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1-6)

첨부 1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1-6) 


지난 주 오대산에서 한미준(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이 주최하는 부목사 부부 수련회가 열렸습니다. 준비하는 스텝을 포함하여 약 200여명이 참석한 아주 좋은 수련회였습니다.

13명의 강사가 13개의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번 수련회의 강사들을 보면 대개 한 사람이 전체 수련회를 다 인도해도 되는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강사 13명이 강의를 한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모임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코스타입니다.

저는 이런 수련회를 개인적으로 참 좋아합니다. 많은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수련회 너무 좋았습니다. 강의가 너무 좋아서 아이패드를 가지고 현장에서 그것을 노트하여 페이스 북에 실시간으로 올렸습니다. 뜻밖에 많은 분들이 그것을 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반응을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강의가 다 좋았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선한목자교회 유기성 목사님의 강의가 좋았습니다. 너무 좋았습니다. 유 목사님에게 주어진 강의 제목은 ‘목회자의 위기와 극복’이었습니다. 

만일 저에게 그와 같은 제목의 강의가 주어졌다면 저는 아마 목회하면서 목회자들이 격는 구체적인 위기들을 열거할 겁니다. 예를 들면 돈, 이성, 절망, 교만, 나태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 유 목사님은 그런 이야기 하나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목회자의 위기는 어디서부터 오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단 한 마디로 답을 해 주었습니다. 답은 ‘주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다시 말해 ‘믿음이 없어서’였습니다. 잘못 들으면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는데 그냥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강의가 시작 된지 10여 분 정도 지났을 때였는데 제가 노트를 하면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 아 좋습니다. 그냥 여기서 강의 다 끝내도 아무 문제없겠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하냐? 위기는 예수님 한 분으로는 충분해 하지 못 하는 데서부터 온다. 역시 유 목사님입니다.)

막내 손녀 국희가 이제 14개월이 되어 옵니다. 요즘 국희 재롱 때문에 즐겁고 행복합니다. 어느 날 거실에서 가족들이 함께 귤을 먹고 있었습니다. 국희의 손에도 귤이 들려 있었습니다. 국희가 귤을 아주 좋아합니다. 제가 입을 벌리고 ‘할아버지 아~’하면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제 입에 귤을 넣어 줍니다. 그것이 재미있어서 자꾸 그랬습니다. 그런데 한 번도 머뭇거림이 없이 제가 달랄 때마다 귤을 제 입에 넣어 줍니다. 국희에게 귤이 다 떨어진 것을 모르고 제가 또 ‘할아버지 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국희가 자기 입 속에 있는 귤을 꺼내어 주었습니다.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귤을 좋아하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 싫습니다. 그런데 우리 국희는 자기 입에 있는 귤까지 제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욕심 부리지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고 제 입에 있는 것까지 빼서 제게 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국희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어떤 믿음인 줄 아십니까? 제 입 속의 귤을 할아버지 주어도 할아버지가 계속해서 자기에게 귤을 줄꺼라는 믿음이었습니다.

다윗은 오늘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좋아하는 시편 23편에서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동물의 왕국과 같은 것을 보면 동물들이 무엇을 먹을 때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일 우두머리는 천천히 먹습니다. 그러나 우두머리를 빼고는 모두가 다 허겁지겁 먹습니다. 대개 씹지 않습니다. 그냥 삼킵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도 보면 식사 속도가 거의 광속(?)에 가깝습니다. 개들도 거의 씹지 않습니다. 약한 동물의 본능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강아지 때 보면 빨리만 먹는 것이 아니라 정말 배가 터지도록 먹습니다. 그게 동물의 본능입니다. 만일의 때를 위하여 있을 때 무조건 많이 먹어 두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자라면서 늘 때마다 먹을 것이 주어지면 그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부모에게 버림 받아 고아원과 같은 곳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서 그와 같은 약한 동물의 본성이 나타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 때문에 자기의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는 동물적인 본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하면 아이들이 참 불쌍합니다. 애처럽습니다. 마음이 아립니다. 그것은 아이들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특별히 사랑을 곱빼기로 주어야 합니다. 무의식 속에 있는 불안함을 제거해 주어야만 합니다. 자신의 존재가 불안한 사람은 남에게 불안을 줍니다. 그래서 세상이 온통 불안해 지게 됩니다. 불안에서 욕심이 옵니다.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으니까 빨리 먹고 많이 먹는 것입니다. 자기 입 속의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입 속에 있는 것까지 빼앗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 먹지도 못할 것을 쌓아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희는 무의식 속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온 가족으로부터 감당 못할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배가 고플 사이도 없이 엄마가 알아서 젖을 줍니다. 기저귀 젖어 울면 기저귀를 갈아 줍니다. 하루 종일 자기만 바라보고 놀아 줍니다. 안아 줍니다. 웃어 줍니다. 별것 아닌 일에도 온 가족이 환호하며 박수칩니다. 그런 행동을 통하여 아이에게는 basic trust 라는 것이 생깁니다. 

이것이 아이를 건강하게 하고 세상을 건강하게 합니다. 그 건강함 때문에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는 것인데도 할아버지가 달랄 때 별로 고민 없이 주는 것입니다. 입 속에 있는 것까지 빼어 주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우리 목회자들도 목회를 욕심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를 욕심으로 하면 반드시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유기성 목사님은 그 모든 목회의 위기와 그 위기의 원인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해 하지 못하는 불신에 있다고 지적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니 자꾸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입니다. 옆의 교회야 죽든 말든 (표현이 너무 지나쳤습니다) 버스까지 동원해서 교인들을 자기 교회로만 실어 나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늘어나면 또 땅을 사고 건물을 짓습니다. 그리고 새로 지은 큰 예배당을 채우기 위하여 또 교인 욕심을 부립니다. 마치 재벌이 체신 머리 없이 동네 골목 상권까지 넘보며 들어오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자는 절대로 자기가 먹을 만큼 외에는 사냥을 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약한 동물들이 씨가 마르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약한 동물이 살아남기 때문에 사자도 살아남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재벌들을 그것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있는 힘껏 사냥만 합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욕심껏 사냥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서민들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죽습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들도 나중에 죽게 될꺼라는 사실을 저들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 1,200만 성도 운운하던 한국 교회가 불과 십 여 년 만에 거의 그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같이 큰 교회들은 그러한 현실을 피부로 느끼지 못합니다. 멀리 내다보면 작은 교회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어야 큰 교회들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이 있다면 욕심을 부리고 작은 교회의 아픔과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그냥 자기교회만 부흥시키고 성장시키려고 하다보면 나중에 큰 교회들도 어려움을 격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큰 교회가 더 어려움을 격게 될 것입니다. 어려울 때는 몸집이 작은 것이 버티기에 좋습니다. 어려울 때 몸집이 크면 위험합니다. 그럴 때가 곧 올 겁니다.

재벌과 대형교회들이 문어발 확장을 하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욕심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재벌이 믿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저를 비롯한 큰 교회의 목회자들이 제일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소명을 가장한 야망입니다. 남을 속이기도 하고 또 스스로 속기도 하지만 많은 큰 교회의 목회자들이 저를 포함하여 소명을 가장한 야망에 빠지기 쉽습니다.

유 목사님의 진단에 따르면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하지 못해서 그런 겁니다. 쉽게 말해서 믿음이 없어져서 그런 겁니다.

재벌이 되면 행복할까요? 대형교회 목회자가 되면 행복할까요? 그것이 정말 성공한 것일까요? 소명을 가장한 야망에 속아 잘못 목회하면 훗날 예수님 앞에 섰을 때에 예수님이 알아 보시지 못하실 겁니다.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고 말씀하실 겁니다. 그리고 그건 둘째 치고 성공한 줄 알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시편은 정말 기가 막힌 다윗의 신앙간증입니다.

다윗의 삶은 한 마디로 부족함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다윗의 시편 23편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로 시작하여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고 끝이 납니다.

다윗은 부족함이 없는 자신의 삶은 시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 영혼의 소생, 언제나 옳은 길로만 가는 축복,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언제나 건짐을 받는 은혜, 상을 받아도 꼭 원수 앞에서 받게 되며 그 상도 보통 상이 아니어서 마치 머리부터 발 끝까지 기름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은 상을 받게 됨 등등입니다.

그러니 부족함이 없고, 삶의 잔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엄청난 축복의 표현들이 단 한 말씀에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시편 23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장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시편 23편 1절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입니다.

다윗의 시편 23편은 한 마디로 자기는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아주 특별한 결혼식을 주례했습니다. 저희 교회 청년 결혼 주례였습니다. 신랑 신부가 자기들의 결혼식 컨셉을 ‘착한 결혼식’으로 잡았습니다. 제가 작년 제 환갑을 이용(?)하여 인도 메리완네스라는 병원 후원 모금을 하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서 축의금을 받아 병원에 후원하는 것을 보고 결혼식을 오후 1시부터 오후 7시까지 하였습니다. 물론 예식은 한 시간 정도에 끝냈지만 결혼예식 후에도 신랑 신부가 계속 하객들을 맞았고 축의금을 저희 열매나눔재단과 아름다운 재단 그리고 또 어느 환경재단에 기부하게 하였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 초창기 때 청년 하나가 결혼식을 하고 신혼여행을 다일공동체 밥퍼 현장으로 갔습니다. 신혼여행비로 노숙자 일주일 식사비용을 대고 돈만 댄 것이 아니라 신혼부부가 일주일 내내 그곳에 가서 식사준비를 하고 배식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아 돌잔치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제가 그것에 감동을 받아 제 큰 손녀 민희의 돌을 다일공동체에서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것이 훈련이 되어서였는지 둘째, 셋째 돌을 다 해주지 못했습니다. 한 아이의 몫은 캄보디아 선교사에게, 또 한 아이의 몫은 말라위 사역에 보냈습니다. 몇 주 전에도 우리 교회 청년 하나가 결혼을 하면서 축의금의 절반을 열매나눔재단 후원금으로 내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면 다른 욕심이 줄어듭니다. 저희 아이들도 결혼 할 때 그렇게 하였습니다. 막내아들 결혼 때 막내 아이가 결혼 비용을 줄여 러시아 선교사님 차를 사드리고 싶어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하였습니다. 큰 아들 결혼 때도 그렇게 했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대신 자신들의 결혼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조금, 아주 조금 초라해 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화려함으로 폼 잡을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만족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젊은 청년들이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고 기쁩니다. 그런 청년들을 보면 저는 갑자기 저를 자랑하고 싶습니다. 제가 저런 청년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라는 것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아마 어제 결혼한 친구들 축의금 다 후원금으로 내어 놓고 자기 돈으로만 결혼식을 해야 했으니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조금 초라한 결혼이 되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절제하지 않고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절제를 초라함으로 보지만, 우리는 그것을 성령의 은사로 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은사 수준의 근사함입니다. 저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 높은 뜻 교회를 중심으로 새로운 기독교의 결혼 문화, 회갑문화, 돌 문화로 발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조금씩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성경의 말씀이 마음에 깊이 와 닿습니다. 요즘 계속 설교하는 주제가 ‘믿음’이라는 거 여러분 아시지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말씀이 그렇게 마음에 잘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면 모든 일이 끝납니다. 아무리 주여, 주여 하여도 결국 하나님이 안 믿어지면, 다시 말해서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반드시 쓸데없는 짓을 해야만 합니다. 쓸데없는 욕심을 부려야만 합니다. 어리석어 져야만 합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면, 부족함이 없으면, 삶의 잔이 넘치면 우리 국희처럼 입에 있는 귤도 빼서 달라는 사람에게 줄 수 있습니다. 다윗처럼 부족함이 없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그의 영이 새로워지고, 맑아지고 깨끗해 져서 하나님과의 대화가 깊어지고,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지는 때를 당하여도 천하태평으로 두려움 없는 평강의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원수 앞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듯 쏟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상을 받고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예수입니다.

여호와로 정말 나의 목자 삼으면 다른 것들은 있으면 좋고 얻어도 아무 문제 없는 그저 그런 것들이 되고 맙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는 찬송을 자신의 고백으로 찬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믿음으로 다윗처럼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의 잔이 넘칩니다 고백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동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