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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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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행 9:1-22)


오래 전에 국내의 어느 월간 잡지에 연재되었던 정치 풍자만화에서 재미있는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에 출마한 이인제 씨가 김영삼 대통령을 찾아 인사하러 갔는데, 김 대통령은 자기를 배신하고 떠난 그를 괘씸하게 여겨 아주 쌀쌀하게 대하면서 속으로 '밥맛없는 녀석, 니가 대통령 되면 나는 이민 간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던 이인제 씨 역시 속으로 말하기를 '영감, 이러지 말어. 나 많이 컸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사람 하나를 키워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평생 돌보아 주어도 좀 자랐다 싶으면 돌아서 버리는 것이 인간관계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으로부터 오히려 배반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이 세상 정치가들과는 달리, 오히려 자기를 원수로 대하던 사람까지 변화시켜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장면이 바로 그런 주님의 능력이 대표적으로 발휘된 것으로서, 바로 저 유명한 '사울의 회심'이라 불리는 사건입니다.
나중에 신약의 손꼽히는 사도가 된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바울'로 바뀌어 버린, 실로 기적적인 일이 실제로 벌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그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변화를 사람 속에서 이루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 시간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택자를 부르시고 그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당신의 뜻대로 사용하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능력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의 심령에 친히 찾아와 당신을 보여 주심으로써 '자기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분이십니다. 

1절과 2절 말씀에 "1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 제사장에게 가서 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울의 이름은 앞서 7장 끝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미 유대 사회에서 촉망받는 엘리트로서 앞길이 창창하게 보장되어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방 지역인 다소에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 까닭에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이었던 헬라 철학과 문화에도 익숙했으며, 또한 유대인 랍비들 중에서도 명성이 높은 가말리엘 문하의 수재이기도 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그를 돌로 친 자들은 바로 그 사울이라는 청년의 발 앞에 옷을 벗어 모아 두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그 누구보다도 마땅히 여겼던 대표적인 골수 유대주의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스데반의 순교 이후에도 이 사울은 "주의 제자들" 즉 기독교인들을 향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체포할 수 있는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다메섹은 로마 제국 산하의 수리아 지방에 있던 중요한 상업 도시로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240킬로미터 정도 되는 곳에 있었는데, 기독교인의 세력이 유대 지방 밖에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커뮤니티로 확장되기 시작할 때에 교두보 역할을 하는 요충지에 해당되었습니다.

사울은 그 다메섹에 있는 유대인 회당들에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하여 체포함으로써 기독교의 씨를 완전히 말릴 수 있다고 전략적으로 아주 명석한 판단을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살펴 볼 때에는 정말이지 그런 사울이 오히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며 인간적으로 판단해 볼 때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못할 일을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이루려고 이미 계획을 세워 놓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3절부터 9절에 기록하기를 "3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5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6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9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고 했습니다.

다메섹에 거의 도달할 즈음에 사울은 하늘로부터 빛을 보게 되고 자기를 부르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된 후에 회상했던 바에 의하면 그는 이 빛을 '정오'에 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즉 해가 가장 높을 때였는데, 그 해보다도 더 밝은 빛을 보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빛 가운데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사울이 여기서 "주"라고 호칭한 것은, 자기 앞에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는 아직 정확하게 모르지만 그런 밝은 빛 가운데 나타난 것을 보아서 분명히 신적 존재인 것은 틀림없음을 자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아주 간단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사울이 저지르고 있던 죄의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으며, 그의 심령을 한순간에 완전히 굴복시키는 철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유대교의 이단을 퇴치하는 줄로 생각하고 그처럼 멀리 원정까지 가면서 기독교인들을 말살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상 그가 적대시하고 있던 상대는 그냥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지금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의 영광을 입고 나타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바로 그 한마디 말씀을 통해 충격적으로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형태로든지 기독신자를 멸시하고 박해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핍박하고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그 이유는 '신자와 그리스도'는 한 몸의 '지체와 머리'로 직접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 역시 그가 잡아 죽이려고 쫓아가던 기독신자들의 머리 되신 예수님께로부터 "내가 바로 지금 네가 핍박하고 있는 예수다."라는 짧지만 강력한 한마디 말씀을 직접 듣게 됨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또한 자기가 대적하고 있는 실제 상대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를 한순간에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울에게 이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그와 같이 길을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22장 9절에서 바울이 이 사건을 회상할 때에는 자기 동료들이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즉 그 주위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친히 하신 말씀은 듣지 못하고 사울이 예수님께 대답하는 소리만 듣고 영문을 몰라서 어안이 벙벙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결코 환상을 본 것이 아니라 실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처럼 부활의 영광 중에 그에게 친히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됨으로써 그런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주위 사람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지만 사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뵙게 되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수 없는 실제사건이었습니다.
바로 그 확실한 체험 한 가지 때문에 이전에는 그처럼 교회를 발 벗고 나서서 박해하던 기독교의 대표적 원수가 한순간에 완전히 딴 사람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에디오피아의 내시를 부르실 때에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마음에 계시되었습니다.
이 사울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본인만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친히 나타나 주심으로써 그처럼 불가능해 보였던 그를 극적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즉 각 택자를 부르실 때에 어떤 방법을 선택하시는지는 오직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환난으로 인하여 기도하는 중에, 어떤 사람은 교역자의 심방을 받는 중에, 어떤 사람은 설교 말씀을 듣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꼭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중생의 체험을 해야 한다고 미혹하는 말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회심시키는 과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떤 길을 통해서든지 그 결정적인 마지막 단계는 바로 그 본인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깨달아지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당신 자신을 사람의 심령 속에 계시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고 믿게 해 주시는 바로 이 한 가지 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택자들을 부르시고 변화시켜 주고 계십니다.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최악의 인생들이 기독신자로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들이 지금도 곳곳에서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이제는 하늘 보좌 우편의 영광 중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그 택하신 자의 심령에는 실로 명백하고도 강력하게 당신을 보여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친히 만나게 되는 체험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무슨 설명이나 논리로써 증명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전혀 없는 일입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만나고 영접하기만 하면 이전에 가졌던 모든 의심이나 반항, 그처럼 당연하게 여겼던 불신의 이유들이 그 본인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당신을 친히 뵈옵게 되는 역사가 택자의 심령 속에 일어나게 함으로써 오늘도 숱한 죄인들과 악인들을 변화시켜 '자기 사람'으로 바꾸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각자 확실히 만나고 영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그 '부르신 자'의 남은 생애를 당신의 뜻에 따라 '전도자'로 사용하시는 분이십니다.

10절부터 14절의 말씀에 "10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11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12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13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14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사울이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기도하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동안 사울이 머물러 있던 곳을 가리켜 본문에 "직가라 하는 거리"라고 했습니다.
이 '직가(Straight Street)'란 이름의 거리는 현재의 다마스커스에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사울은 그 삼일 동안 눈먼 상태에서 자신이 지난날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죄를 진심으로 애통하고 회개하면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중에 예수님께서는 다메섹에 있던 아나니아란 성도에게 나타나셔서 사울의 형편을 여차여차 알려 주시고 그에게 찾아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 본인에게도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찾아 와서 그의 눈을 다시 뜨게 해 줄 것이라는 계시가 이미 내려져 있다고 일러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펄쩍 뛰었습니다.
  
교회를 대적하며 신자를 박해하는 그 사울의 악명은 이미 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최악의 핍박자가 변하여 오히려 기독신자가 된다는 것은 아니니아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가능 그 자체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그런 지시를 받고서도 "아이고, 주님, 그 사람만큼은 어림도 없습니다."라고 손사래를 쳤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나니아는 예수님께서 이미 그 정도는 자기보다 훨씬 먼저 그리고 훨씬 더 잘 알고 계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볼 줄 알아야만 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실 일을 두고 자신의 인간적인 계산과 예상만 가지고서 전도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미리 포기하는 것은 실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택자라면 그 어떤 길로든지 반드시 부르시고 끝내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뜻과 능력을 자기 스스로 제한시켜 버리는 신성모독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15절 이하 19절 상반절에 "15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a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깜짝 놀라는 아나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사울을 향하여 이미 작정하고 계시는 당신의 원대한 계획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 '교회의 박해자 사울'이 이제부터는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나의 택한 그릇"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릇'의 용도는 오로지 주인이 마음 정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릇 자신이 자기를 어디에 쓸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를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전하기 위한 도구로 작정해 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특히 '이방인'을 전도하는 사명에 주역을 맡게 될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사울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쓰이게 된다는 것은 또한 그가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포함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게 큰 해만 끼치던 그가 이제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해를 당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곧 구원이라는 최고의 은혜를 입는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하는 생활이기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아나니아는 사울을 안수하여 눈을 뜨게 해 주면서 바로 이 사실을 그에게 정확하게 전달해 주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을 만나면서 "형제"라고 그를 불렀습니다.
그 두려운 사람을 만나면서 그런 첫 인사로 사울을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아나니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한 형제로 영접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가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나 그가 전해 주는 말이나 모두가 다 "주 곧 네가 오던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께서 행하시는 것이라고 사울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즉 사울을 부르신 예수님과, 이제 그에게 새로운 사명의 삶 즉 그 예수 이름을 위하여 충성하면서 고난을 감수해야 할 것을 지시해 주시는 예수님은 바로 똑같은 주님이셨던 것이었습니다.

신자가 되면 무조건 만사형통해야만 하고 그것만이 기독교인이 되는 이유요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생 구원'이라는 최고의 축복을 이미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사실상 확신이 없는 사람이나 하게 되는 오해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 9:23)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아무 힘 드는 일 없이 그저 편안히 여생을 보내며 살도록 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라, 오직 당신을 위하여 온전히 헌신하는 새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그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게 되면 '해도 당하게' 될 것이라고까지 하셨습니다.
물론 그런 해와 고난 중에도 함께 동행해 주실 것은 약속해 주셨지만 그것들을 완전히 면제해 준다고 하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아무든지'라고 하셨으니 적어도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려는 신자라면 이런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에 있어서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사실을 똑바로 깨달아야만 제대로 중생 받은 신자입니다.
즉 예수님을 영접하여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되고 죽을 몸이 영생의 구원을 받게 되었으면, 이제는 '예수 목적, 내 인생 수단'이라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헌신의 부르심'을 듣지 못한 자라면 분명히 아직 '구원의 부르심'도 듣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사람을 죄 가운데서 불러내어 놓으신 후에 더 이상 아무 말씀이나 요구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가만히 계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에 새로운 눈이 열리게 하시고 성령으로 강력하게 만들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영접한 것이 확실하다면 이제부터 바로 그 주님을 위하여 해를 받으면서도 그 이름을 담대히 전파하는 전도자의 사명도 기꺼이 완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회심은 초대교회사에 있어서 실로 경천동지할만한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처럼 교회와 성도 핍박에 열을 내고 앞장서던 사람,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다메섹까지 원정을 가면서 기독교를 박멸하려고 살기등등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싹 바뀌게 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타난 아나니아의 경우처럼 사도들과 성도들은 그 사실을 결코 쉽게 믿을 수가 없었고, 실제로 사울이 회심하여 바울이 된 이후에도 그가 초대교회 내에서 완전한 신용을 얻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걸렸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바울의 회심은 확실한 것이었고 또한 진실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심령과 삶 속에 그런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신 장본인이 바로 예수님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러 변화시켜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기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동기는 각양각색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길은 어릴 때 유아세례를 받고 신앙교육을 받으면서 성장하다가 성경 말씀을 통해 배운 그대로 믿고 신앙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기도하다가, 혹은 경향어린이선교원에 자녀를 등록시키기 위하여, 또는 새소식반이나 교구농구리그에 참여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서 교회에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기는 어떤 것이었다 할지라도 그 결과는 반드시 예수님을 자신의 인격을 통해 만나는 것으로 귀결되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각자의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셨습니까?
아무리 못나고 아무리 엉망진창인 인생이었다 하더라도 이 예수님만 확실히 만나면 틀림없이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이전에는 신자를 멸시하고 교회를 욕하던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일단 이 주님을 자신의 심령을 통해 영접하게 되기만 하면 기적적인 인생의 변화가 일어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런 구원의 확신에 이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그릇'으로서의 사명이 따라오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놀고먹게 하기 위하여 불러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당신을 원수처럼 대하던 죄인을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까지 대신 지셨던 주님께서는 이제 우리 역시 당연히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의 이름을 위하여 해를 당할 것'까지 각오하고 따라와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을 통하여 그 '심령'이 새 사람으로 변화되고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해 주시는'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 '생활'이 전도자의 사명에 충성하게 됨으로써,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중생인의 은혜와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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