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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을 내밀라 (막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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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내밀라 (막 3:1-6)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4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5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세상에서 손처럼 정교한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의 손은 위대합니다. 이 손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정교하게 조각을 새깁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도 그렇고 타이핑을 하고 있는 손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동시에 그리고 정교하게 다섯 손가락을 움직여내는지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여러분 쌀 한 톨에 글자를 얼마나 새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무려 283자까지 가능합니다. 새서미각이라고 하여 작은 글씨를 새겨 넣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의 이름은 김대환씨입니다. 이 분이 45배율의 공업용 현미경과 0.2㎜짜리 텅스텐핀으로 1-2mm의 쌀 한 톨에 반야심경 278자와 연도와 이름 석자까지 총 283자를 새겨넣었습니다.

손은 그래서 ‘제2의 뇌’ ‘눈에 보이는 뇌’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지능 발달은 손의 사용과 함께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손에는 도합 54개의 뼈가 있는데 이는 인간의 몸에 있는 뼈 종류의 4분의 1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뇌의 운동신경의 30%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손동작이라고 합니다. 손을 많이 사용하면 머리가 좋아집니다. 특히 아이들은 손을 사용하여 물건을 잡고 만지고 던지고 하면서 사물에 대한 감각을 넓혀갑니다. 다른 사람과 접촉할 때 우리는 가장 먼저 손을 통해서 합니다. 악수하거나 만지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정서적 교감을 이룹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손 마른 사람이 등장합니다. 손이 마른 병이 정확히 어떤 병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손을 못쓰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은 무능력함을 보여주고, 무능력하다는 것은 수치스럽습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한쪽 손이 말랐다고 보도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 손이 오른손이었다고 전합니다. 

오른손은 능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할 때도 오른손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합니다.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히브리복음서라는 위경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 손 마른 사람이 미장이였다는 그럴듯한 해석을 내어놓고 있습니다. “저는 미장이였습니다. 내 손으로 생계를 마련했지요. 예수님, 부디 수치스럽게 먹을 것을 구걸하지 않도록 제 건강을 회복시켜주십시오.” 이 손 마른 사람이 회당에 있었던 이유는 아마도 구걸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손이 말라 스스로 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이 불쌍한 손 마른 사람을 중심으로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첨예한 갈등이 일어납니다. 각 인물들을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마음의 완악함

바리새인들은 매우 완악한 모습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손 마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사람을 도구로 예수님을 시험하려 합니다. 2절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님은 이미 많은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안식일과 관련해서는 이미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일 때문에 한번 부딪친 적이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안식일이 본래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씀으로 시장하여 제자들이 취했던 행동에 대해서 옹호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회당의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번에도 안식일을 범하는가를 시험해 보려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은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도구로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인간을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나누고 죄인이나 병자와 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뜻을 위해 이용할 수 있다는 반 인격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더 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몰리다보니 인간이 마치 물건처럼 취급을 당합니다. 병원에서는 몇 번 차트나 몇 번 케이스로 불립니다. 회사에서는 유능한 사람, 무능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심지어 아빠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도 불립니다. 몇 년 전 유행했던 책이지만 아빠를 어떻게 가난한 아빠 부자 아빠로 분류할 수 있습니까? 아빠라는 것 자체로 소중하지!

헨리 나우웬은 현대의 영성가입니다. 그는 신부이면서 하버드 대학 교수를 했습니다. 이런 그가 하버드 대학 교수직을 접고 캐나다 토론토의 라르쉬 데이브레이크라는 공동체에 들어가 장애아들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이 곳은 중증 장애아 6명과 봉사자 4명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입니다. 나우웬은 이곳에서 아담이라는 지체장애와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청년을 도왔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매일 아침 아담을 깨워 목욕을 씻기고 옷을 입히고 밥 먹는 것을 도와주고 학교에 데려다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나우웬의 친구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나우웬을 보며 공통적으로 하는 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곳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신은 다른 데 쓸모가 있는 유능한 사람이고, 이곳은 장애아를 잘 다루는 다른 유능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나우웬은 그들의 태도에 대해서 확고하게 거부를 하였습니다. 나우웬은 아담이라는 장애아 청년에 대해서 “그는 내 친구요, 선생이요, 영적 지도자이며 나의 목사이다 ... 매일 아담과 보내는 두 시간이 나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보는 모든 활동을 넘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소리를 듣는다. 그 시간은 순수한 선물이요 묵상의 시간이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어떤 부분과 만나고 있었다. 

아담과 함께 나는 거룩한 존재의 현존을 알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우웬이 이렇게까지 고백하고 있는 이유는 아담이라는 무기력한 존재를 통해서 진정으로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게 한 인간을 사랑하고 그러할 때 느껴지는 평화와 사랑의 감정을 비로소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혀 반응이 없는 아담 앞에 자신의 교수직이나 저술가로서의 활동은 전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부지런히 현대사회의 비인간화와 싸워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과거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의 완악함은 손 마른 자를 도구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보인 그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으로 손 마른 사람이 고침을 받아도 전혀 반응이 없습니다. 손 마른 사람의 부모나 그 아내가 그 장면을 보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기뻐서 날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무덤덤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을 범한 것 때문에 분개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그들의 비인간성 때문에 오히려 더 분노하십니다. 5절입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라 전합니다. 완악하다는 것은 마음이 돌처럼 굳어 무감각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근심하셨다. 더 나아가 분노하셨다는 매우 강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한 사람이 고침을 받는 것보다 그들의 교리가 침해 받는 것에 그들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철저합니다. 4절에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셨습니다. 사실 그들도 나름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 위에 집이 무너지려 할 경우에는 생명이 위험함으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구조하는 일이 허락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은 것으로 판명되면 그 시체를 치울 수 없고 안식일이 끝날 때까지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태도가 이율배반적인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그들의 행동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이 날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에 여러 사소한 조항으로 사람들을 얽어매던 그들은 급기야 한 사람을 해하려는 모의를 꾸밉니다. 안식일에 배고파서 밀을 먹는 행동이나 병자를 고친 것과 사람을 죽이기 위해 계획을 꾸미는 것 중 도대체 어떤 행동이 더 안식일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까? 더군다나 바리새인과 헤롯 당파는 서로가 앙숙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칭 의인이요 민족주의자들입니다. 반면에 헤롯 당파는 로마에 앞잡이들이고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이념이나 교리를 보호하기 위해 평소 반대하던 세력들이 서로 손을 잡습니다.

신앙인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완악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나친 열심이 우리를 교조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탈레반이라는 폭력적인 집단이 이슬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위해서 사람들을 도구화하고 그 인격을 말살하는 사람들입니다. 종교는 기본적으로 평화를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힌두교나 종교간, 종파 간 전쟁이 극심한 이유는 그들이 사람보다는 교리를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도 외부의 핍박으로 죽은 순교자들보다 아마 이단과 싸움을 벌이고 마녀 사냥을 하면서 기독교인들이 죽인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종교개혁자 칼빈도 제네바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당시 제네바 시 인구는 1만 3천 명에 불과했는데 4년을 다스리면서 참형만 58명을 시키는 공포정치를 행했습니다. 그 중 35명은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 죄목들도 큰 잘못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정론을 부인했다고 해서, 목회자를 모독했다고 해서, 유아세례를 받지 못하게 했다고 해서, 또 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해서 화형을 시켰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순하고 착한 사람인데 교리나 이념 면에서는 매우 편협되고 강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발생을 하는 것일까요?

기독교가 폭력적이 되고 교리적이 되는 이유는 여전히 구약시대의 성전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비느하스가 우상을 섬기며 우상의 제의를 좇아 섹스를 행하던 두 남녀를 칼로 찔러 한꺼번에 죽였던 그 하나님을 향한 열심(민25:7-8)을 좇아서 여전히 행하고 있기에 십자군 전쟁과 같은 폭력을 서슴지 않고 행합니다. 지금은 신약시대입니다. 우리는 유대교나 열심당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핵심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낮아짐이요, 자기희생이요, 사랑이요 이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는 사람들은 결코 폭력적인 탈레반이나, 교조적인 바리새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서의 모든 윤리는 십자가 아래서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손 마른 사람은 다른 이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요 그들을 따르고 있는 현대의 완악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말라버린 사람이고 사랑의 무능력자들입니다. 실상 그들이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한 가운데 일어서라

주님은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한가운데 일어서라”(3) 말씀합니다. 사람들 한가운데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들 보라고 취하신 행동만은 아닙니다. 그동안 무능력하게 살아 왔던 손 마른 자를 당당히 그 인생의 주인공으로 세우시는 행동입니다. 그동안은 무능력하게 살아왔지만 이제는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주님의 초청입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인생의 주인공들이며 역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가 존경하는 역사학자 이만열 교수님이 몇 년 전에 쓴 책이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역사의 중심은 나다』라는 책입니다. 그 책의 표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특별한 영웅이 아니며 오늘을 사는 바로 나이다. 단순한 영리만 보고 사는 내가 아니라 좀 더 주체적으로 사회를 이해하고 삶을 이끌어 간다면 아무나 역사의 주인공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역사의 주인공으로, 우리 인생의 주인공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썼던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내면에서 성취하는 것이 우리 외면의 현실을 바꾸어놓을 것이다.” 내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곧 세계 진보와 변화의 시작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을 인생의 주체로 세우시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예수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장면은 마치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역사 한 중심으로 부르던 말씀과 같습니다. 이사야 40장에서부터 55장의 말씀의 예언의 무대는 바벨론 포로기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 마치 손 마른 사람처럼 위축되고 무능력해졌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그들을 불러 세웠습니다. 이사야 43장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4)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7) 포로된 이스라엘, 제3세계 변방 민족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만군의 하나님이 내가 너를 선택하였고 너를 가장 존귀히 여긴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ㄹ입니다. 우리 예수님 또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주체로 당당히 서실 것을 요청하시고, 또 그렇게 만드실 것입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한 가운데 선 손 마른 사람을 향하여 예수님이 “네 손을 내밀라(Stretch out your hand)”고 명령하십니다. 손 마른 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손을 내미는 순간 그 손이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 한 가운데 설 때나, 그동안 사람들에게 감추어왔던 손을 내어놓을 때나 이 사람은 매우 부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랐던 손에 피가 돌고 그 능력을 회복한 것입니다.

여기 손 마른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들이 아닙니까? 인생에서 활기차게 손 한 번 내 뻗어 보지도 못하고, 그 손으로 무언가를 쥐어 보지도 못하고,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도와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못했던 인색했던 손이나 무능력한 손이 아니었습니까? 자꾸 손을 사용하지 않다보니 어느 순간에 완전히 굳어버린 손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그 손을 펴기를 원하십니다. 그 손으로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마을에 대리석으로 만든 예수님상이 있었습니다.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폭탄이 떨어져 그 예수님상이 그만 조각나 버렸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아끼던 예수님 상을 다시 세우기로 했습니다. 흩어진 부분들을 모아서 만들었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없었던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 하며 내뻗은 예수님의 손이 없기에 조각상이 우습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의논을 하다가 손을 만들어 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그 밑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써 붙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나에게는 손이 없지만 그대들에게는 손이 있다” 이 글귀는 아빌라의 성인 테레사의 기도문 중 일부였습니다. “주님, 당신은 이 땅에 몸이 없지만 우리는 있습니다. 당신은 손이 없지만 우리는 있습니다. 당신은 발이 없지만 우리는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어 대신 일을 하시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세상은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의 손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손을 내밀기를 원하십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옷을 붙잡았습니다.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막5:27-28) 예수님의 옷을 붙잡자 그의 혈루증이 마르고 온전하여 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손을 뻗으십시오.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며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할 때 그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에 힘이 생겨 일어나 걷기도 하며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은 손을 내밀어 기도할 때 병이 낫고 기적이 일어나는 능력의 손이 되었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4:30) 그 손은 높이 들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손이 되었고, 간절히 두 손 모아 기도하는 기도의 손이 되었습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 모세가 손을 높이 들어 기도하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군대가 아말렉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피곤하여 그 손을 내려놓을 때는 이스라엘이 물러나고는 하였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손을 내려놓지 마십시오. 그 기도로 자녀들이 살고, 가정이 살고, 민족이 삽니다.

이 손은 또한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는 충성과 헌신의 손이 되었습니다. 이웃을 향하여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돕고 위로하는 사랑의 손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손은 어떻습니까? 손이 문제입니까 메마른 마음이 문제입니까? 우리 교회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손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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