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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소원 (빌 2: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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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소원 (빌 2:12-14)
 
범죄 심리학에 의하면 일반 시민들이 위험에 마주쳤을 때 직감보다는 예절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예절교육이 자기보호본능을 억누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위험을 느끼지만 상대방에게 무례하게 행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자기의 직감을 좇으면 훨씬 안전할 텐데 왜 남에게 무례한 것을 그렇게 싫어할까.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받은 교육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남에게 무례하지 말아라 자기의 느낌을 부인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사람들이 직감적으로 누구를 싫어하는 감정을 가질 때 그 감정이 정확할 수 있는데 의식적으로 그것을 억누르는 훈련을 한다는 것입니다. 싫은 감정을 무시합니다. 무엇인가가 싫은 느낌이 들 때 민망하게 생각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그것을 억누릅니다. 사실 싫은 감정이 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우리가 억누르도록 훈련받은 것은 싫은 감정뿐만이 아니고 좋은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난다거나 호감이 갈 때 그것을 따르기 보다는 절제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자기 느낌을 표현하는 것을 점잖지 못한 것으로 여깁니다. 경우에 맞지 않은 것으로 배웠습니다. 예배 중에 신이 나도 박수를 치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점잖지 못하고 경우에 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소나타를 들을 때 2악장은 항상 느리고 지루합니다. 왜 그럴까. 그래야 되기 때문입니다. 원래 소나타는 세 개의 악장으로 돼 있는데 두 번째 악장은 좀 자기를 절제하고 느린 그런 식을 따라야 됩니다. 그래서 연주자들이 보통 2악장을 건너뜁니다. 그게 잘하는 것입니다. 싫으면 안하면 되는 것인데. 

말기 암환자들을 대상으로 죽음을 앞두고 후회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조사해봤더니 가장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는 것은 좀 더 내 뜻대로 살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의 시선, 남의 기대를 의식하느라 자기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남의 생각을 의식하느라고 진짜 삶을 살지 못하고 가짜 삶을 살았다…. 실제 대다수 사람들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남의 눈에 드는 삶을 살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하나님의 뜻 때문에 고민을 했다면 후회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좋은 분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인간의 불신과 무지함은 하나님을 그 반대의 경우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이 좋으시다는 말은 신학적인 고백에 불과하고 실제 사람들의 생각은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일은 괴로운 일이에요. 괴로울수록 경건한 것입니다. 만일 즐겁다면 그것은 경건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이렇게 노래를 부르면서 왜 사람들이 더 많이 교회에 오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당연하지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고 하면서 고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좋은 것은 맛이 없다. 맛이 있다면 그건 나쁜 것이다. 즐거운 것은 죄다. 경건한 것은 당연히 괴로운 것이다. 이게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고 사도바울은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을 육신을 거스리나니’라고 말했습니다. 옛날부터 하나님을 좇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수녀원에 들어가서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 본능을 억제하고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에 경건함 거룩함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은 좋으시다는 사상이라든가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이라든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말씀이라든가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말씀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기쁨도 아니고 설렘도 아니고 죄의식입니다. 하나님을 좇고 따르는 일은 우리가 좋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고 마지못해서 하는 것이고 안하면 벌을 받을 것 같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명설교가였던 스펄전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만일 지옥이 없다면 우리는 기도할 필요도 없고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으며 예배당은 유흥장으로 바꾸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저는 스펄전과 생각을 달리합니다. 첫째는 그럼 유흥장에 가는 모든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얘기냐. 스펄전은 평소에 유흥장에 그렇게 가고 싶었느냐. 지옥이 없다면 예배당을 유흥장으로 바꿔야 된다니, 그럼 스펄전은 지옥 때문에 유흥장에 가고 싶었는데 못 갔다는 얘기냐. 

둘째로 스펄전이 그렇게 하나님을 섬겼던 이유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냐. 그게 이유였느냐. 그렇다면 그건 잘못된 동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선행을 했다든가 기부를 많이 했다든가 봉사를 했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 사람을 존경하지요. 우러러봅니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어려운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이 하기 어려운 일을 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본인이 즐거워서 이 일을 했다고 말한다면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설마,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좋은 일은 힘들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직업을 분류하면 비영리사회봉사직입니다. 비영리사회봉사. 좀 이상합니다. 저는 그 분류가 실감이 가지 않습니다. 비영리까지는 맞는데 봉사는 원래 우리 생각대로라면 힘든 일, 어려운 일을 의무적으로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나 저는 이 목회를 의무감에서 하는 게 아니고 이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하고 이것밖에는 하고 싶은 일이 없기 때문에 합니다. 그래서 누가 저의 직업을 성직, 봉사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좀 민망합니다. 내가 이 일을 좋아서 한다는 티를 내면 안 되겠구나. 억지로 하는 것 같은 시늉을 해야겠구나. 마지못해 하는 것 같은 시늉을 해야 사람들이 아, 저분 존경한다 이렇게 말하지 그게 아니고 이 일을 좋아하는 티를 내면 저분은 봉사가 아니고 자기가 좋은 일을 한다 이렇게 싫어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를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오래 인류를 보아 오셨는데 인류를 모르실 것 같습니까. 자식을 키워본 부모도 자식을 아는데 인간을 만드시고 이제껏 지켜본 하나님이 사람을 모르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강요하심으로 우리가 그 뜻을 따르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루라도 그게 가능할 것 같습니까. 우리처럼 권위주의적인 문화와 또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민족은 그렇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만일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강요하심으로 따르게 하신다면 그건 하나님도 괴롭고 사람도 괴로운 것입니다. 

요즘에는 부모는 사라지고 학부모만 있다고 하지요. 그 말이 시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 되신 분들, 여러분이 부모인지 학부모인지 분별해야 됩니다. 부모는 사라지고 학부모만 있다는 말은 부모가 자식을 모든 면에 있어서 키우는 역할이 아니고 공부를 시키는 것을 자신의 주된 임무로 생각한다는 얘기에요. 부모의 역할이 학부모의 역할이 돼버렸다는 얘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에게 하는 말은 늘 똑같은 말입니다. 숙제 했느냐, 성적 나왔느냐, 시험 언제 보느냐, 이 말 이외에는 자식에게 할 말도 없고 그래서 대화가 점점 재미가 없어지고 대화가 점점 의무적이 되고 서로 괴로워지는 것입니다. 이게 누구의 잘못이냐. 우리 모두의 잘못이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괴롭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이 괴로운 것뿐이라면 신앙생활이 괴로워요. 힘들어요. 그건 뭐가 잘못됐다는 얘기입니다. 그 말은 회개할 기회가 많다는 뜻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왜곡하고 있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방식을 잘못 알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을 잘못 알고 있습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얘기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좋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나쁜 하나님으로 매도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뜻은 도덕적으로 선하다는 뜻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좋으시다는 말은 우리에게 좋으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좋은 뜻을 갖고 계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좋아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괴로워하게 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일을 좋아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에게 기쁨이라는 것은 사라졌다고 봐도 좋습니다. 기쁨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쁨은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합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쁜 사람이 없어요. 청소년도 기쁘지 못하고 직장인도 기쁘지 못하고 가정주부도 기쁘지 못한 상황에서 어찌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이 의무감에서 비롯되지 않습니까. 학생들은 의무감 때문에 학교를 다니고 직장인은 의무감 때문에 직장에 다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의무감 때문에 교회에 다닙니다. 모든 것은 의무감에서 비롯됩니다. 해야 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우리 사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생각처럼 진실로부터 먼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유레카 모멘트가 필요합니다. 깨닫는 순간이 필요합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외친 것처럼 우리에게도 깨달음의 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밖에서 우리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입니다. God in us christ in us.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목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하나님에게만 기쁜 뜻이 아니에요. 하나님에게만 기쁘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기쁘신 뜻은 우리에게도 기쁜 뜻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이런 질문을 저는 자주 듣는데 사람들은 마치 신비의 세계를 더듬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 줄로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예언을 받고 계시를 받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하나님의 뜻을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기대하지 않던 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안에 솟아나는 소원을 통하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설마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으랴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찾고 찾아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 우리 마음속에 솟아나는 소원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아마 여러분 중에 ‘목사님, 저는 지금 담배 한 대 피웠으면 좋겠는데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소원과 욕망은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했지 우리의 소원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내 소원이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뜻을 소원을 갖고 행하게 하십니다. 아마 담배를 피고자 하는 사람도 그 마음속에 우러나는 소원은 담배를 끊었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소원을 깨닫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도둑질을 하면서 사는 사람도 소원을 말하라고 하면 ‘이 짓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자식은 이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자식들에게는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테러리스트가 되지 말고 서방세계에 가서 넓게 배우고 자유롭게 살라고 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맞습니까. 그런데 그게 자기의 소원이었어요.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야 진정한 소원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는 중에 자기 마음속에 어떤 소원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내 입에서 평소에 쓰지 않던 단어가 나오면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내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던 단어가 입에서 나올 때 그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말을 하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싸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소원을 두고 당신의 기쁘신 뜻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우리도 기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주 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소원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기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으로부터도 멀어진 것입니다.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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