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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페이스메이커(Pacemaker) (느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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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메이커(Pacemaker) (느 4:1-6)


설 명절 잘 지냈습니까? 고향도 잘 다녀오고, 그립던 부모, 형제들과도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까? 모두들 교통사고 없이 안전하게 잘 다녀와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런데 교통사고 소식을 은근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커차(견인차) 기사입니다. 그러고 보니 장례식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무기를 만들어 파는 무기상들은 이 땅에서 평화를 원할까요, 전쟁을 원할까요? 

교회라는 공동체에도 문제가 불거져서 깨지고, 상처를 입고, 주저앉아 버리며, 고통을 호소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길 은근히 바라며 이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성 수축이 진행되자 산발랏은 이를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느 4:1-2). 도비야란 자가 장단을 맞춥니다(느 4:3). 왜 산발랏이 이처럼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고 있었을까요? 

유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산발랏은 혼혈 사마리아인이었는데 페르시아 황제로부터 그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된 자였노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하면 황제의 마음에 들어 그 총독자리를 오래토록 보존할까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결론은 황폐해진 성을 황폐화시켜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재건하지 못하도록, 독립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이 예루살렘 성 건축을 시작하자 ‘너희들이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고 비아냥거린 것입니다(느 2:19). 

그런데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 터졌습니다. 페르시아로부터 새 총독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왕의 최측근, 술 맡은 관원으로 있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당도한 것입니다. 자신이 총독인데, 총독이란 자가 나타나서는 자리를 빼앗아버렸습니다. 그는 산발랏과는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심복들을 데리고 황폐한 현장을 샅샅이 살폈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무너진 성을 새롭게 수축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산발랏은 이 모습을 심히 못 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발언권, 영향력은 점점 감소해져갔습니다. 불쾌한 나머지 그는 먼저 몇몇 사람들과 내통하며 세를 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개의치 않자 더 분노하면서 이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개시합니다(느 4:7-8). 여기에 산발랏과 가까이 살던 일부 유대인들도 합세합니다(느 4:10-12).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라는 공동체에 산발랏과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들을 허용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산발랏은 저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였습니다(느 4:4). 저들로 하여금 긴장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였습니다(느 4:16-18). 저들로 하여금 최선을 다하도록 하였습니다(느 4:21-23). 그러므로 산발랏은 어떤 면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산발랏에게 멋진 별명을 하나 붙여 주고 싶습니다. 생각해 낸 별명이 페이스메이커(pacemaker)입니다. ‘페이스메이커’란 중거리 이상의 달리기, 수영, 자전거, 스케이팅 등의 스포츠에서 전략적으로 투입되는 선수를 가리킵니다. 이 페이스메이커는 다른 선수를 자극하고, 도전을 주어 그 사람의 기록갱신, 우승, 영광을 위해 달리는 사명을 받아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입니다. 

최근 극장가에는 설날개봉영화로 ‘페이스메이커’란 영화가 내걸렸습니다. 이 영화를 소개하는 짧은 글귀는 이렇습니다. “마라톤은 42.195km, 하지만 나의 결승점은 언제나 30km까지다. 메달도, 영광도 바랄 수 없는 국가대표… 오직 누군가의 승리를 위해 30km까지만 선두로 달려주는 것! 그것이 내 목표이자 임무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은… 오로지 나를 위해 달리고 싶다!” 

느헤미야에게 있어서 산발랏은 분명 페이스메이커였습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애굽 왕 바로가,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 왕이, 예수님에게 있어서 가룟유다는 페이스메이커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예외 없이 페이스메이커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키고, 소란스럽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합니다. 긴장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매사에 최선을 다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런 페이스메이커들의 종국(終局)은 어떠했습니까? 42.195km 중 30km 거기까지입니다. 한 때 선두주자가 되기도 하고,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결승점에 이르지 못하고, 면류관도 쓰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잊혀버리는 사람이 바로 ‘페이스메이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저들에게 ‘페이스메이커’란 고상한 별명보다는 ‘방망이’, ‘막대기’ 란 별명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잠깐 허용하신 후에는 꺾어버리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바벨론을 방망이로 사용하셨지만 잠시 후에 그 방망이를 꺾어버리셨습니다(렘 50:23). 바로 왕과 사울 왕, 가룟 유다를 꺾어버리셨습니다. 사탄은 무저갱에 던져집니다. 중간에서 꺾어버리십니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될까요? 먼저 느헤이먀의 입에서 축복의 기도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느 4:4-5).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위해 기도하셨습니까?(마 26:24) 또 하나는 하나님이 느헤미야와 그 공동체를 위하여 싸우시기 때문입니다(느 4:20).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라는 공동체에는 ‘페이스메이커’, 아니 ‘방망이’, ‘막대기’가 꼭 필요합니다. 그러한 자가 있어야 더 기도하게 되고, 긴장하게 되고,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 방망이를 허용하십니다. 하지만 정작 그 방망이 자체의 최후, 결과는 예외 없이 좋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애써 방망이를 자처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페이스메이커는 중간에 꺾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자입니까? 중간에서 경주를 멈추어야 하는 ‘페이스메이커’와 같은 그런 자가 아닙니다. 최후의 승리, 면류관을 얻도록 달려야 하는 자들입니다(고전 9:24).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를 향해 다짐했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방망이, 막대기가 되지 말고, 함께 뜻을 모읍시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교회를 바라봅시다. 세례요한처럼 교회 내에서 내 영향력이 사라져가는 것, 잊혀가는 것을 오히려 보람으로 여기며 기뻐하는 자가 됩시다(요 3:26,29,30).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됩시다. 격려하는 자가 됩시다.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세워나가는 복된 한해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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