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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은 곳을 향하여(1) (눅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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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곳을 향하여(1) (눅 5:1-6)

-경험을 넘어서-

: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다시 불일듯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새삼스럽지만 확인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불일듯 하게 하여야 할 것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딤후 1:6)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 세웠습니다. 목회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필요한 은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의 사명이 그에게서 사그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였고 부끄러워하였습니다. 그의 불은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일 듯 하게 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사명을 위하여 필요한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에 대한 확신입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입니다. 사명에 대한 확신입니다. 보호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은 다른 차원에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말로 ‘저 깊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 높은 곳을 포기하고 낮은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 깊은 곳을 포기하고 얇은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야 할 높은 곳은 어디입니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찬송가 491장 1절)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붙들어 주셔서 있게 하셔야 할 그 높은 곳은 어디입니까? 빛과 사랑이 언제나 넘치는 그곳은 어디입니까? 빨리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자는 것입니까?

우리가 나아가야 할 저 높은 곳은 바로 삶의 깊은 곳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다시 불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삶의 깊은 곳을 보아야 합니다. 삶의 깊은 곳을 보지 않고 다시 불타오르게 하려고만 한다면 우리는 감정적 열광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불일듯 하자는 것이 단지 큰 소리로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의 삶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요, 진정으로 뜨거움이 있는 삶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기 위하여 삶의 깊은 곳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아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깊이 있는 삶입니다. 제자의 삶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제자는 사람들 중에서 주님께서 선택하여 뽑아 세운 사람입니다.  

I. 사람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는 어떤 사람이 있습니까?  

1절 말씀입니다.
: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셨습니다. 여기에서 게네사렛 호수는 갈릴리 바다의 다른 이름입니다. 게네사렛 호수라고 불린 것은 갈릴리 바다 북서안의 비옥한 땅의 이름이 게네사렛이기 때문입니다(마 14:34, 막 6:53). 예수님께서 이곳에 서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에워싸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무리[o[clo"/오클로스]’라는 말은 많은 사람이 퍼져있는 모습으로 ‘오합지졸’을 가리킵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질서가 없이 그저 아무렇게나 모인 어중이떠중이입니다.

1.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은 통제 불능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 배에 올라서, 그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 놓으라고 하신 다음에,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에워싸고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하여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떡을 얻어먹기 위하여 몰려들었다가 예수님께 등을 돌린 대다수의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요 6:;66)

그 어떤 사람이든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귀한 생명입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맡기기는 턱도 없이 부족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명령을 받고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전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랑 받기를 원할 뿐이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다니고 있지만 군중으로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이 사랑 받기를 원하지만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오랫동안에 예배당을 드나들었지만 예배당 문턱만 넘나들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들으나 귓가로 흘려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모여와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은 일단 희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계속하여 말씀 듣는 것을 결코 포기하지 마십시오. 말씀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그 날을 바라보며 전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며 하셨던 일이 있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님은 무리에게 말씀하셨지만 그 눈은 다른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면서도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선,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로 삼을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두 척의 배와 그 배의 어부들을 발견하셨습니다.


2.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이 어부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난 밤, 밤새도록 고기잡이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잡은 것이 없는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셨을까요? 

그물을 끌어올릴 때, 펄쩍펄쩍 뛰는 고기들로 가득하다면 어부들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빈 그물을 끌어 올린다면 그 마음이 얼마나 허전하겠습니까? 더욱이 그물에 쓰레기가 걸려 나와서 그물을 상하게 하였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빈 그물을 손질하는 것은 정말로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망하지 않고 다시 바다에 나갈 준비로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물의 코가 빠진 것을 깁고, 쓸데없이 걸린 것들을 빼어냈습니다. 그들은 지난밤의 헛수고에 실망하지 않고 다시 나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난밤의 실패는 잊고 다음 날을 준비하는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두 번이 아니고 자주 헛수고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실패했어도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는 희망의 사람이 바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저 앉아있지 않고 다시 내일을 준비하는 희망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어부들 중에서도 꼭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3절 말씀입니다.
: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예수님은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중에서 한 척에 오르셨습니다. 그 배는 시몬의 배였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한 배에 오르셨습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가 타셨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시몬의 삶이 달라졌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 시몬을 선택하셨습니다. 이후에 전개되는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 한 사람, 시몬을 선택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3. 한 사람을 보셨습니다.

시몬, 그는 예수님이 선택하신 바로 그 한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송 중에 “주를 위한 이 곳에”가 있습니다. 이 찬양을 처음 들었을 때, 제가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에 다시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사가 이랬기 때문입니다.

“주를 위한 이 곳에 / 예배하는 자들 중에 / 주가 찾는 이 없어 /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아니 무슨 가사가 이렇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모여 예배하는 사람들 중에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없다니! 그래서 주님께서 슬퍼하신다니! 많은 사람이 모여 주님을 예배하는데 정작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없어 주님이 슬퍼하고 계시다니! 쇠망치로 머리를 치는 것과 같은 충격이 제 마음에 전하여왔습니다. 이것은 그 날 그 아침, 게네사렛 호수의 모습입니다. 무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여들었는데, 그곳에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복음송의 가사는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되길 /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이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고백이기를 소원합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여도 나는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한 사람에게로 향하셨습니다. 바로 시몬에게로 향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관심이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물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무리로써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써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바로 그 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오르셨다고 해서 시몬이 자동으로 베드로가 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시몬의 순종이 있었습니다.
  

II. 순종  

예수님께서 시몬의 배에 타셨다는 것이 시몬에게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은혜요, 사랑이요, 엄청난 복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시몬이 순종하여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시몬은 순종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가 기억하는 그 한 사람,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의 배에서 바닷가의 무리들에게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갑자기 말씀을 멈추셨습니다. 본문에서 ‘마치다[pauvw/파우오]’는 말은 끝냈다는 말이 아닙니다. ‘멈추다’, ‘정지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시던 말씀을 멈추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깊은 데로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몬은 바닷가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전문 어부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목수로서 생활해 오시던 분으로서 한 번도 그물을 던져 보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목수 예수님께서 어부 시몬에게 고기잡이에 대하여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은 순종하였습니다.

1. 결단이 필요한 순종입니다.

시몬은 이미 자신의 장모가 열병 앓는 것을 예수님께서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뒤에서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고기를 잡으러 나가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결단하여야 했습니다. 순종을 위한 결단의 순간이 왔습니다. 결단 없이는 순종도 없습니다.

김창환목사님의 글 중에 순종에 대한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며, 그의 뜻을 따르며,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통치권에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옛 성품이 남아 있어 너무나 자주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순종을 위하여)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순종의 결단을 내리는 생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결정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겠다고 결단하여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결단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결단이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5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5a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시몬의 말을 잘 들어 보십시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의 경험은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수고하다[kopiavw/코피아오]’는 상처가 나도록 흠씬 두들겨 맞아서 피곤하여졌다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 철저하게 실패한 경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2. 경험을 넘어선 순종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은 소중합니다. 속담에 “경험이 지혜를 가르친다.”고 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교사는 경험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특히 연세 많은 어른들의 경험을 참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경험이 편견이 될 수 있습니다. 못 올라갈 나무 쳐다보지도 말랐다고 쳐다보지도 않으면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특히 실패한 경험에 묶여있다면 성공할 길은 없습니다. 절망의 경험에 묶여있다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경험도 소중하지만 발상의 전환도 필요합니다. 신앙은 사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일에 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신앙은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것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애플의 신화를 만든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을 만들 때 시장 조사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컴퓨터에 그래픽 기술을 탑재하는데 그런 일을 보지도 듣지도 생각해보지도 않는 사람에게 묻는다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순종은 자주 본성을 거슬릴 수 있습니다. 순종은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충돌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본성에 거슬리고, 상식에 어긋나고, 경험한 것과 다른 일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5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5b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시몬이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말씀[rJh'ma/흐레마]’은 무리들이 들었던 말씀[=로고스]이 아닙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목소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타고 바닷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등 뒤에서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두 귀가 아니라 가슴을 찡하고 울리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였습니다.


3. 말씀에 의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모든 논쟁을 멈출 수밖에 없습니다. 시몬이 자신의 모든 경험을 접고 예수님께 순종하였던 것은 그 분의 말씀이 그에게 부딪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달리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시몬이 자신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상식을 뛰어넘어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끈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시몬에게 말씀이 들려졌다고 하는 것이 은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지 않으시고 어부들을 보셨고, 그중에서도 시몬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을 선택하셨습니다. 시몬과 함께 배를 타고 함께 그물을 내렸던 다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말씀하지 않고 시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 시몬에게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한 말씀을 시몬이 들었다고 하는 것도 시몬에게 특별한 은혜입니다. 이 은혜 때문에 그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경우 순종 그 자체가 은혜일 수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복음송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 주 은혜로 이곳에 서있네 /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 그 어느 것도 난 필요없네 / 주님만 경배해 :∥

우리는 그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다만 그 은혜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는 것은 그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것은 그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찬양하는 것은 그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것도 그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 말씀을 읽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며, 전도를 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시몬이 은혜로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6절과 7절 말씀입니다.
: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하나님께 순종은 항상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시몬은 순종하였습니다.


4. 풍성하게 거둔 순종입니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십니다(삼상 15:22). 말씀은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순종에 의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순종으로 주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익이 돌아가고 은혜를 끼치게 됩니다.

순종이 주는 풍성함을 마음께 누리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설교 말씀은 절반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기 싫은데도 순종하였더니 이렇게 성공하였다거나 또는 몇 배의 보상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에 대한 보상은 단지 물질적인 차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이야기가 있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더 깊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만,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선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은 무리 중에서 순종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순종을 결단하고, 경험을 넘어서, 말씀에 따라 순종하십시오. 순종의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순종은 우리가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단계입니다.

순종함으로 사람의 계산으로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십자가를 지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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