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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 있는 사람 (5) (마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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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5) (마 5:7-8)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여덟 가지의 복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덟 가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여덟 가지 복 있는 사람을 분류해 보면 아주 균형이 잘 맞습니다. 여기에 두 가지 면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겸손, 애통, 온유, 의입니다. 이것은 모두 내면이 성숙한 사람을 일컫는 요소들입니다. 즉 진정한 복 있는 사람은 내면이 성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면은 나머지 네 가지로 긍휼, 청결, 화평, 의를 통한 고난입니다. 이것들은 외적인 면으로 성숙한 사람을 일컫는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제시하신 여덟 가지 복 있는 사람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성숙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다섯 번째 복 있는 사람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7절)입니다. 긍휼은 사랑의 실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그 실천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팔복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신 전달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고 보이고 증거 하는 삶을 사는 데에 전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긍휼이 용서이고 사랑임을 십자가 위에서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의 극치는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그 긍휼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 속에는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그 사랑은 타인을 위한 대속의 죽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그런데 이 긍휼은 반드시 그 응답과 결과, 열매가 메아리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긍휼을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기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긍휼은 헬라어로 “엘레에몬(eleemon)”이라는 말로 자비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즉 자비를 베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비함을 받으리라는 말입니다. 이 자비를 히브리어로는 “케세드(chesedh)”라고 하는데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이 긍휼은 단순한 동정이 아닙니다. 

그 보다 한 단계 높은 직접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그래서 이 긍휼의 마음이 있을 때 자비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게 됩니다. 긍휼은 본래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시편 145편 8~9절에는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도다”라고 말씀함으로 그 하나님의 속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마음을 본받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자비를 베풀고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의 마음을 본받는 삶이요 자녀 된 자로서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며 그 마음이 표현되는 곳에 하나님이 전달되고 표현되고 증거 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표현하며 살아갈 때 다시금 그 축복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가끔 교회 오시거나 예배를 마치고 나가실 때 엘리베이터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엘리베이터는 노약자와 장애우를 위해서 설치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엘리베이터는 유독 느립니다. 장애우 용으로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감인 것은 항상 장애우와 노약자들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서 있다는 것입니다. 젊고 건강한 분들이 엘리베이터 안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 보면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젊은이들이 그대로 타고 있습니다. 

아무도 그 모습을 보고도 내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장소는 3층입니다. 1층에서 3층까지의 계단은 불과 46개밖에 안됩니다. 올라 다니고 내려 다니기에 아주 적당한 높이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르내리는데 기분 좋고 건강에 유익하라고 계단도 친환경적 나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젊고 건강한 분들이 장애우와 노약자들의 시선을 외면한 채 이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긍휼의 마음이 계속 솟아 나와야 하고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연속극 가운데 안타까운 이들의 모습을 보며 눈물을 펑펑 흘리시곤 합니다. 그것은 흉이 아닙니다. 

그만큼 긍휼의 마음이 풍성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분들은 눈물만 흘리는 것이 아니고 직접 행동하게 되어 리모컨을 눌러 자선금을 보내고 모금 운동에 참여하고 직접 뛰어가 참여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눈물조차 말라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긍휼이 메말라가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긍휼의 행동들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록펠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부자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실제로 록펠러(1839-1937년)는 미국 역사상 최고 부자 중 한명입니다. 그는 19세기 중엽에 석유를 증유화해서 가스, 나프타, 등유, 윤활유 등의 다양한 기름으로 분류하는 스탠더드 오일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사업 초기에 잔인하고 무자비하고 공격적으로 회사를 키웠습니다. 경쟁자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원가 아래로 가격을 낮춰 기름을 방출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정유 업체들을 다 도산하게 만들었고 그 다음에는 회사들을 헐값에 사들여 몸집을 키웠습니다. 1870년에는 기름을 과잉으로 공급하여 석유 값을 폭락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때 흔들리는 정유사들을 또 다 사들였습니다. 결국 록펠러는 1882년에 석유 독점업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 결과 록펠러는 미국에서 사람들이 가장 증오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런 그가 55세 때에 불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걷지도 못하게 되어 휠체어를 타고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 현관에 붙어있는 액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액자에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되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글귀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 글귀를 보는 순간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록펠러에게 변화의 기회를 주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병든 한 소녀가 입원비가 없어서 울며 애걸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비서에게 익명으로 그 소녀의 병원비를 지불하도록 했습니다. 그 후 그 소녀는 기적같이 병이 나았습니다. 

후일에 록펠러는 그의 자서전에서 살아가면서 이렇게 행복한 삶이 있는지 이전에는 정말 몰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모으고 누리는 것보다 베풀고 나누는 삶이 더 행복하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후 자선가로 변신하게 되었고 명문 시카고 대학을 설립하였고 1913년에는 인류복지를 위해 록펠러 재단을 설립했습니다. 또한 3천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복은 먼저는 자신을 회복하게 하는 복입니다. 잃어버렸던 자아상을 회복하고 상실했던 인간성을 회복하게 하는 복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따뜻하게 회복하고 질서를 세우는 복이 있습니다. 자신의 회복은 나 자신의 회복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도 전염됩니다. 그래서 그 행복이 전해지고 나누어지며 따뜻함과 회복됨의 축복이 이 세상을 회복시키고 질서를 세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아리처럼 되돌려 받는 복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여섯 번째 복 있는 사람은 마음이 청결한 사람(8절)입니다. 청결은 헬라어로 “카타로스(katharos)”라는 말인데 이는 순수하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즉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의 말씀 시편 51편 10절에서는 “내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주소서”하고 말씀합니다. 이는 마음이 오염되지 않고 탐욕스럽지 않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길 원한다는 시편기자의 간구입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수적인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살아가려면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관계가 두터워지고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틴 루터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주 맑고 순수해졌습니다. 이제는 조그만 죄를 지어도 그것이 마음에 걸려서 고해성사를 하러 사제에게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해성사 후 내려오는 중에도 불길한 생각만 스쳐가도 마음에 걸려서 또 다시 올라가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너무 맑고 깨끗하면 조그만 먼지만 내려앉아도 표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쓸고 또 쓸고 닦아내는 것입니다. 사제가 앉아서 루터를 보니 하도 사소한 것들을 가지고 오고 가니까 “이 다음에 올 때는 좀 큰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고 해서 일화가 되었습니다. 

이 정결한 마음을 가지는 일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입니다. 그래서 힌두교는 요가로 명상을 통해서 정신과 마음을 맑게 합니다. 불교에서는 참선을 통해서 마음을 닦고 도교에서는 단 수련을 통해서, 유교에서는 수신을 통해서 정신과 마음을 맑게 합니다. 모두가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정화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청결한 사람은 보기에도 좋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집사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집사님을 대동하고 심방을 하게 됐습니다. 집사님은 따라가면서도 ‘혹시 기도를 시키면 어떻게 하나?’하고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찬송을 부른 후에 목사님께서 “김 집사님, 기도 하세요” 하시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의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우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했지만 그러고 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은 기차소리에 묻히도록 중얼중얼 하다가 기차가 다 지나가자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기도를 끝내버렸습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 “김 집사님, 기차소리 때문에 하나도 못 들었어요. 다시 하세요.”하였습니다. 

처음 그때는 누구나 이렇게 마음이 백지장과 같이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처음처럼”이라는 말도 있듯이 모든 처음은 이렇게 순수함이 있고 설렘이 있습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님들 모두가 처음에는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맨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그 떨리는 마음을 오래 간직할 수 있을수록 좋습니다. 목사안수 받던 날의 그 순수함, 장로 장립 받던 날의 그 떨림, 권사가 되고 집사로 임명받던 날의 그 순수함이 평생 유지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좀 시간이 지나면 거침없이 습관화 되고 떨림도 사라지고 신선도도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에 때가 끼고 빛이 바랩니다. 무엇이나 오래되면 순수함과 청결함 떨어집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순수함이 참 소중합니다. 미션스쿨 초등학교에서 이사님들이 학급 방문을 했습니다. 모두 청소하고 준비하고 담임선생님은 혹시 누가 질문하면 잘 대답하게 하려고 앞에 앉은 똘똘한 아이들을 교육시켰습니다. 앞에 앉은 철이는 우리를 지으신 분은 누구신가 하고 물으시면 하나님 이라고 대답하라고 시켰습니다. 영이는 우리를 먹이시고 기르시는 분은 누구신가 하고 물으시면 부모님이라고 대답하라고 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방문단이 좀 늦어졌습니다. 

그 사이 앞자리에 앉았던 철이가 화장실에 갔는데 하필 그때 이사님들이 오셨습니다. 이사님은 앞자리에 앉은 영이에게 “우리를 지으신 분이 누구인가요?”하고 묻자 영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부모님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사님이 의아해 하며 “아니 하나님이 아니고”하고 묻자 아이는 “그 아이는 화장실에 갔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맑고 깨끗합니까? 이것이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복이냐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청결이 복입니다. 

그렇다면 왜 청결해야 합니까? 그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꾸준하게 마음의 청결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시편 24편 3절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이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두텁게 하여 깊이 나아가며 은혜의 바다에 깊이 빠지게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양심의 이중성 때문입니다. 겉은 의로운 척하면서 내면으로는 탐심과 위선과 불의한 생각이 가득하다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무덤은 스치기만 해도 부정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하얗게 회칠을 했습니다. 멀리서도 구별할 수 있고 밤에 보아도 볼 수 있도록 만들어서 스치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무덤은 겉에서 보면 희고 깨끗합니다. 그런데 속은 뼈들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바리새인들의 모습으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책망하시며 호통 치신 것입니다. 신앙의 삶은 외적인 삶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의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관계의 삶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죄 사함 받음 때문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해하는 것들 중에 내 안에 있는 악의 뿌리들이 큰 문제입니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는 여전히 악의 씨인 탐심과 시기, 위선, 교만, 자기자랑이 가득합니다. 이것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들고 악화시키는 것들입니다. 또한 내 영혼을 오염시켜서 나로 말미암아 시험에 빠지게 만들고 실족하게 하여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음의 청결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유리창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매일 닦아내야 깨끗함을 유지하듯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일 침투해 들어오는 외적인 자극들을 차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영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경건의 연습도 필요합니다. 세상이 다 검은데 나만 희게 살기가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자기 비움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내 안에 욕망의 생각이 가득 들어 있으면 희게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눅 9:23)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복 있는 사람의 여덟 가지 사례를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이 겸손함과 애통함과 온유함과 의에 목마른 사람입니다. 이것은 내적 성숙함의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긍휼과 청결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외적인 성숙함의 요소들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복의 개념을 송두리 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복은 가짐이 아니고 누림도 아니고 내적 채움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들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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