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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미 7: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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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미 7:18-20)

미가서는 12개 소선지서 가운데 6번째 책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공부한 선지서들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옛 언약에 실패해서 포로가 되는 형벌을 받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어겨서 하나님께 징벌받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지만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20세기 세대주의 종말론자들은 육적인 이스라엘이 다시 일어난다고 해석했습니다. 

예를 들면 모리아산에 다시 여호와의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 예언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는다고 해서 누가 그것을 성전이라고 부르겠습니까? 결국 예언서의 내용은 육적인 이스라엘이 망해도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미가서의 마지막 3절도 새 언약의 핵심을 증거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31:33-34).

미가서 7장과 예레미야서 31장의 새 언약에 관한 내용이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원수들을 모두 부끄럽게 하시며 새로운 출애굽의 기적을 보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해서 미가 선지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이것은 또한 미가 선지자 이름의 뜻과 같습니다.  
 
성경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입니다. 단순히 사람이 연구해서 쓴 책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방서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면 손이 저절로 움직여 글자가 써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구약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도 그런 방법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영감을 주실 때 성경 기록자들의 언어와 인격과 감정 모두를 사용하여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책과 베드로가 쓴 책의 어휘와 표현이 조금씩 다른 것입니다. 


Ⅰ.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Incomparableness) 

미가 7장 18절에는 미가 선지자의 감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에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신이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미가 선지자가 감탄하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는 ‘비교 종교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를 연구하여 이해하고 선교전략을 세운다는 의미로 연구하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평면적인 차원에서 비교하는 것은 생각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신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자체적인 속성을 갖고 계십니다. 
 
미가 선지자뿐만 아니라 모세도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을 여러 곳에서 증거했습니다.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출 15:11).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는데 200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다 지나갔습니다. 만약 10명씩 일렬로 지나갔다면 지금까지 건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몇천 명, 몇만 명씩 지나갈 수 있을 만큼 홍해를 가르셔서 200만 명이 하룻밤 사이에 다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애굽 군대가 보고 따라 들어가는데 하나님께서 다시 홍해를 합치셔서 모두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모세가 도대체 여호와와 같은 신이 어디 있느냐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또 모세는 죽기 직전 신명기 33장 26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면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신 33:26). 

여수룬은 내 의로운 백성이라는 의미인데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같은 분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귀신, 잡신과 비교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비교 대상도 안 됩니다. 비교도 비슷해야 하지 비교할 수준도 안 되는데 무슨 비교를 합니까? 
 
미가 선지자가 예언하던 시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 때입니다. 요담과 아하스는 16년 통치했고, 히스기야는 29년을 통치했습니다. 그런데 요담, 히스기야 때는 아니더라도 아하스 시대 16년은 계속해서 예언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유다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입니다. 성전 문을 닫아버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그릇들을 다 창고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제단이 있던 곳에 다메섹 귀신을 숭배하는 제단을 갖다놓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바알을 숭배하고 힌놈 골짜기에 자기 자식들을 불에 태우면서까지 귀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러자 미가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아!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마라. 하나님을 그런 잡신, 귀신들과 비교하지도 마라. 하나님과 바알이 상대가 되느냐? 하나님과 다메섹 귀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다. 그런 잡신들과 비교하지 말고 너희는 하나님을 경배하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이런 메시지를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기뻐하시고 인애(Mercy)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종교는 둘 중 하나입니다. 사탄이 만들었거나 인간의 부패한 영혼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에게도 없고 인간의 부패한 영혼에게도 없는 것이 바로 긍휼인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다 겁을 줍니다. 두려움을 줘서 벌 받지 않으려면 자신을 섬기라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집에 못도 함부로 박지 못했습니다. 집에 못을 박으면 삼신할머니가 노하셔서 눈에 핏발이 서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핏발 서는 것은 밤에 잠 안 자고 공부해서 그런 것이지 못 박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를 섬기지 않으면 집에 불행이 생길 것이라고 겁을 줘서 경배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 종교의 특징입니다. 전도해보면 사람들이 두려워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동안 섬겼던 귀신이 우리 집을 괴롭히면 어떻게 하냐는 것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신들이 괴롭히려 해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괴롭힐 수 없습니다. 상대도 안 되고 비교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옥 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말한 것은 현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지옥 갈 사람도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종교와 다릅니다. 겁을 줘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가니까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겔 33:11). 에스겔 18장 32절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 용서하기를 기뻐하십니다. 


Ⅱ.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용서하시느냐?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닙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누구의 허물을 넘기신다고 했습니까?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용어로 보면 성부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나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계획을 가지고 용서하십니다. 계획된 사람들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5).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다 긍휼히 여기신다면 이런 말씀을 왜 기록하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있고 긍휼을 베풀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까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굉장히 기분 나빠합니다. 왜 차별을 두냐고 하나님께 따집니다. 이것은 주제 파악이 아직 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히 여기시고 어떤 사람을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1). 

토기장이도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데 하나님께서 그럴 권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똑똑한 인간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피조물입니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7). 수가 바다의 모래 같아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다시 한 번 확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은 아무한테나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베푸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이미 계획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구속 언약’(Covenant of Redemption)이라고 합니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 7:20). 

여기서 ‘옛적’이라는 단어는 미가서 5장 2절에도 나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미 5:2). ‘태초’라는 말은 영원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에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기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영원 전에 인간을 창조하기도 전에 벌써 인간의 타락을 다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부패한 인류 가운데 구원할 자를 미리 예정하신 것입니다. 
 
어떤 분은 예정이라는 단어만 나오면 성질을 냅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구속 언약은 영원 전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언약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 가운데 구원할 자를 택하시고 성자 예수님에게 택한 자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와 피를 흘려 택한 사람들의 죗값을 갚아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은 택한 자들의 영혼에 역사해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구속 언약을 택한 백성에게 점진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했을 때도 앞으로 여자의 후손이 와서 택한 자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에게도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에게도 네 씨가 영영히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내 백성의 목자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구속 언약을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점진적으로 택한 백성에게 보여주시고 맹세하셨던 것입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 13:20).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신 것도 영원한 언약 때문이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이유도 영원한 언약 때문입니다. 침례교의 위대한 스펄전 목사님이 ‘영원한 언약의 피’라는 제목으로 히브리서 13장 20절을 설교했는데 참으로 놀라운 진리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에 따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피를 흘리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에 따라 택한 자에게 죄 사함과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겠다고 맹세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구원받을 이유나 조건이나 업적이나 공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은혜로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의 피 값을 치렀지만 우리는 순 공짜로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헌금도 하는 것입니다. 헌금을 내서 천국에 가려면 일조 원을 내도 못 갑니다. 우리에게 지옥 가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자격은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 갈 자격이나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영원 전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고 택하신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언약의 자비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구원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하면서 보니까 99% 믿는데 1% 안 믿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안 믿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정말 안 믿을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면 믿는 것입니다. 도끼로 사람을 죽인 사람을 아십니까? 고재봉, 김대두. 이런 사람들이 감옥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믿고 완전히 변해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 다 전도하다가 결국 사형 당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가망 없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서 베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입니다. 


Ⅲ.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인애의 내용 

하나님께서 택한 자에게 인애를 베풀어 주시는데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함을 주시는 칭의의 은혜(Justifying Grace)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는 예수님을 믿고 죄를 용서받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미 7:18). 

죄악을 사하신다는 동사의 히브리어는 ‘라사’인데 이것은 죄 짐을 들어 올리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 올려서 어깨에 메고 씨름선수가 하듯이 확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하신다는 히브리어 동사의 의미입니다. 저는 참 죄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죄가 없으신 표정으로 앉아계시는데 저는 죄 짐이 엄청나게 커서 아무리 들려고 해도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더니 내 죄 짐을 잡아서 어깨에 메시고 그것을 등 뒤로 던져버려 어디로 날아갔는지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을 사하신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허물을 넘기신다는 동사는 히브리어로 ‘오베르’인데 출애굽기 12장 23절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져 있으면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의 죄 짐을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그 죄를 잊어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의 죄를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우리는 가끔 옛날에 지은 죄 때문에 악몽을 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모두 잊어버리시기 때문에 그런 악몽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악몽은 무엇이냐? 사단이 죄를 복사해서 그것을 가지고 자꾸 송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단에게 미가 7장 18절을 붙들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내 죄의 복사본을 가지고 와서 괴롭히는 사단아 물러갈지어다!’ 이렇게 명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뭘까요? 배고픈 것이 문제입니까? 배고파도 굶어 죽지만 않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가난이 문제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모두 불행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 더 행복합니다. 이번에 우리 성도들이 캄보디아에 다녀왔는데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행복해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죄인인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죄는 마귀를 아버지로 만들고 비참을 친구로 만들고 사망을 대가로 만들고 지옥을 영원한 운명으로 만든다.” 죄는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고 용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지옥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의 영향력을 벗어나 점진적으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성화의 은혜(Sanctifying Grace)를 주시는 것입니다.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8-19). 

예수님을 믿고 성도가 되어 의롭다 함을 받으면 천국에 가게 됩니다. 지옥에 가기는 다 틀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죄에 빠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의롭다함을 입은 성도들을 거룩하게 해주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세 가지 행동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진노하시지만 우리가 회개하면 진노를 풀어버리십니다. 그러니까 성도가 죄를 지으면 진노하시다가도 회개하면 진노를 푸시는 과정이 성화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강력한 원수처럼 쫓아오는 죄들이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빠지는 죄로 음란, 도박, 술, 담배와 같은 것들은 예수님을 믿어도 쉽게 끊지 못하고 따라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들을 하나님께 맡기면 발로 밟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아오는 대군들은 깊은 바다에 빠뜨려버리십니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미 7:19). 이것이 바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화의 은혜인 것입니다. 


결론 

칭의와 성화의 은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 기업에 남은 자들에게 베푸시는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있는 신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교 불가능성’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육적인 이스라엘이 죄악 때문에 포로로 끌려가지만 인애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적인 이스라엘을 다시 세워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죄악을 사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를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영생을 누리는 백성이 되게 하신다는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한 백성에게 인애를 베푸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신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평생 경배하고 더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지 아닌지를 아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아는 방법이 있는데,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세 가지는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갚으신 나의 구주라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둘째, 나는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고 생명의 부활을 해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셋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있는 사람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의 인애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있으십니까? 소망이 있으십니까? 사랑이 있으십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남은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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