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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다와 다말 (창 38: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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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와 다말 (창 38:12-30)

창세기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준 모세의 설교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좋은 이야기가 아니고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사건을 이렇게 중요한 성경 1장을 할애하면서 자세히 기록했느냐는 것입니다. 단편적으로 말하면 너희 조상들 특히 너희들의 지도자로 선택된 유다 지파의 조상도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다 별 볼일 없는 부족한 자들이 모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족한 자들을 택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고전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부족한 자들이지만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자랑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동생이 형수와 다시 부부가 되는 것도 이상할 뿐더러 그것을 거부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죽이는 것을 보고서 또 놀랄 것입니다. 

한 집안의 가문을 잇기 위해, 씨가 없는 죽은 형을 위해 시동생이 형수와 혼인하는 풍습은 이스라엘 나라 말고도 다른 민족에게도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런 풍습을 보면서, 이런 것은 그저 인간들이 고안한 문화의 일종이겠지 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니, 단순히 인간들이 고안한 문화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신 확고한 뜻인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 법을 소홀히 했다고 시동생을 과감하게 죽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5:5-10에는 분명히 율법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관을 버리고 이 시형제 혼인법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상을 참 하나님으로 받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마치 기관차와 같습니다. 긴 화물칸을 달고 다니는 기관차는 결코 기관사가 개인적으로 유람이나 즐기려고 열차를 운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물칸 하나하나 마다 가득 화물을 실어 타지역으로 수송하려고 운행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유다 가문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가문에 개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가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본질을 실으려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유다의 큰 아들도 죽이고 둘째 아들도 죽이는 겁니다. 바로 이 와중에서 하나님께서 시형제 결혼법에 닮긴 구원의 방식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려는 겁니다. 

시형제 혼인법의 취지는 한마디로 말해서 이렇습니다. '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의 자녀 만들기'입니다. 창세가 3:15에 보면,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에 의해 악마의 세계는 와해됩니다. 

온 인류 중의 택한 백성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출산으로 인해 구원을 받는 겁니다. 즉 여자의 후손에 의해 구원받는 겁니다. 이 원리 원칙은 변동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확실한 것을 모르게 되면 형편 따라, 상황 따라 자꾸만 흔들리게 될 뿐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을 알게 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시형제 결혼법도 이 확실한 원칙을 담는 틀입니다. 형수라는 여성으로 인해 그 신앙적 가정은 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겁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브라함 부부가 아비멜렉이라는 가문에 들어갑니다. 이로 인해 아비멜렉 가문의 여인들이 태가 닫히게 됩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그 가문을 위해 친히 기도해주니 저주가 풀리면서 태가 다시 열렸습니다. 즉 대가 끊어지면 저주이고 대가 이어지면 축복인 것입니다. 하물며 야곱의 축복 안에 놓여 있는 유다 가문이 영속적으로 이어져야 복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다 가문의 자식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죽이고 계십니다. 과연 이 유대가문이 축복된 가문으로 대가 제대로 이어질까요? 유다는 이방 민족인 가나안 사람인 수아의 딸과 혼인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핏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핏줄에 속한 자를 가차없이 죽이십니다. 이는 곧 유다 가문의 전체 위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나마 신앙의 틀을 유지하고 있던 유다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둘째 아들과 그의 형수와 새 부부로 맺어줍니다. 

그러나 둘째 오난이라는 아들은, 형수가 임신해 봤자 자기 아들이 되지 않음을 알고서 그냥 땅에 배설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또 그 오난이라는 아들을 쳐서 죽이십니다. 이제 유다에게는 아들 셋 중에 둘은 죽고 하나만 남았습니다. 

유다는 생각하기를 자기 아들들이 죽어나가는 것은 며느리를 잘못 들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즉 만약 그 며느리와 셋째 아들과 또 혼인시켰다가 그 아들마저 잃게 되는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아직 셋 째 아들이 어리다는 구실을 달아 다말이라는 며느리를 집안에서 추방시키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자기 아들이 죽은 모든 책임을 며느리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입니다. 과연 유다 가문은 이대로 주저앉고 마는 것입니까? 창세기 20장에 나오는 아비멜렉 가문은, 그저 전혀 닫힌 태가 나중에 다시 열려서 회복되는 식이라면 유다 가문의 회복은 다말이 임신 못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유다 가문의 여자의 후손 역할은 하나님에 의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유다의 본 아내요 아들들의 어머니인 수아의 딸은 죽고 맙니다. 유다는 너무나 슬펐지만 곧 위로받은 후 여행을 했습니다. 마침 며느리 다말이 거하는 동네에 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다말은 대단히 과감한 행동을 합니다. 

아들의 죽음과 그리고 시아버지에 의해 자신이 쫓겨난 것을 종합해 볼 때, 축복의 가정을 회복하는 길은 자기 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녀는 창녀로 변장했습니다. 그리고 시아버지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유다는 그녀가 단순한 창녀인 줄 알고 그 대가로 염소 한 마리를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말이 요구한 것은 유다의 도장과 끈과 지팡이였습니다. 이것은 상대자의 신분에 대해서 차후에 두 말 못하도록 명확히 해놓기 위함입니다. 이제 다말과 유다의 관계는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가 아니라 부부의 관계로 성사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불신앙인으로 인해 저주받은 가문을 살리는 겁니다. 유다의 죄와 자식들의 죄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다름아닌 며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자의 후손의 역할입니다. 악마를 이기고 죄를 이기는 분은 도리어 사람들의 철없는 죄악으로 인해 한없이 피해를 보는 자로 출현됩니다. 

유다는 자기 며느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합니다. 신앙적으로 축복을 받고 있다는 자기 가문의 영광을 먹칠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며느리를 불로 태워죽이려고 했습니다. 다말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놓으면서 이 물건들의 주인으로 인해 임신했다고 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유다는 자기의 임무를 소홀히 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가문의 위기가 결코 며느리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 즉 구세주의 등장은 꼭 이런 식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만 고집합니다. 자기 잘남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계속 이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동은 도리어 구세주를 더욱 고통스럽게 할 뿐입니다. 

유다가 며느리로 인하여 회개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철없는 죄로 인해 누가 피해를 봤는지 그 분 앞에서 진정 회개해야 합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유다의 본 처인 수아의 딸은 빠져 있습니다. 

그 대신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와있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드디어 아예 유다 족보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원래 유다가 의도한 것과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주도권은 유다가 아니라 도리어 다말에게 있었습니다. 다말은 쌍둥이를 가지게 됩니다. 산파는 먼저 손 내민 자식이 먼저 나오는 줄 알고 얼른 붉은 줄을 손목에 묶었습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그 자식을 제치고 뒤에 있는 아이가 먼저 나왔습니다. 그 아이가 바로 베레스입니다. 

이와같이 출생에 있어 역전되는 것은 다말에 의한 출산이 단순히 다말 개인적인 계획이 아니라 에서를 제치고 장자로 역전된 야곱의 경우와 동일한 하나님에 의한 축복의 산물인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축복의 밑바탕에서 창녀짓까지 해야 했던 다말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말의 신앙 

다말은 시아버지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즉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자기는 비록 가나안 여인이지만 자기 자녀만은 하나님의 역사의 대역에 끼우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자녀를 원했다면 다말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임신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시동생, 시아버지를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자녀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손의 씨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순간의 쾌락으로 죄를 지었지만 체면을 생각 않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한 유다의 용기와 기회가 주어졌을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기를 원하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는 다말을 통하여 예수님이 오게 하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나라를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기 생에 있어 고통받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대들고 따지게 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아픔을 진정 아시기나 합니까?"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철없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우리들보다 더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인생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에 비하면 그것도 축복이요 은혜입니다. 

가나안여인과 시아버지의 불륜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신 우리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크신 일을 이루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부디 자신의 고통만 알지말고 예수님의 고통을 먼저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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