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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엄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시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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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품에 안긴 아기 같이 (시 131:1-3)   
        
저는 목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좋은 영성을 가지고 싶은 사람입니다. 솔직한 심정입니다. 시시하게 믿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믿고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 진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하고 싶은 일들도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고 싶다고 하여 모두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요,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은 선택과 집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현대인들은 밖에 나가서 식사하실 기회가 많고, 가끔은 가족끼리 외식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식생활에 있어서는 저도 여러분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한식을 좋아하고 잘 먹는 음식만 고집하는 사람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갈비탕, 순두부, 김치찌개, 냉면, 불고기 그렇습니다. 어쩌다 뷔페식당을 찾을 때가 있습니다. 제 정신으로는 뷔페식당에는 가지 않습니다. 호텔 식당에도 들어가게 되지 않습니다. 이유는 비싼 음식을 먹으면 아주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70가지 80가지 많은 음식이 진열되어 있는 뷔페식당에서 겨우 잘 먹는 것들 몇 가지만 골라 먹어야 하니 나올 때는 손해 본 것 같습니다. 

소문난 음식점들이 많습니다. 음식을 잘 하는 식당을 유심히 보면 한두 가지에 집중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집은 설렁탕 하나만 하는데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이런 집에 들어가면 시간도 절약이 되는 것이, 이 집은 한 가지 음식에만 집중하다보니 맛도 있고, 양도 많고 친절합니다. 한 가지 음식에만 집중하니 우선 맛있게 잘 만듭니다. 

월요일 아침 목사님들이 즐겨가는 음식점이 있는데, 10년도 넘게 이 집만 가는 것은 아침에 문을 열기 때문이요, 값이 저렴하기에 부담이 없어 잘 갑니다. 3,500원짜리 식사인데 콩나물국밥입니다. 이 집은 이것 하나만 하는데, 24시간 사람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집에는 들어가 앉으면 5분이 되지 않아 음식이 나오는데, 반찬은 언제나 김치와 깍두기뿐입니다. 그래도 목사님들은 정말 그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습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은 인생을 보다 더 잘 살 수 있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사람은 못하는 것이 없다, 팔방미인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좋은 말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여러 가지를 잘 아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세상의 모든 분야를 다 알고 해박한 지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에 동의하실 줄 압니다. 믿음생활, 우리의 영성이란 단순한 믿음, 하나 두 가지를 선택하고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무엇인지 핵심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회의 핵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그 핵심을 알고, 그 핵심에 서려고 하십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책망만 받은 교회가 두 교회가 있는데, 하나는 사데교회요, 또 하나는 라오디게아교회가 나옵니다. 사대교회를 향하여 책망하시면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3:1)라고 하셨습니다. 오래 믿었다느니, 거창한 직함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나 자타가 알아주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다들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책망하십니다.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부와 권력과 명예를 다 가졌습니다. 성공한 사람이요, 복받은 사람입니다. 어떤 면으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가정적으로 보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도 잘 다닙니다. 봉사도 잘 합니다. 교회 안에서 누구나 존경하고 알아줍니다. 그는 정말 구원받은 사람이요, 복 받은 사람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지금까지 자기의 살아온 신앙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고 있습니다. 예배당에 다니면 수없는 예배를 드렸고, 헌금도 하였고, 기도도 했지만, 그는 영적 공허함에 빠져 있습니다. 난 구원받을 것이야,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은 알아주실 것이야,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것이 몇 년인데,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아닌 것은 아니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요, 부족한 것은 부족하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것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주변만 맴돌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핵심 부품이 빠졌습니다. 

세상의 일을 대충대충 그럭저럭 할 수 있어도 우리는 최후에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남의 신앙이 아니고, 우리 아버지의 신앙도 아니고, 기도 많이 하시는 어머니의 신앙도 아니라, 나의 신앙인데 대충대충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이라고,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대충대충 믿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과연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데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사귀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새 사람이 되고, 구원받은 사람으로 살고 살아 있는 영성으로 주님을 대하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착각하지 말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최면 걸지 말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습니까? 교회생활에 충실한 것으로 포장하거나 과장하지 말고, 모태신앙이라는 것도 자랑할 것이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나의 주님, 나의 왕이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나의 성령, 나의 힘과 권능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악을 우리 주님이 대신 홀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므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심판과 형벌을 다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고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님에게 죄와 형벌을 다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건짐 받았고, 지금 살아서 하늘나라를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서 하늘나라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소유하였고, 만족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통치와 지배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들어왔습니다. 소유한 기쁨보다는 소유당한 기쁨이 훨씬 큽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라고 주님이 찾아오시고, 내 안에 들어오시고 떠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들어와 자리 잡을 때에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사도바울은 고후6:16절에서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떻게 일치하겠습니까?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서 살며, 그들 가운데로 다닐 것이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새번역)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살고 계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고,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우신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고백할 때에 시18:1에는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성경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 내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동행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러한 삶이 신앙이요, 구원받은 사람의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좌정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상활이요, 날마다의 간증이요, 날마다의 감격입니다. 

고후13:5에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성을 테스트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시험하고 나의 신앙을 확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우리 스스로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 안에 사시는 것을 알지 못하면 수박 겉핥기 신앙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임재하시고 현존하시는 하나님과 우리 주님, 성령님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고 누리고 사는 사람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세상 중심으로 살고 있습니까? 

누구도 세상을 좇는 삶을 설거나 교만과 이기심과 분노에 치우쳐 성령님을 근심시키는 삶을 살고 있다면 주변의 맴돌고 있는 핵심을 놓쳐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날마다 탄식하시면서 기도하시는 성령님은 나의 영혼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131편의 말씀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이 짧은 시는 짧지만 정말 아름다운 시입니다. 어떤 학자는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들 중 하나”라고 극찬하기도 합니다. 

이 시에는 다윗의 영성과 정신이 숨 쉬고 있습니다. 이 시에는 어린아이와 같은 단순성과 꾸밈없는 겸손을 보여주고 있으며, 오로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려는 신실함이 배어 있습니다. 

이 시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이 시는 하나님께 대한 겸손과 신뢰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부패한 본성 가운데 가장 악독한 성질이 있다면 교만이요, 교만보다 더 악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악한 사탄의 유혹을 받아 타락하면서 하나님이 되려는 교만이 들어왔습니다. 악한 사탄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창3:5에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교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지만, 우리 안에는 교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교만, 자기의 판단이 가장 옳고 자기의 의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만은 가장 본질적인 악에 속합니다. 되지도 못하였으면서 된 줄 생각하지 말고, 나를 넘어뜨리는 세력이 내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으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항상 부족함을 고백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자기를 정당화하고 자기보다 옳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교만이 가장 근원적인 죄입니다. 그래서 교만이 모든 죄를 불러오는 죄라고 합니다. C.S 루이스는 “교만이 가장 본질적인 악이며, 최상의 악이고, 최대의 악이다”라고 합니다. “동시에 세상의 단 한 사람도 그것, 교만으로부터 자유한 자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쓴 여러 많은 책들이 모두다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의 책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나라에 왕자 네 명이 있었습니다. 네 명의 왕자가 모여 이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우리 형제가 전 세계에 흩어져서 최첨단 과학 기술을 배워오자."고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네 명의 왕자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첫째 왕자가 말했습니다. "나는 한 조각의 생물의 뼈만 있으면 근육을 붙이는 기술이 있다." 둘째 왕자도 말했습니다. 

"나는 뼈와 근육만 있으면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는 기술을 배워왔다." 셋째 왕자는 "나는 뼈와 근육 그리고 털이 있으면 사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있다" 라고 했습니다. 막내 왕자도 질세라 말했습니다. "나는 사자가 있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을 배워왔다." 네 왕자는 숲 속에 들어가 뼈를 하나 주웠는데, 그것은 사자의 뼈였습니다. 네 명의 왕자는 그 뼈에 근육을 붙이고, 피부와 털을 돋아나게 하고, 사자를 만들고 마지막으로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사나운 사자가 일어나 그 네 명의 왕자를 물어뜯어 죽였다고 합니다. 

헨리 나우엔이 황당무계한 예화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자기의 교만으로 마침내 자기를 파멸로 이끌어간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만을 내려놓지 않으면 자기를 죽일 수 있다고 경고하려고 이런 예화를 들고 있습니다. 

다윗은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는 전쟁의 영웅이요, 블레셋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이스라엘 12지파로부터 인정 받고, 추대를 받은 왕이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올라갈 때에는 항상 겸손하였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겠다고 허세를 부리지도 않았고, 엄청난 역사를 이루려고 감당하지 못할 일에 힘쓰지 않았습니다. 매일 매 순간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이 힘을 주시는 한도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하였습니다. 

2절입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기도는 사귐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쓰신 김영봉목사님이 있습니다.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히 부르짖는 것이 기도입니까? 

아빌라의 테레사라는 분이 말합니다.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 마치 노예에게 말하듯 하고, 말하는 태도가 부주의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반복한다면, 나는 그것을 기도라고 볼 수 없다. 하나님, 아무도 이렇게 기도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기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무엇이든지, 어떤 목적으로든지 열심히 구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열심을 내라, 열심이 없어서 받지 못하는 것이지, 구하는 내용은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은 기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라고 하면 아무리 열정적으로 기도한다고 하여도 소용이 없습니다. 기도하기 전에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도가 요술 상자 앞에서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산타클로스나 요술 램프의 지니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란 우리가 원하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유치한 생각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기도의 목표입니다. 다시 말하면 선하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 이르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요한웨슬레는 ‘은혜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기도를 설명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는 우리의 진심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기도는 모두 위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과의 사귐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모두 드려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웨슬레는 기도의 본질을 하나님과의 사귐, 교제로 보았습니다. 

이 시편131편은 영혼을 울리는 맑은 기도문입니다. 이 시편을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됩니다. 엄만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엄마의 젖을 마음껏 먹고 만족한 상태로 엄마의 품에 안겨 있는 것과 같이 기도란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면서 그 분의 품에 안겨 있고, 깊은 사귐 속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귐의 기도는 이것입니다. 

젖 뗀 아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젖을 마음껏 먹고 물린 아이를 말합니다. 엄마의 가슴은 가장 평안하고 안락한 안식처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 그 분을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깊은 사귐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영혼이 자라나고 변화됩니다. 

덴마크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인 키에르케고르는 “기도는 하나님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귀한 말입니다. 

오늘 시편 131편을 보면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시면서, 또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면서 자신의 교만과 오만, 감당하지 못할 큰 일을 도모하려는 어리석음을 비워가며 오로지 하나님만을 소원하고, 하나님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리라고 합니다.

3절입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12:2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님이시며,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을 결정되고, 바라보는 대로 닮게 되어 있고, 그의 운명을 결정하고 인생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깊은 기도의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강요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차리고 바로 그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사귐의 기도가 아니라고 하면 기도의 능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사귐의 기도를 깊이 하다보면 모든 기도는 기도하는 것 자체가 복이고, 그 상태에 있는 것 자체가 응답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려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비한 마음과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젖먹이와 같은 심정으로 하나님만 바라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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