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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고기 뱃속 (욘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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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 뱃속 (욘 2:1-10)
  

내가 거하는 곳이 어디인가? 고요한 숲인가? 아니면 시끄러운 시장 한복판인가? 사업장에서 격렬한 경쟁을 하며 뛰고 있는 곳인가? 아니면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는 정상에 오른 곳인가? 그곳이 어디든지 하나님께로 향하고 하나님을 체험해야 한다. 로랜스 형제는 주방장이었다. 후라이팬을 들고 다니며 요리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고 하나님의 임재 연습이란 책도 썼다.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것에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 나 때문이 아니고 외부적 다른 요인이라고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 

요나를 보라.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키며 요나가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응답을 받았다. 요나의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장차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실 때 보여주실 표적이 있다. 마12:40에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인용하셨다. 무덤을 열고 삼일 만에 나오신 주님을 믿는다면 요나의 이야기는 역사적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 물고기 뱃속에서의 요나란 무엇을 말해주는가?

1.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다.

물고기 뱃속을 가리켜 요나는 이렇게 말했다. 욘2:2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그렇다. 물고기 뱃속은 스올이다. 즉 ‘음부’라는 말이다. 음부는 지옥의 대합실이다. 마치 낙원이 천국의 대합실과 같은 것처럼 음부는 지옥의 사랑방이다. 왜 그런가? 

① 물고기 뱃속은 더러움의 자리다.

뱃속으로 들어온 먹잇감을 삭히려는 위액과 모든 것들이 분비되는 뱃속은 더럽다 못해 똥구덩이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자기의 신념만이 옳은 줄 알고 도망하던 요나는 더러운 똥구덩이에 빠진 것이다. 그의 입은 옷, 그의 단정한 용모는 똥통에 빠진 이상 다 쓸데 없다. 깨끗한 신사가 가장 더러운 자리에 떨어졌다.

② 물고기 뱃속은 길이 없는 자리다.

들어가는 입구만 있을 뿐 요나를 둘러싸고 있는 물고기 뱃속은 길이 없다. 동서남북, 위아래 어디를 보아도 가로막힌 것 뿐이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물고기 뱃속은 캄캄한 암흑의 자리다. 그곳에 들어가 갇힌 요나는 누워있는지, 앉아있는지 위에도 없고 아래에도 없는 공간에서 죽어갈 뿐이다. 거기에 무슨 내일이 있고 모레가 있는가?

③ 물고기 뱃속은 절망의 자리다.

욘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죽음의 문턱에 놓여진 요나의 영혼은 바닷물에 둘러싸이고 바닷물이 머리를 감싸는 절대 정명의 순간을 맛보고 있었다. 절망이란 환경의 어려움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물고기 뱃속이 가져다 주는 사망의 두려움에서 오는 절망, 요나는 바로 그런 장소에 갇힌 것이다. 

욘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그렇다. 더 이상 어디로 더 내려갈 수 있는가? 산뿌리까지이니 최저의 밑바닥이다. 그래서 물고기 뱃속은 스올이다. 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밑바닥의 자리, 스올의 자리에서 요나가 기도한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리에서 기도한다. 이는 사람이 어디에 있든지 기도하지 못할 장소가 없다는 말이다. 시끄러운 시장이 아니라 물고기 뱃속에서라도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분주하다, 시간이 없다, 더럽다, 냄새나고 어두워서 기도할 장소가 없다고 한다. 너무도 환경이 받혀주지 않는다고 한다. 기도하는 것 대신 이런 핑계를 대서는 안된다. 기도는 어디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2. 어디서든지 고난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

욘2:2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므로 깨달았다. 주님이 대답해주셨기 때문이다.

① 요나가 고난을 이해하게 된 것은 자신이 도망자였기 때문이다.

욘1:3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말씀 앞에 도망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있다는 착각이 만들어 낸 도망자의 삶, 그것을 멈추게 하는 것이 물고기 뱃속의 고난이었다. 고난을 통해 요나는 자기의 현실을 알았다.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는 도망자의 결국을 알았다.

② 요나는 욘2:3에서 내던져진 이유를 깨달았다.

주님이 요나를 바다 가운데 내던진 이유는 자신이 잠자는 자였기 때문이다. 욘1:5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사명을 주었는데 그 사명을 외면하고 잠이 들어버린 요나, 사명자가 관광객이 되어 잠에 빠진 사람, 그것이 내던져진 이유다. 사명이 잠이 되면 안된다. 사명이란 드림과 희생, 열정이 되어야지 달콤함을 즐기는 잠이 되면 안된다. 그것이 요나의 깨달음이다.

③ 요나는 욘2:4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를 깨달았다.

왜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는가? 자신이 많은 무리들 가운데 풍랑의 원인자로 제비뽑혔기 때문이다. 욘1:7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아 보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뽑힌지라.” 제비는 사람이 뽑는다. 그러나 제비가 결정되는 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여기 요나가 무리들 중에서 제비뽑힘, 그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도망자가 될 수 없고 더 이상 잠자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풍랑의 원인자가 배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 것이다. 잠16:33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물고기 뱃속의 의미는 자신이 쫓겨난 자임을 알게 한다. 내가 풍랑과 파도를 초래한 자임을 알게 했다. 

물고기 뱃속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어떤 순간에 있든지 고난의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이다. 물고기 뱃속은 하나님이 나를 다듬는 자리다. 나의 잘못된 신념이나 철학 때문에 순종하지 못하는 삶을 순종하도록 다듬는 시간이다. 그래서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외친 것이다.

3.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녹초가 되고 의식을 잃어가는 것이 당연한 것 같지만 요나는 그 반대다. 오히려 육으로는 죽어가고 영으로는 살아나고 있다. 영혼이 일어나고 있다. 욘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하고 하였다. 피곤함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를 묵상하는 사람, 부르짖는 기도가 응답이 되는 사람, 참으로 놀라운 믿음의 여유다. 

어떤 형편 가운데서든 여호와를 생각하는 사람은 예배할 수 있다. 욘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예배하는 것도 감사로 한다. 말로 내뱉은 약속인 서원을 주께 갚는다고 다짐하며 예배를 한다. 

물고기 뱃속은 바로 내가 처한 환경이다. 그러나 요나는 그 속에서 기도할 수 있고 그 속에서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고난은 우리를 주저앉게 하고 무기력하게 하며 여호와를 잊어버리게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난은 감사를 빼앗아가고 고난은 예배마저 실종하게 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면 아니다. 고난은 오히려 어디서든지 기도하게 하고 예배하게 한다. 사실 정신을 차려야 할 것은 잘 될 때이다. 신앙의 반대말은 불신앙이 아니다. 

신앙의 반대말은 잘 되는 때에서 오는 안일이다. 내 생각대로 되는 성공이다. 잘되면 사실 기도하지 않는다. 여호와를 잊는다. 잘되면 감사를 빼앗기고 성공하면 예배드리는 일에서 멀어진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물고기 뱃속 때문이 아니다. 물고기 뱃속은 우리를 새롭게 다듬어 주시는 하나님의 시간이고 하나님의 장소다. 

물고기 뱃속, 어떤 사람은 그것을 가리켜 목사들이 반드시 수료해야 할 신학대학이라 한다. 목사만이 아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여지는 훈련소다. 연수원이다. 물고기 뱃속 같은 환경에 들어왔다고 체념하지 말자. 이제 너무 슬퍼하지 말자. 물고기 뱃속을 통과하면서 영적으로 다듬어짐을 알고 구원을 기다리자.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기에 기도의 사람이 되자. 어디서든지 깨달을 수 있기에 고난의 덫에 넘어지지 말자. 어디서든지 예배할 수 있기에 에배의 프로가 되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삶, 그것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가능하다. 요나를 보면 분명 그렇다. 잘 되는 때, 성공의 자리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물고기 뱃속이라도 일어설 수 있다.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

물고기 뱃속, 거기서 기도하고 깨닫고 예배하는 한 그 물고기 뱃속, 스올의 자리는 나의 훈련소다. 스올! 글자 그대로 지옥의 훈련소, 지옥의 뱃속이지만 신앙의 사람, 사명의 사람, 순종의 사람으로 살아나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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