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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 (미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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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 (미 6:6-8)

미가 4, 5장은 신약시대가 되면 시온산이 모든 산 위에 제일 높은 산이 될 것이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즉, 기독교가 가장 최고의 종교가 될 것이고, 이방인들도 전부 시온산에 올라 여호와를 경배하는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메시야를 통해 유대인 중에 남은 자들과 이방인 중의 택한 자들을 구원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 역사 운행의 모략이고 계획입니다. 

미가 6장은 메시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여호와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오늘 본문은 참으로 위대한 질문과 위대한 답변이 나와 있습니다. 

Ⅰ. 이 질문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이 질문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첫째, 부정적인 면에서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고,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러한 질문도 있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7).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지에 대해 질문 했을 때 베드로는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침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0). 빌립보 감옥의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가뒀던 옥문이 열리고 그들이 나와 있었을 때 깜짝 놀라면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 했습니다. 그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에 성경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으라고 답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미가 6장 8절의 질문은 구원론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하면 천국 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위 구원설에 빠지게 되는 것이고, 기독교를 단순한 도덕 종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가 6장 8절의 질문을 구원론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면 사회구원설과 같은 현대신학의 덫에 걸릴 수 있게 됩니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분명한 요구가 묵살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전도와 선교보다는 해방신학, 민중신학과 같이 사회 문제 해결을 기독교의 제일 과제로 삼을 우려가 있다는 것입니다. 
 
해방신학 이론가인 남미의 구스타프 구티에레즈라는 사람이 ‘해방신학’(The Liberation Theology)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사람이 기독교는 바른 진리보다도 바른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바른 실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앞서 중요한 것은 바른 진리입니다. 바른 진리가 바로 서고 나서 바른 실천이 나와야지, 진리를 뭉개버리고 실천만 하라는 것은 안 됩니다. 바르게 구원받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은 후 바른 실천을 해야 합니다. 구스타프 구티에레즈는 미가 6장 8절의 질문을 구원론적으로 이해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둘째, 긍정적인 면에서 이 질문은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입니다. 미가 6장 8절의 질문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미가 4, 5장의 텍스트와 6장 전반의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4장과 5장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메시야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야곱의 남은 자와 택함 받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남은 자는 많은 백성 중에 있으리니 그들은 여호와에게로서 내리는 이슬 같고 풀 위에 내리는 단비 같아서 사람을 기다리지 아니하며 인생을 기다리지 아니할 것이며” (미 5:7). 이들이 바로 야곱의 남은 자이고, 메시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사람들입니다. 많은 백성 중에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가 4장과 5장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로 말미암아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미가 6장 8절의 질문이 나오게 된 앞 문맥도 이미 애굽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거하라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의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추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추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의 의롭게 행한 것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미 6:3~5).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미 6:8). 여기서 사람은 애굽에서 속량하여 건짐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애굽에서 종노릇할 때에 내가 건져 내었고, 발람이 저주를 할 때에도 도리어 축복으로 바꿔주었는데, 내가 뭘 잘못했기에 너희는 나를 미워하고 배척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가 6장 8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불신자들이 구원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Ⅱ. 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은 무엇인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받은 선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었을 때에 그들이 무엇을 잘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이 능력이 있어서 애굽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구원은 사람의 행위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8).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시내 산에서 거룩한 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 법은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들의 삶의 원리가 되고 지표가 됩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복을 주시지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징벌하시고 열방의 포로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사관입니다. 신명기를 읽어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백성들이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징벌이 오고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애굽에서 나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율법주의’(Legalism)는 이단 사상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어떤 법도 없다는 ‘율법폐기론’(Antinomianism) 또한 이단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성도들의 삶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주일 예배도 드리지 않고 놀러 가고, 한 달에 한 번씩 예배 나오고, 우상숭배하고, 부모를 학대하고, 바람피우고, 음란하고, 도적질하고, 거짓말하면서 살면 복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다고는 하지만 인생을 망가뜨리며 사는 것입니다. 

옛날 독일에서 전쟁이 있었을 때 히틀러가 지배했었습니다. 그때 독일에 있는 교회 성도들도 나치스에 굴복하였습니다. 그런데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목사가 있었는데, 그는 굴복하지 않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치스에 굴복하여 나치스에게 놀아나는 것을 보고 헌신 없는 구원, 정의가 없는 믿음, 제자도가 없는 기독교, 하나님의 법이 없는 은혜는 ‘값싼 은혜’(Cheap Grace)이고, 참된 기독교의 도가 아니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구원받은 일에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아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백성이 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았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외형적이고, 형식적인 의식’(Formal Ceremony)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 6:6~7). 

미가 선지자가 예언할 당시 아하스 왕은 힌놈의 골짜기에 자식을 불태워 죽이는 몰록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아하스 왕에게 자식을 불태워 죽인다고 해서 죄가 용서받지 못하고, 또한 일 년 된 송아지를 하나님께 드리고,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레위기에 나와 있는 희생제사 시스템을 부정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은 외형주의, 형식주의, 의식주의만 하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내면의 덕을 무시한다면 내면의 실체 없는 의식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면으로 요구하시는 덕은 하나도 순종하지 않고, 의식주의와 형식주의를 가지고 때워 보려고 하는 것은 위선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형식에 불과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면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전부 불순종하였습니다. 내면으로는 우상숭배하고 거짓과 음란이 가득했고, 외형에 치중하였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이러한 형식주의, 의식주의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참된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이고, 도덕적인 실체가 없는 의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사회적인 요구가 있습니다. 

캐나다 리전트 칼리지의 브루스 왈트케(Bruce Waltke) 교수는 신학교에서 미가서를 한 학기 동안 강의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사회적 요구를 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성도가 사회를 살아갈 때에는 공의를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왈트케 교수가 공의는 성도가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게 될 때 자기보다 약한 자와 못한 자를 돌보고 억압에 눌려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는 일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단순히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살면서 공의를 행하며 살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욥 29:12). “빈궁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한 자의 일을 사실하여 주었으며 불의한 자의 어금니를 꺾고 그 잇사이에서 겁탈한 물건을 빼어 내었었느니라” (욥 29:16~17). 

욥은 적극적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적극적으로 공의를 행하며 사는 사람이 되기를 주께서 원하십니다. 성도가 공의를 행하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정치가로 활동하면서 악한 법과 제도를 선하게 고치는 개혁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는 영국에 노예제도가 있었을 때 예수님 믿고 난 후 이 노예 제도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노예 제도 폐지를 위해 앞장서서 운동하였고, 결국 영국의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는 옳은 교육을 위해서 헌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 대한민국 교육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육 현장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약자를 돕는 사회복지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을 돕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고, 교회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공의를 실행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덕을 세우는 성도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인격적인 요구가 있습니다. 인자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인자는 영어로 ‘Kindness’입니다. 즉, 친절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인격적으로 요구하시는 것은 친절입니다. 성도들은 친절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회봉사와 구제활동을 할 때에도 고압적이고 교만한 자세로 하면 안 됩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어야 합니다. 변함없는 사랑과 친절로 하면 받는 사람들도 감동받게 됩니다. 가정에서도 가족끼리 서로 친절해야 합니다. 불친절하면 싸움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성도들끼리 친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직장생활에서 성도는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윗사람에게는 아첨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짓밟는 나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직장에서 나쁜 짓을 하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천국 못 가게하고 지옥으로 이끄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친절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마 22:39). 
 
셋째,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영적인 요구가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 6:8).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시고,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를 죄악과 지옥에서 건져주신 구원자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왕의 통치를 받는 왕의 신하입니다. 어떤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이론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를 구원한 구원자 되시고,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왕과 동행할 때는 겸손해야 합니다. 왕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해야 하고,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게 된 것, 그리고 생명과 호흡을 가지고 있는 것이 왕의 은혜라는 것을 알고 감사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왕과 동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과 동행하려면 왕과 가까운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사랑하고, 순종해야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를 가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4).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창 6:9).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말 2:6). 


결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교회가 존경보다 경멸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교회에 관련된 글의 댓글을 보면 대부분 욕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와 목사를 옹호하는 글을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불신앙하고, 부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원인이 될 수 있지만, 우리도 스스로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내면의 덕을 이루었고, 성도들이 힘이 있었을 때에 약한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베풀었으며, 우리 성도들의 인격에 얼마나 많은 친절이 있었고, 하나님과 동행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볼 때 불신자도 신자도 대통령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침례교는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기독교 국가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국교는 없습니다. 신앙은 각자 자유로 믿는 것입니다. 공연히 기독교의 이름으로 권력을 잡아 남을 학대하고, 착취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처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미가서 6장 8절을 제대로 순종치 아니함으로 스스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반성해야 합니다. 교회가 미가서 6장 8절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덕을 쌓을 때, 세상에 선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화려한 외면보다는 공의로 행하고, 친절을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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