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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늘 이기신다 (시 7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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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늘 이기신다 (시 76:1-12)


[유다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랴. 그 명성, 이스라엘에서 드높다. 그의 장막이 살렘에 있고, 그의 거처는 시온에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불화살을 꺾으시고, 방패와 칼과 전쟁 무기를 꺾으셨다. 주님의 영광, 그 찬란함, 사냥거리 풍부한 저 산들보다 더 큽니다. 마음이 담대한 자들도 그들이 가졌던 것 다 빼앗기고 영원한 잠을 자고 있습니다. 용감한 군인들도 무덤에서 아무 힘도 못 씁니다. 야곱의 하나님, 주님께서 한 번 호령하시면, 병거를 탄 병사나 기마병이 모두 기절합니다. 

주님, 주님은 두려우신 분, 주님께서 한 번 진노하시면, 누가 감히 주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내리셨을 때에, 온 땅은 두려워하며 숨을 죽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재판을 하시어, 이 땅에서 억눌린 사람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사람의 분노는 주님의 영광을 더할 뿐이요, 그 분노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주님께서 허리띠처럼 묶어 버릴 것입니다. 너희는 주 하나님께 서원하고, 그 서원을 지켜라. 사방에 있는 모든 민족들아, 마땅히 경외할 분에게 예물을 드려라. 그분께서 군왕들의 호흡을 끊을 것이니, 세상의 왕들이 두려워할 것이다.]

• 아, 시리아

주님의 평화와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세계 도처의 분쟁 지역, 특히 시리아 땅에도 임하기를 빕니다. 초기 기독교의 소중한 유산이 남아 있는 시리아가 지금 신음하고 있습니다. 대를 이어 군부 독재를 이어가고 있는 바샤르 아사드의 철권통치에 저항하여 일어난 시리아 민중들을 향해 군대는 대포와 로켓포를 쏘고 있습니다. 무고한 이들이 흘리는 피와 눈물이 오론테스 강을 채우고 있습니다. 여성들과 어린이들의 비명소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찢고 있습니다. 비운의 땅 홈스는 지금 불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민간인 사망자가 7,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내전 직전의 위기입니다. 

그런데도 국제사회는 시리아 사태에 개입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유엔 안보리에 이 문제가 상정되었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두 나라가 개입을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두 나라는 이란, 이라크와 더불어 반미 벨트를 형성하고 있는 시리아에 서방세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게다가 시리아의 타르투스에는 러시아의 해군기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러시아는 시리아에 5조 6천억 원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의 무기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리비아 사태가 벌어졌을 때 나토의 전투기까지 동원하였던 서방 세계도 그렇게 단호하게 시리아 사태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나라의 석유 매장량이 리비아에 비해 형편없기 때문입니다. 개입해 보아도 얻을 게 별로 없다는 계산이 벌써 선 것입니다. 

국제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정의의 원리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현실입니다. 이런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현장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런 단단한 현실 논리를 안에서, 밖에서 깨뜨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생명의 세계를 열어가라는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전쟁과 테러는 부도덕하고 비인도적이고 부조리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택한 자기 멸절의 길입니다. 

거대한 제국이 등장하여 주변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던 때에 예언자들은 전혀 다른 세상의 꿈을 인류 앞에 보여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를 치지 않고, 군사훈련도 하지 않는 세상 말입니다(사2:4, 미4:3).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서, 평화롭게 사는 꿈,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으며 사는 세상의 꿈, 그 꿈은 언제나 위태롭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꿈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 일어나소서

무고한 자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전쟁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일곱 봉인에 담긴 심판 내용을 전하는 요한계시록 6장에는 ‘전쟁, 굶주림, 죽음, 흑사병’을 상징하는 기사 네 명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마지막 시대에 대한 징표이자 경고입니다. 그 가운데서 붉은 말에 탄 사람은 전쟁을 통해 땅에서 평화를 거두어가는 권한을 받은 자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붉은 말을 탄 기사는 지금 사람들에게 평화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군비경쟁을 부추기고, 첨단 무기를 구입할 것을 종용합니다. 그는 또한 정의나 평화보다는 이익을 중심으로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어느 분은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고 말했지만, 제가 보기에 전쟁의 뿌리는 과도한 욕망입니다. 남이야 어찌 되었던 나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 속에 이미 전쟁은 잉태되어 있습니다. 욕망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존엄한 인격으로 곧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대하기보다는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그런 현실을 목도한 시편 시인들은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일어나십시오. 주님의 소송을 이기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모욕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버려두지 마십시오. 주님께 항거해서 일어서는 자들의 소란한 소리가 끊임없이 높아만 가니, 주님의 대적자들의 저 소리를 부디 잊지 마십시오.”(시74:22-23)

하나님은 세운 것을 헐기도 하고, 심은 것을 뽑기도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입니다.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로마 등 영원할 것만 같았던 고대의 제국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남긴 흔적을 보고 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잡풀처럼 땅에 의지해 살아야 했던 이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인이 ‘유다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랴. 그 명성, 이스라엘에서 드높다’고 노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가장 연약했을 때, 어디에서도 도움을 얻을 수 없을 때 그들을 구원하러 달려오신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생생하기에 시인은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 가까이에 계시면서 우리의 숨소리 하나까지 듣고 계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시인은 그것을 “그의 장막이 살렘에 있고, 그의 거처는 시온에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그곳은 하나님께서 친히 불화살을 꺾으시고, 방패와 칼과 전쟁 무기를 꺾으신 곳입니다. 구체적인 경험이 없다면 이런 고백은 쉽게 나올 수 없는 법입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 하나님의 역사 개입

고대의 성경 번역본 가운데 셉투아진타(Septuaginta)라는 것이 있습니다. 흔히 ‘70인 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1성서를 그리스어로 옮긴 최초의 번역본인데, 번역작업은 주전 3세기경부터 시작하여 약 10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히브리어 성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히브리어가 이미 사어가 되어 그 말을 아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셉투아진타는 각각의 시편이 기록된 배경을 간단하게 기록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적으로 정확한 기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시를 이해하는 배경으로는 그만입니다.

거기 보면 이 시의 삶의 자리는 앗시리아 왕 산헤립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입니다. 기록을 보면 앗시리아 왕 산헤립은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풍전등화의 위기였습니다. 산헤립의 전권을 위임받은 랍사게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는 항복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백성들은 동요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신하들을 예언자 이사야에게 보내 자기의 참담한 심정을 알립니다.

“오늘은 환난과 징계와 굴욕의 날입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낳을 힘이 없는 산모와도 같습니다…주 그대의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말을 들으셨으니, 그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대는 여기에 남아 있는 우리들이 구원받도록 기도하여 주십시오.”(사37:3-4)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왕과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산헤립의 계획을 어떻게 좌절시키실 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영이 산헤립의 마음을 흔들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도록 할 것이고, 그곳에서 칼에 맞아 죽게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산헤립은 에티오피아 왕이 자기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는 전선을 옮겼습니다. 랍사게는 왕을 돕기 위해 포위를 풀고 떠나면서 히스기야에게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세상의 어떤 신도 앗시리아로부터 나라를 지켜줄 수 없을 거니 각오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 편지를 가지고 성전으로 올라가 그것을 주님 앞에 펴놓고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 앞에,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 앞에 엎드려 산헤립의 망언을 잊지 말아 달라고 청합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어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기도는 응답되었습니다. 앗시리아는 물러갔고, 산헤립은 살해당했습니다. 그런 현실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시인은 마치 우쭐거리는 어린아이처럼 말합니다. “야곱의 하나님, 주님께서 한 번 호령하시면, 병거를 탄 병사나 기마병이 모두 기절합니다”(6) 이런 고백은 비단 이 시인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시편 33편의 시인은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군대가 많다고 해서 왕이 나라를 구하는 것은 아니며, 힘이 세다고 해서 용사가 제 목숨을 건지는 것은 아니다. 나라를 구하는 데 군마가 필요한 것은 아니며, 목숨을 건지는 데 많은 군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16-17)

군사주의의 망령이 사람들의 의식을 옭죄던 시절에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늘의 눈으로 역사를 조망합니다. 조금만 높은 곳에 올라가도 땅에서 벌어지는 일의 추이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승리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삽니다. 그래서 전쟁과 테러가 일상화된 세상에서도 평화의 노래를 부릅니다. 

• 심판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역사의 심판자이십니다. 주님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내리시면 온 땅은 두려워하며 숨을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자들의 계획을 비웃으십니다. 그들의 자랑거리를 걸림돌로 만드십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무력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꼭 붙들고 계셨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까닭은 억눌리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9). 하나님은 억눌린 이들의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방관자가 아닙니다. 무력한 이들을 무시하고 학대하고 착취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려움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평화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저는 전쟁과 평화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정현종 선생의 <요격시>를 떠올립니다. 

다른 무기가 없습니다
마음을 발사합니다

두루미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미사일에
기러기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폭탄에
도요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전폭기에
굴뚝새를 쏘아올립니다 모든 포탄에
뻐꾸기를 발사합니다 무기 공장에
비둘기를 발사합니다 무기상들한테
따오기를 발사합니다 정치꾼들한테
왜가리를 발사합니다 군사 모험주의자들한테
뜸부기를 발사합니다 제국주의자들한테
까마귀를 발사합니다 승리 중독자들한테
발사합니다 먹황새 물오리 때까치 가마우지……

하여간 새들을 발사합니다 그 모오든 死神 들한테 

2700년 전 히브리 시인의 마음에 공명하듯 한국의 시인은 로켓포나 대포알이 아니라 새들이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지금 전쟁을 획책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 꿈에서 배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꿈은 무력한 듯싶지만, 역사는 그렇게 꿈꾸는 이들 덕분에 이만큼이나마 진보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유니언 신학대학의 종신교수인 현경은 모로코 순례 중에 숙소에서 TV 광고를 보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어떤 금융회사 광고 같았는데, 첫 장면은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이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축구공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높은 시멘트 담 너머로 넘겨버린 상황을 보여주었습니다. 실망한 소년은 시멘트 담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팔레스타인 쪽을 들여다봅니다. 그러자 저쪽에서 놀고 있던 또래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그 공을 힘껏 차 담을 넘겨 돌려보내줍니다. 다음 장면은 온몸이 뒤틀린 장애인 교수가 휠체어에 앉아 물리학 명강의를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강의가 끝나자 젊은 남녀 대학생들이 모두 일어나 교수님께 환히 웃으며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작업모와 작업복을 입고 고층 건물 신축장에서 열심히 불꽃을 날리며 용접 일을 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같은 복장을 한 남성이 보온병에 든 차를 가지고 가 그 여성에게 차를 따라줍니다. 여성은 잠시 일을 멈추고 헬멧을 벗고 긴 머리를 흔들어 늘어뜨리고는 차를 받아 마시며 미소를 지었습니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125-6) 

적대감과 차별이 스러지고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연대하는 세상의 꿈은 이처럼 어디에서나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최후의 승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미 이긴 싸움에 동참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서있는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평화의 물결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드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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