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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요 3: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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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요 3:22-30)


몇 년 전 TV광고에 산소 같은 여자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아마 사람들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여자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호흡할 때 산소를 들이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뿜습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도 이런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산소 같은 사람입니다. 만나면 즐겁고, 또 만나고 싶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격려를 받기 때문에 항상 같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반대로 이산화탄소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면 답답하고, 자기 자랑을 주로 해서 따분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안 만났으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메리히 교수의 <인간자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 책에서 “어떤 사람이 사회에 유익을 주는 인간 자본인가?”하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피상적으로 돈이나 지식, 그리고 학력이나 경력이 있는 사람을 인간자본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상 그러한 것들은 인간자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진정한 인간자본은 의욕이 있는 사람, 책임적인 사람, 바른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조용히 협력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중요한 인간자본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인도에서 사역했던 테레사 수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헌신적 삶은 정말 감동적이고 존경스럽습니다. 그러나 어떤 분의 말에 의하면 그분이 시기와 질투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 더욱 존경스럽다고 합니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수녀님! 훌륭한 다른 사람들을 질투하는 마음이 생긴 적이 없습니까?”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없어요! 허리를 굽히며 사는 사람들은 위를 쳐다볼 겨를이 없을 겁니다.”
그처럼 허리를 굽히고 섬기며 사는 자세가 정말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자세가 아닐까요? 
오늘의 본문은 이런 아름다운 섬김의 자세를 보여준 한 위대한 인물을 우리들에게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찾아와서 “선생님, 요단 강 동편에서 선생님과 함께 계시던 분, 즉 선생님께서 이전에 증언하셨던 그분이 지금 세례를 주고 계시며, 모든 사람들이 그분에게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선생님이 저분보다 먼저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셨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선생님이 저분보다 더 선배가 되지 않습니까?”하는 뜻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세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할 분이므로 많은 사람이 그리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점점 더 위대해질 것이고, 나는 점점 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이 먼저 생각할 것은 내가 이 자리에 왜 있는가 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라는 것이 있어서 잘 모르는 곳을 찾아간다고 해도 별 어려움 없이 찾아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산길은 조금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보통 거리라면 건물도 있고 사람도 많이 있고 하니 설사 길을 잃었다고 해도 별 염려를 하지 않겠지만 산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한번 길을 잘못 들었다 하면 이건 대책이 없습니다.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내가 바로 가는 것인지 길을 잘못 접어들었는지 알 수가 있겠지만 첩첩산중이라면 어디 가서 사람을 만날 수가 있겠고 방향인들 어찌 제대로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도 그렇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내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를 바로 알아야 우리의 인생이 값진 인생으로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위치가 무엇인지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기뻐했던 사람입니다. 저는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 제사장으로서의 편한 삶이 보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광야에서 생활하면서도 조금도 불편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음식 삼아서 거칠고 메마른 광야에서 수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요단강 가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칠 때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아왔고 요한은 그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자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이 제사장과 레위인 몇 사람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묻게 했습니다. 요한은 그 질문에 거절하지 않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광야에서 ‘주님을 위하여 길을 곧게 만들어라’ 하고 외치는 사람의 소리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라면 왜 사람들에게 세례를 줍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운데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 계십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주인이 밖에 나갔다 돌아올 때 신발의 끈을 풀어주고 발 씻을 물을 떠다 씻기는 것은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의 종노릇하기도 벅찬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선지자로 여겨 따랐지만 요한은 이렇듯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러니까 자신은 신랑이 아니라 신랑의 친구처럼 신부를 얻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유대나라에서 결혼식을 할 때 친구의 역할은 대단히 귀했습니다. 친구가 신랑과 신부 사이의 연락자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지금처럼 전화나 핸드폰, 혹은 컴퓨터 이메일이 있다면 좋았지만 그 당시는 인편으로 연락을 취해야 했습니다. 또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의 초대장도 보내고 모든 결혼식도 준비하고 주재했습니다. 또한 첫날밤에도 친구는 신부의 방을 지키면서 거짓 연인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다가 밤중에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기뻐하면서 신랑을 맞아들여 신부의 방으로 인도합니다. 그 다음에는 친구는 그 자리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친구가 신랑과 친하다는 이유로 신부에게 인도한 후에도 그 자리에 계속 남아서 얼쩡거린다면 신랑 신부로부터 눈총을 받을 것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일지라도 자기의 역할을 다하면 떠나야 옳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입장이 그랬습니다. 자기는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친구역할을 다하였으므로 물러설 때인 줄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주역으로 등장할 때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았고 그저 하나님이 세워주신 자신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기쁨으로 알았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이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고자질하는 말을 듣고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자기의 신분, 즉 그리스도의 증거자요 선구자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서 가지는 기쁨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분명한 자기 인식이 있었고 자기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세상에 왜 태어났는가 그 생의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년 주부들 가운데는 그 동안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에 정신이 없다가, 아이들 학교에 다 가고 남편도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나니, ‘나는 무엇 때문에 어렵게 공부를 했으며, 왜 여기 서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출세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허무주의에 빠지는 일입니다. 

“편하고 넓은 돌이 보였습니다. 나는 제일 바닥에 그 돌을 깔고는 쌓아올리기 편해 보이는 돌들을 골라 하나씩 올려놓았습니다. 
한 20cm 정도 올렸을까요?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다시 쌓아올렸습니다. 이번엔 25cm 정도 올린 듯 싶었습니다. 불안전해 보입니다. 가운데 돌이 너무 둥급니다. 그 옆에 조금 세모난 돌을 끼워 넣으니 괜찮은 듯 싶습니다. 
다시 돌을 쌓아 올립니다. 지탱해 줄 수 있는 돌들이 필요합니다. 위태롭습니다. 옆으로 다른 돌들을 쌓아 올렸습니다. 서로에게 버팀이 되어 더 높이 쌓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 돌들을 더 높이 쌓아 올리려면 더 많은 돌들이 옆을 받쳐주어야 했습니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을 쌓았습니다. 세모난 돌, 네모난 돌, 둥근 돌, 그리고 편편한 돌, 나름대로 다 쓸모가 있었습니다. 편편한 돌은 바닥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네모난 돌은 버팀이 되어 주었으며, 둥근 돌은 미관을 돋보이게 했고 세모난 돌은 둥근 돌들이 구르지 않도록 그 사이 사이의 버팀이 되어 주었습니다."

『낮해밤달』에 실린 글입니다. 필요치 않은 돌은 없습니다. 필요치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겉보기에 보잘것없고 부족해 보인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버티게 하는 버팀목이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중에 쓸모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 헨리의 말처럼 길가의 조약돌도 필요 없이 뒹구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목적을 비참하고 불행하며, 슬픔 가득한 것으로 만들지 마시고 하나님이 분명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를 여기에 세우셨다고 하는 내 존재 의미를 뚜렷하게 알게 될 때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주의 길을 곧게 하기 위해서, 그 길을 미리 준비하는 선발대와 같은 역할을 하도록 자기가 이 자리에 있다고 하는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고 자신의 사명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기쁨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에게는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이 무엇이라고 말하든, 제자들이 어떤 고자질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태어났는지 너희들도 증거하라”고 말할 정도로 조금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되는 그 자체를 기쁨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함으로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봉사하고 희생하는 그 자체를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자를 위해 수고하면, 수고하는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고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 야곱은 그 외삼촌 집에서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서 칠 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지만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교회를 위해서 봉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주의 일 하다가 피곤을 느끼고 힘들어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사람 때문에, 혹은 과중한 그 일 때문에 지치신 분이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일을 하면서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았는지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일했고, 교회에서 그래도 인정받아야 하겠기에 최선을 다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피곤과 허무뿐이고, 목사님도 알아주지 않고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도 알아주지 않을 때 여러분은 실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에게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어떤 보상을 바라거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봉사하고 섬기는 여러분의 직책과 사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원하지 말고 누가 나를 친절히 대해주기를 바라기에 앞서서 내가 먼저 남을 알아주고 그 모든 수고를 칭찬해줄 수 있으며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 격려하고 위로하고 함께 친교를 나누며 먼저 섬겨주게 되면 그 수고 자체가 기쁨이요, 바로 그 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요한은 신랑의 기쁨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지금 신랑의 친구가 되어 신랑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같이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사람이 성도요 세례 요한의 기쁨을 가진 사람이 성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옛 속담에 “사촌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좋지 못한 속담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요 힘들게 사는 사람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공감대를 이루는 사람이라야 넉넉한 사람이요 성공하는 사람이며 항상 기쁨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과 같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그를 위해서라면 우리가 곤욕을 당해도 좋고, 손해를 보아도 좋고, 심지어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말했고,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내가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내가 잘못되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욥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욥은 당시 최고의 갑부요 유지였지만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자식도 다 잃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결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어머니 태에서 벌거벗은 채로 나왔으니, 벌거벗은 채로 그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요,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고백함으로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 욥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마침내 하나님께서 욥을 모든 곤경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저에게 복을 주사 전보다 갑절로 복을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다윗은 또 어떻습니까? 계속해서 사울에게 쫓겨다니며 목숨을 보전키 위하여 애쓸 때 그는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서 쉬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나를 잔잔한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며 나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주님은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게 된다 하더라도, 나는 겁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 줍니다.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이 내가 죽는 날까지 나와 함께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나는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왜 불러주셨는지 왜 이 자리에 있게 하셨는지 때로는 마음과 몸까지도 다 힘들고 지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가 되신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 살아갈 때 하나님은 나로 새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것이요 그럴 때 하나님의 깨우쳐주심을 따라 넘치는 기쁨이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왜 하나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깊이 깨달아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어떤 일이라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세워주신 위치가 있기 때문에 나의 위치가 어디인가 깨달아야 살아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가정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이며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녀라면 자녀의 위치가 있고, 부모라면 부모의 위치가 있습니다.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부모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또 남편이라면 남편의 위치가 있고, 아내라면 아내의 위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고, 아내로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또 교회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아론과 미리암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동생 모세를 비방하다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았고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고라와 아비람과 다단과 온은 족장 250명과 함께 모세를 대적하며 모세의 위치를 끌어내리려고 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유다 왕 웃시야는 비록 선정을 베푼 훌륭한 왕이었지만 자신의 나라가 강성해지자 그만 교만하여 자신의 위치를 잊었습니다. 

제사장이나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을 하려고 하다가 이를 만류하는 제사장들 앞에서 화를 내다가 그만 문둥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목사가 서있어야 할 위치가 있고 전도사의 위치가 있습니다. 장로가 서있어야 할 위치가 다르고 권사의 위치가 다르며 집사의 위치가 다르고 권찰의 위치가 다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구역장의 위치, 교사의 위치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위치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 즐겁게 하는 일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앞장 서서 몸으로 돕는 일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물질로 섬기기도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투덜이도 필요합니다. 투덜거리는 이도 있어야 아하 이것이 문제가 될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 어그러진 것을 바로 잡을 수도 있고 어그러지지 않도록 조심할 수도 있게 됩니다.

또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차지하게 하시는 땅 곧 네 소유가 된 기업의 땅에서 조상이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옮기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 사람은 왜 저러냐고 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도 다 필요한 사람이요 그 사람도 있어야 함께 하나님의 성전으로 지어져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어떤 경우라도 나는 필요 없는 존재라고 하지 마십시오. 또한 나에게는 아무도 관심도 없다고 하지 마시고 내가 먼저 다가가십시오.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 교회 이 자리에 있게 하셨는지를 분명히 깨달아야 하고 이때 이 자리에서 내게 맡겨주신 직분을 따라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입니까? 왜 나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이 땅에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나는 무엇을 하다가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하는가? 이것을 바로 발견하셔서 내게 주신 직임을 따라 내가 있는 곳에서 충성을 다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지으실 때 돕는 배필로 지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건 경쟁하기보다는 동역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경쟁의식보다는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동역의식입니다. 경쟁의식은 자칫, 이기심과 욕심에 의한 파괴를 낳을 수 있지만 동역의식 즉 돕는 배필과 같은 더불어 살아가게 될 때 우리 모두 함께 세워져갈 것입니다.
동역의식은 가정과 학교와 직장과 교회 등 어느 곳에서든 꼭 필요한 의식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속한 곳에서 어떠한 의식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계신지요? 지나친 경쟁의식의 소유자로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독차지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주님, 저희로 더불어 살아가는 친구가 되게 하사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의 성장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게 하시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기심에 기반을 둔 경쟁의식의 소유자이십니까? 아니면 사랑에 기반을 둔 동역의식의 소유자이십니까? 경쟁의식이 동역 관계를 어그러뜨리지 않게 하도록 주의하십시오.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말합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이런 아름다운 섬김이 우리 가운데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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