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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 (요 1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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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 (요 13:12-17)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앞둔 날 밤 제자들과 저녁 식사를 하시던 자리에서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마태와 마가, 누가복음서에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찬식을 행하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한복음은 성찬식 내용 대신 식사 도중에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팔레스틴 지방은 건조한 날씨 때문에 거리에 먼지가 많았고 샌들을 신고 다니던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면 더러워진 발을 씻어야만 했습니다. 일반 서민들은 자기 발을 닦지만 종을 부리는 집 주인은 외출하고 돌아오면 종들이 발을 씻겨줍니다. 잔치집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가는 것이 유대인의 예절인데 오는 도중에 더러워진 발은 잔치 집 주인이 종들을 시켜 발을 씻겨드리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 씻을 물을 준비하여 손님들이 먼저 발을 씻고 식탁에 자리를 잡도록 배려하는 것이 기본 예의였습니다. 

식사 도중에 일어나신 주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동이시더니 대야에 물을 담아 열 두 제자들의 발을 하나씩 씻겨주십니다. 다른 제자들의 말은 없는데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을 때 한 말씀 올립니다.  ‘주여, 주께서 어찌 제 발을 씻기십니까?’ 그때 주님은 ‘지금은 네가 나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이 후에는 알게 되리라’하십니다. 그랬습니다. 베드로는 물론 거기 있던 모든 제자들은 예수께서 지금 하시는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민망하여 얼굴을 들 수 없고 그렇다고 안된다고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라 할 수 없이 발을 맡겨드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완강히 거부하며 ‘제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하자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십니다.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베드로는 겁이 덜컥 나서 태도를 완전히 바꿉니다. ‘그렇다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세요’ 하고 과잉반응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온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모두 다 깨끗하지는 않다’하시고 베드로의 발을 씻기십니다.  주님은 이렇게 몸둘 바를 모르고 죄송해 하는 제자들의 발을 모두 닦으셨습니다.  처음에는 펄쩍 뛰며 거절하던 베드로의 발을 씻겨주셨고 그 밤에 스승을 팔아넘길 배신자 가룟 유다의 발도 씻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대단히 당황스런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유대인의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위대한 랍비들 중에 어떤 선생이 제자들의 발을 손수 닦아주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을 가르치시는 지도교수님이 발 닦아주겠다고 내밀어라 하면 당연한 듯 내밀 학생들 있습니까? 이건 스승에게나 학생에게나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종의 자리로 내려앉아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은 다시 스승의 자리에 앉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주와 선생이라 부르는데 너희 말처럼 참으로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였노라’
  
전에 경험하신 분도 있겠지만 주일학교와 청소년들을 지도할 때 수련회의 하이라이트로 세족식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 행사의 깊은 의미를 잘 모르고 장난스럽게 참여하기도 하지만 어떤 아이들은 제법 숙연해지고 자기 발을 닦아주시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선생님과 아이가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축복하는 감동적인 장면도 벌어집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장로 임직식 때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선배 장로님들이 임직 받는 후배 장로님들의 발을 닦아주는 의식을 가진다고 합니다. 어른이 어린 사람의 발을 씻겨주고 선배가 후배의 발을 씻기는 장면은 하나의 의식에 불과하지만 숙연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뭉클할 때가 있습니다. 남의 발을 닦는다는 행위가 이처럼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씻겨주라 하셨으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좀 더러운 것이 묻었더라도 손과 손이라는 동등한 입장에서 봉사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발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남의 발을 씻겨주는 일은 왠지 아무에게나 선뜻 베풀 수 있는 봉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옛날에 주인을 섬기는 하인들이 하던 궂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피곤한 날은 귀찮아서 발 닦는 일을 그냥 건너 뛰고 맙니다. 그런 날은 참 개운찮습니다. 한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간에도 남편이 냄새나는 발을 안 씻고 이불로 들어오면 죽는 소리를 하며 당장 나가 닦고 오라고 합니다. 불결하다는 것 아닙니까?  피곤하고 귀찮으면 자기 발도 닦기 싫은데 그런 더러운 발을 서로 닦아주는 것이 옳다 하심은 어찜일까요?  부정의 상징이며 귀찮음의 상징이고 혐오감을 주는 거리낌의 상징인 그런 발을 씻기는 행동은 그 사람의 허물과 불편함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섬김의 뜻입니다.   
        
그 섬김의 일을 상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겠습니까? 죽기살기로 경쟁하는 라이벌이나 동료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기꺼이 닦을 수 있습니까?  내가 저 사람보다 한 수 위에 있고 상급자고 어른인데 그 자리에서 내려와 그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까?   보통 마음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나보다 상급자이고 선배이며 어른의 발은 자존심을 전혀 상하지 않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씻길 수 있습니까?   부모님이나 자녀와 부부사이라면 혹시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끼리는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  

예수께서 주님과 선생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나를 낮추어 베푸는 섬김의 행위였습니다.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남의 발을 닦아주는 행동은 먼저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또 실제로 몸을 낮추어야 발을 씻기는 자세가 제대로 나옵니다. 내가 남의 아래로 내려 앉아야 비로소 상대방의 발을 씻길 수 있습니다. 한 두번 어쩌다 이벤트로 하는 일이라면 보는 눈들이 있으니 연극배우처럼 연기할 수 있지만 그 일을 날마다 하라고 한다면 과연 늘 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 있을까요?  

오늘은 남의 발을 닦아주고 뒤돌아서면 금방 마음이 변해 으르렁거리고 다툰다면 그런 세족식은 사람에게 보이기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명하신 일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왜 그런 명령을 하셨을까 생각해보는 것이 주님의 의도를 더 잘 깨닫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이 말씀이 수련회나 임직식에서 세족식을 하는 의식으로 끝나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이 교훈하시고자 하셨던 본 뜻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최후의 만찬을 드시던 자리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제자들을 두고 떠나가셔야 할 순간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에 흡족할 정도로 성숙한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나누던 그날도 제자들은 우리들 중에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을 벌였습니다 (눅22:24).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예루살렘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대대적인 환영을 하였습니다. 열렬한 환영을 받고 성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을 가까이 모셨던 제자들은 기분이 우쭐하고 들떠있었습니다. 드디어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르실 날이 되었으니 가장 가까이 모시던 자기들은 당연히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들떴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들끼리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는 욕심으로 누가 더 크냐 하는 문제로 다툼을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내일이면 선생님이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되고 십자가 형틀에 달려 죽게 되는데 심각한 사태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서로 크다고 싸우고 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는 중에도 서로 다투는데 주님이 떠나시고 나면 얼마나 더 많이 싸우겠는가 상상이 갑니다. 이런 제자들을 두고 가시려는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을 정돈시키십니다. 내가 너희의 주와 선생이지만 너희의 발을 씻겼다.  내가 너희에게 본을 보인 것처럼 너희도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섬김을 행하는 것이 옳다.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사람이 보낸 사람보다 크지 못하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하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식탁에 불러 마지막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성찬의 의미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해 주는 내 몸과 피라 하시고 너희가 이것을 먹음으로 나의 죽음을 기념하라 하셨습니다.   자신의 몸을 찢어 피 흘리심으로 죽어가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희생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주님의 낮아지심과 섬김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며 섬기는 제자의 삶 이것이 성찬식의 정신입니다.   

베드로가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주세요’할 때 이미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은 예수께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온 몸을 목욕한 것처럼 예수 안에서 깨끗해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먼지로 더러워진 발을 매일 씻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매일 범하는 일상의 죄는 날마다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신다고 거절할 때 ‘그러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하신 것처럼 내가 주님의 보혈로 날마다 깨끗이 씻음받기를 거부한다면 나는 주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기억하며 내 의지로 범한 죄악과 부지중에 범한 모든 허물을 깨끗이 씻음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 없이 정결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나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형제자매의 허물을 용서하고 이해하며 그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 허물을 씻겨주는 사랑,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섬김을 힘써 하시기 바랍니다. 서로 존중하며 용납하고 하나가 되어야 세상의 미혹과 방해와 핍박에 맞서 싸울 힘이 있습니다. 세상과 싸워야 할 제자들이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며 어떻게 주님이 맡겨주신 위대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배신자 유다의 발도 씻겨주심으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한국교회가 이웃에 대한 섬김과 사랑을 정말 열심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교회가 맡아 앞장 서 수고하고 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 많은 선교사와 자원봉사자들을 파송합니다. 무료급식이나 의료봉사와 청소년 공부방, 구제활동과 구호활동 등 모든 분야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섬김의 자세가 굳어있고 우쭐하고 거만한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베푸는 입장에서 받는 사람들에게 거만한 얼굴을 하며 우월의식을 드러냅니다.  보란듯이 자랑하며 섬기는 모양도 있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조선의 부흥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 기도 모임의 강사로 초청된 로버트 하디 선교사는 토론토 의대를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그가 강원도에서 선교하는데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실패만 계속했습니다. 그는 실패 원인이 미개한 조선 사람들 때문이라 생각했지 한 번도 자기 때문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로버트 하디 목사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시자 말씀을 전하던 로버트 하디 목사님이 기도 모임에서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주님, 용서해주세요. 조선 사람들은 미개한 민족이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당신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 주님!  나의 자만심을 회개합니다. 로버트 하디 목사님이 회개하자 다른 선교사들도 하나 둘씩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회개할 때 죄가 무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던 조선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미워한 것을 회개하고 용서를 배우고 눈물로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 뜨거운 회개의 눈물이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회개운동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용남 저, 복음에 미치다)

이런 겸손한 섬김과 죄에 대한 정직한 고백 그리고 죄사함의 기쁨이 아무 희망도 없어보이던 조선 땅에 복음의 빛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계를 향해 복음의 빚을 갚고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 영광스런 복음을 나누는데 우리 옥스포드 한인교회 성도들도 기쁨으로 동참하기 바랍니다.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졌거나 교만해지려 할 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감사가 희미해지려 할 때마다 주께서 명하신 성찬을 행함으로 다시 한 번 주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주님이 내려가셨던 그 낮은 자리로 함께 내려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과 선생이라 부르는 사람은 그분보다 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고 천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발을 씻기신 주님을 본받아 그분께 복종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겸손히 배우는 신실한 제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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