하나님인 것처럼 보입니다. 선민(選民)이요, 성민(聖民)인 이스라엘을 영영 버리신 하나님처럼 보입니다. 나라를 잃어버렸고 예루살렘 고향은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혼이 온통 집약된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돌만 나뒹굽니다. 고향에 언제 돌아갈지 기약이 없습니다. 원수 나라에서 노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기대와 희망이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한마디로 삶에 속아버린 것이지요! 

우리도 인생을 살다보면 그럴 때가 있지요. 왜 이렇게 꼬이는 일이 많은가? 하나님이 도와주신다고 했는데 도대체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기도하면 응답해주신다고 했는데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일까? 이와 같이 삶이 우리를 속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쓰러지되>

오늘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마다 이사야서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27절을 보세요. 이 말씀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불평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불만을 토로하느냐?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나의 사정을 모르시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정당한 권리를 지켜 주시지 않는다’ 하느냐?” 

이렇게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하고 신앙생활에 지쳐버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23절에 보면 귀인들, 즉 세상의 통치자들을 폐하시고, 세상의 사사들, 즉 세상의 지배자들을 헛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유다를 멸망시키고 유다 백성들을 노예로 잡아온 바벨론 역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말씀이지요. 

특히 28-31절 말씀은 피곤에 지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영원하신 하나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하나님은 도무지 지칠 줄을 모르며 피곤을 모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기력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들 역시 맥없이 비틀거려도,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는 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31절 말씀을 보면 순서가 재미있어요. 제일 먼저 “날개 치며 솟아오른다(soaring)”고 했고, 그 다음에 “달음박질(running)”을, 그리고 맨 마지막에 “걸어가는 것(walking)”으로 되어 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날아가는 듯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요. 결혼 신청을 받았을 때, 새 아이가 태어났을 때, 새 직장을 잡았을 때, 아니면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날아가는 듯한 순간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는 것과 같이 찬란한 순간은 쉬 끝나고 쉽사리 지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뛰거나 걸을 때가 대부분인데, 뛰고 걷는 것 역시 힘이 듭니다. 쉽사리 피곤을 느껴 쓰러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날아다닐 때에나 뜀박질을 할 때에나 걸어 다닐 때에나 우리 힘으로 하면 반드시 지쳐 쓰러집니다. 펄펄 힘이 넘치는 젊은이 장정이라고 할지라도 날아다니고 뛰어다니고 걸어 다니다 보면 다 지쳐 쓰러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바라보고 소망 중에 기다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의 약함을 하나님의 강함으로 바꾸십시오! 여러분은 약하나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이마다 곤비치 않는 힘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회성의 회복으로서의 치유 이적>

이제 다시 마가 1: 29-39절을 봅시다. 29-31절을 보면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의 집에 들어가셔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신 이야기는 너무 흔한데 우리는 여기서 질병의 사회적 성격을 잠시 생각해야 합니다. 

고대 사회에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단지 신체 기능에 불편을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이 중단된다는데 더 큰 아픔이 있었습니다. 특히 인과응보 사상이 팽배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질병을 죄에 대한 징벌로 이해했습니다. 그리하여 병에 걸린 사람마다 죄로 인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해석을 했고 이웃이나 공동체로부터 소외되고 단절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나병과 같이 전염성이 강한 질병은 물론이고 귀신들린 사람의 경우에도 단지 그런 질병을 앓아서 몸이 아프고 기능을 제대로 못한다는 사실이 슬픈 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이웃, 공동체 전체로부터 격리되고 소외되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각색 병자들을 고쳐주신 치유 사역의 가장 큰 의미는 그들의 존엄성과 가치를 회복해서 사회성과 공동체성을 되찾아 준 것에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베드로의 장모가 고침받은 이야기를 잠시 살펴봅시다. 

여기 이 여성은 열병에 시달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습니다. 장모라면 이 집안의 여성들 중에 가장격입니다. 당연히 손님으로 오신 예수님 일행에게 식사 대접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병에 걸려서 그 일을 못합니다. 가정이라는 사회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지요. 예수께서 그녀의 질병을 고쳐주셨을 때 비로소 자신이 해야 할 사회적 기능을 회복하게 됩니다. 31절에 보면 베드로의 장모에게 열병이 떠나가자 즉시 예수님 일행에게 수종드는 일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 여성의 열병을 고쳐주신 것은 단지 육체의 기능이 정상으로 되돌아 온 것뿐만 아니라 그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정에서의 지위도 회복된 것을 의미합니다. 가정과 마을에서 응당 누려야 할 사회적 가치와 존엄성을 되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서 단순히 육체적 차원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까지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치유 이적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또 한 차례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수많은 불치병자들을 그토록 잘 고쳐주셨는데 왜 나는 안 고쳐주신 것일까? 의심하고 낙심될 때가 있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렇게 숱한 병자들을 고쳐주신 예수께서 정작 자신의 십자가 고난이나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만난 이들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에 압도당한 나머지 예수께서 그들의 삶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마다 가정이든 직업이든 죄든 질병이든,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삶을 다스리지 못하게 됩니다. 영어로 말하면 ‘letting go,’ 즉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육체적 질병이 금방 낫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병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예수님과 함께 그 질병까지도 더 이상 나를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자유함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므로 그 어떤 질병까지도 나를 억압할 수 없다,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황량한 마을에 사람 사는 기운이 넘치다>

1984년 LA 올림픽을 총주관한 사람은 피터 웨버로쓰(Peter Ueberroth)였습니다. 올림픽을 치르면서 가장 감명 깊었던 순간에 대해서 질문을 받자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습니다. 올림픽 성화를 미국 전역에서 연속으로 전달할 때였는데, 그 중에서도 미국 서부의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성화 봉송이 가장 잊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 농촌마을은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갔고 얼마 안 되는 농부들과 목축업자들만 남은, 유령도시처럼 썰렁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올림픽 때 밝힐 성화 봉송이 있게 된 것이지요. 당연히 마을이 생긴 이래 최대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과연 성화 봉송 주자를 누구로 정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전체 인구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 주민들의 이름을 모자 안에 집어넣은 뒤 이장님이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이장님이 고른 사람은 장애를 가진 어린 소녀 에이미(Amy)였습니다. 에이미는 겨우 한 두 발자국을 걸은 뒤 주저앉는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있는 동안 모든 일에 가족들이 수발을 들어주어야만 했습니다. 

이런 에이미가 이 마을을 거치게 될 성화 봉송의 주자가 되나니,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성화 봉송을 취소하는 편이 낫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겨우 한 두 발자국을 걸을 수 있는 에이미가 무슨 일을 하겠느냐는 의심과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성화 봉송이 있던 날도 대부분의 주민들은 불참했고 이장님과 몇 사람만 참석했습니다. 

그 날 에이미는 반바지에다가 티셔츠 차림으로 가족들과 함께 나왔습니다. 이 작은 마을에 전 세계에서 몰려온 방송 기자들로 북적거렸지만 주민들은 몇 명 되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다른 마을 주자가 전해준 성화를 에이미가 받아들었습니다. 휠체어에서 일어난 에이미는 간신히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던 방송기자들과 카메라맨들, 그리고 몇 안 되는 마을 주민들 모두가 일제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에이미가 힘겹게 또 한 발자국을 내딛자 또 한 차례 사람들이 헉 하고 가쁜 숨을 내쉬었습니다. 

이렇게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사력을 당하여 한 발 두 발 내딛는 에이미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내 감동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에이미가 약 30초 동안 걷는 동안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시청자들이 숨을 죽이고 이 광경을 지켜봤습니다. 

문제는 집안에서 TV 중계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주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집을 뛰쳐나와 거리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에이미가 성화를 손에 들고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힘겹게 걷는 모습을 보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에이미!”, “에이미!” 환호성을 지르면서 에이미를 응원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을 비롯한 전 세계인들의 응원을 받은 에이미는 기적적으로 약속된 곳까지 걸어가 다음 마을 주자에게 성화를 넘겨주었습니다. 황량하고 침체된 마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순간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성화 봉송 이야기가 바로 이사야 선지자가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미는 장애인입니다. 그것도 휠체어에서 겨우 몇 발자국만 걸을 수 있는 중증 장애인입니다. 하지만 기어코 해냈습니다.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날아다니고 뛰어다니고 걸어 다녀도 도무지 피곤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내 날개와 내 다리를 의지하는 자마다 다 피곤하여 쓰러지겠지만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자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삶에 속아 피곤합니까? 지쳐 쓰러졌습니까?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진 주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 어떤 것도 여러분을 얽어매지 못하도록 참 자유와 해방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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