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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빈 그릇을 준비하라 (왕하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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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릇을 준비하라 (왕하 4:1-7)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Theodor Jaspers, 1883-1969)가 한 말 중에 ‘한계상황’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는 상황들 가운데서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이 있는데, 야스퍼스는 그것을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예를 들어 질병이나 죽음과 같은 것이 한계 상황입니다. 우리 힘으로 질병을 거부할 수 없고, 죽음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한계상황에 직면하면 우리는 심한 절망과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보면 기적의 선지자 엘리사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던 신학생 한 사람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사인(死人)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졸지에 남편을 잃은 부인이 엘리사 앞에 달려와 울부짖습니다. “선생님의 제자였던 제 남편이 죽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사람은 정말로 주님을 온전히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자, 빚쟁이가 찾아와서 남은 두 아들을 노예로 삼기 위해 끌고 가려고 합니다. 어쩌면 좋습니까?” 남편은 신학생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온전히 잘 섬기던 신실한 일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이처럼 졸지에 과부가 된 이 여인에게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아픔이 있었습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어버린 것 때문에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있었습니다. 둘째, 주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한 그런 신실한 종을 그토록 일찍 데려가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왜 평생을 당신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한 그 사람을 데려가셨습니까?” 그러나 이 불행한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잠길 여유도, 하나님 앞에 매달려 따질 여유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빚쟁이가 찾아와서 남은 두 아들마저 노예로 삼기 위해 끌어가려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이 여인의 가장 쓰라린 세 번째 아픔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가혹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혹한 현실 앞에서 이 여인은 너무나 연약하고 무능했습니다. 도저히 이 문제를 풀어갈 방법도, 능력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순간에,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신앙인이 문제 있을 때, 마지막이든 처음이든 하나님의 종을 찾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습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핏 "신앙적인 문제라면 몰라도 금전 문제, 경제문제인데, 주의 종에게 찾아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 분이 있다면, 그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볼 때, 목사가 세상 물정 모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짜 다급해 보세요. "목사님! 저의 가정이 여차여차히 어려우니 위해서 꼭 기도해 주세요"  "목사님, 아이들이 속 썩여요. 정말 기도해 주세요".  "사업이 위기에 봉착했어요. 저희 남편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만날 때마다 매달리는 분이 있습니다. 그런 분은 주의 종을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맺어준 기도의 통로요, 축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로 활용할 아는 참 지혜로운 신앙인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본문은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모습으로 서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대단히 귀중한 교훈입니다. 

1. 오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는, 항상 막다른 상황에 처한 심정으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되면 어떻게 합니까?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문다고 했습니다만, 사람의 경우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부닥치면, 만사 포기해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망하고 마는 사람이 있고, 그런가 하면, 죽지 않겠다고 발악하는 사람, 원망하는 사람, 불평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때 우리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첫째 -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요, 

둘째 - 하나님만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여기 1절을 보십시오.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여기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이 말은 단순히 인간 엘리사에게 부르짖는 행위가 아닙니다. 

당시 하나님의 종에게 다가 왔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 ‘부르짖어 가로되’는 히브리어로 ‘케라’(kera)라는 단어입니다. 특별하고 간절하게 마음을 쏟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겨은 보통은 "Call unto me"(나를 불러라)로 번역하지만 어떤 영어 번역은 우리 말 번역처럼 "Cry out to me"(내게 울며 부르짖어라)로 옮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바로 그렇게 울부짖어 기도할 때가 아닌가요? 정말 이상한 일은 신앙인 가운데 소소한 일상에서 어느 정도 기도를 실천하면서도 정말 어려운 한계 상황에서는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서새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합니다. 아프리카에서 많이 서식하는 secretary bird가 있습니다. 이 새는 상당히 높이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날개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위험이나 어려움에 직면하면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땅을 기다가 붙잡히는 그런 새입니다. 제가 우리 청년들과 싱가폴의 어는 동물원에서 이 새를 실제로 목격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는 약 10분 이상 이 새를 관찰하며 이제나 저제나 나를까를 고대했지만 날개를 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막 발걸음을 돌이키자 비로소 날개를 펴고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날아야 할 때 나르지 못하는 비서새-그것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로 현실을 넘어서서 살라고 기도의 날개를 주셨는데 언제 기도의 날개를 펴 보셨습니까? 왜 기도하지 않으시나요? 지금이야 말로 기도할 때가 아니신가요? 그냥 기도할 때가 아니라 부르짖어 기도할 때가 아니십니까? 

며칠 전에 우리나라 최고의 설교가 중에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남포 교회의 박영선 목사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회실에서 차를 나누는데 목사님이 자신의 요즘 목회 생활의 아픔을 이야기를 합니다. 멀리서 볼 때는 그렇게 당당하시게 목회를 하던 분도 얼마나 큰 상처가 있는지 몇 날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겉모양으로만 봐 가지고는 그 삶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졌고 남 보다 행복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속에 어떤 슬픔이 담겨있는지. 또 가슴 깊은 곳에 어떤 아픔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지를 사람들의 겉모습만 봐 가지고는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앞문은 굳게 닫고 오십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도 제가 봐도 괜챦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모습뿐이지, 그 삶의 옆문이나 뒷문으로 들어가 보면 어느 가정, 어느 개인 할 것 없이 예외 없이 깊은 탄식과 자기 연약함과 죄의 상처와 자기만의 안고 있는 삶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견딜 수 없는 상처와 절망감이 있습니다. 정말 이제는 여러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려 놓을 때가 아닙니까? 
  
이 아침!! 묻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이가 누구십니까? 렘33:2절에 보면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하나님은 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는 여호와’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행하심’, ‘만드심’과 ‘성취하심’은 모두 창조 사역과 관련하여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그는 창조주로서 또한 약속한 바를 반드시 만들어 성취하시는 신실하신 여호와이십니다. 본문 2절에 그가 이런 신실하신 인격적인 여호와이심을 여호와라는 이름을 세 번이나 사용하며 강조합니다. 바로 그 분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기도는 반드시 응답입니다. 

2. 두 번째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교훈은,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데는 '믿음의 불씨'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여인은 지금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남편은 죽고 남은 것은 빚더미뿐이었습니다. 채무로 인해 두 아이가 종으로 팔려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이토록 무자비할 수가 있을까요? 이 때에 엘리사가 여인에게 묻습니다.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여인이 말하기를, "계집종의 집에는 한 병 기름 외에 아무 것도 없나이다" - 오로지 있는 것이라고는 기름 한 병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기름 한 병 - 그것이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 목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것을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그냥 엘리사를 통해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시듯 갖은 물질과 양식을 쏟아지게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분이 그런 일을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여인에게 "네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기름이 한 병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 기름 한 병을 하나님 앞에 내 놓으라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은 ‘내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은 최선을 다해 살아온 삶의 결과가 무엇인가 하고 묻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모세의 손에 들려진 것은 지팡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어떤 사람입니까? 
  
한 때, 그는 애굽의 왕자로 장차 세계를 다스릴 자리에까지 이를 유력자가 아닙니까? 앞으로 애굽을 포함한 근동지방을 통치할 만한 능력과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역사를 분석해낼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진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했던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민족을 위해 힘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민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기 생명하나 건지기 위해 왕궁을 떠나 광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잠시의 피난인 줄 알앗지만, 광야에서 4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모세 역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양을 치는 목자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처절하리만큼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을 모두 이 광야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활동무대는 더 이상 왕궁이 아니었고, 고상한 인격과 세계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 민족을 이끌고 나갈 수 있기 위해 받은 훈련들이 이 광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단지 좋은 목초지가 어디 있는지를 살피고, 어린양의 울음소리에 긴장하고 달려가야 하는 평범한 목자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모세가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삶의 결과는, 자기의 꿈을 묻은 광야와 목자의 상징인 지팡이 뿐이었습니다. 
  
벳세다 광야에서 발생한 오병이어의 기적이 거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었습니까? 한 꼬마 어린이의 도시락 속에 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 참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어린이의 전부였습니다. 그 어린이는 그것을 바치고 나니, 아무 것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코 묻은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 없으시면 아무 일도 하실 수 없는 분이셔서 그랬습니까? 그것은 '믿음의 불씨'였습니다. 그 믿음의 불씨가 예수님 앞에 바쳐져 축복 축사하심을 받을 때, 기적의 불씨가 되어,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 남는 축복의 잔치가 벌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마중물을 아십니까? 제가 얼릴 때만해도 지금은 없지만 동네마다 펌프물이 있었습니다. 펌프질만 하면 한 여름철에도 시원한 지하수를 마실 수가 있어서 여간 좋은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펌프 물 곁에 항상 그릇이 있는데 거기엔 물이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마중물입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펌프질을 하다 나두면 아무리 펌프질 해도 물이 안 나와요. 

왜냐하면 외부에서 공기가 들어가서 펌프에 물이 빠집니다. 그러면 아무리 펌푸질을 해도 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때를 위해서 항상 함지박에 물을 담아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중물’입니다. 지하에 깊이 고인 맑고 깊은 샘물을 데려오기 위해 마중 나가는 첫 물을 일컫는 우리말입니다. 이 물을 영어로 calling water, 즉 ‘부르는 물’이라고도 합니다. 마중물은 매우 소중한 역할을 합니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마중물을 마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시원한 물을 더 이상 마실 수 없습니다. 마중물은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지금 당장은 눈에 물이 보이지 않아도 마중물을 펌프에 부으면 샘 깊은 곳에 고여 있는 물을 퍼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중물의 사명입니다. 여기 한병 기름은 이 집안에 남은 마지막 유일한 재산입니다. 이-마트에서 올리브유 한 3만원 정도 이것 밖에 이 여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한병 기름을 믿음의 불씨로 일으켜서 마중물 역사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다 잃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래도 무너진 잿더미 아래에서 남아 있는 것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세요. 그것을 발견했다면, 바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과 다시 함께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가운데 나에게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분 있습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왜 나에게 아무 것도 없습니까? 우리에게는 선물로 받은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그 작은 '믿음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것이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3.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셋째 교훈은, 그릇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순종입니다. (파스칼) 왜 우리가 그릇을 준비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그릇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기름 한 병을 가지고 나온 여인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밖에 나가 모든 이웃에게서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만 빌리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빌리라" 했습니다. 왜 빈 그릇을 빌리되 되도록 많이 빌려오라고 했을까요? 그 빈 그릇에 한 병 남은 기름을 가득 채워준다는 암시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이 그릇을 우리의 꿈이요 비전이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신앙의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누구도 이유없이 쓸모없이 부르신 분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이루시고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목표가 보이면 신앙생활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목표가 보이면 빈 그릇을 준비하는 일이 기쁘고, 그 그릇이 채워지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어느 누구나 잘 살면서 잔치하기 위해 부족한 그릇을 빌리러 다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남편 죽고 빚만 잔뜩 졌는데 그것도 빚 때문에 두 아들을 종으로 팔아 넘겨야 할 처지에 있으면서 그릇을 빌리러 돌아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 여자 이제 돌았구먼 빈 그릇을 빌려 가지고 무얼 하려고 저러나?" 하는 눈총을 받을 만 했을 것입니다. 여인은 처음에 무슨 영문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금방 엘리사 선지자의 말뜻을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과 함께 온 동네방네 다니며 빈 그릇이란 빈 그릇은 몽땅 빌려 왔습니다. 
  
여기 5-7절을 보십시오.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여기 “문을 닫고”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외부의 인간의 힘을 바라지 않은 자세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은총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랄 때 나타납니다. 

이렇게 빈 그릇을 준비해 오자, 이번에는 방에 들어가서 한 병 밖에 없는 기름을 그 그릇들에 가득가득 쏟아 부라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됐습니까?... 그릇마다 기름으로 채어지는데, 병에서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빈 그릇이 없어서 더 이상 기름을 부을 수 없을 때까지 기름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 일을 보면서 그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기름 붓는 일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왜 그 일이 기뻤을까요? 하나님이 그들 속에 함께 역사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그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에게 나타난 일이 왜 오늘 '우리'라고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믿음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기를 막다른 골목에 선 듯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거기에 믿음의 불씨가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다면, 우리에게도 나타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잃은 자는 꿈을 잃어버린 자요, 꿈이 없는 자는 의미 없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우리들이 왜 신앙생활에서 실패하고, 왜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나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인생의 목표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잃어버린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고 낙심할 수밖에 없지만, 목표를 놓치지 않는 한, 승리와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다음 주부터 교회는 부흥회를 갖게 됩니다. 토미 테니(Tommy Tenney)라는 목사는 <갓 캐처스(The God Catchers)>라는 책에서 부흥을 태동시키는 힘을 ‘배고픔’이라고 정의합니다. 부흥을 일으키는 선구자는 훌륭한 설교자도 아니요 훌륭한 복음성가 가수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진정한 부흥을 태동시키는 선구자는 바로 우리의 ‘배고픔’이라고 말합니다. 부흥은 우리의 영적인 배고픔,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배부른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보고도 식욕을 느끼지 못합니다. 

반대로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보는 순간 입 안에 군침이 돌고, 먹고 싶은 갈망을 느낍니다. 부흥성회는 바로 영적으로 배고픈 자들을 위한 만찬입니다. 나는 영적으로 충만해서 더 이상 내 안에 부흥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참석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 안에 그런 분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이번 부흥회가 여러분의 신앙이 회복되기를 축복합니다. 무엇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고 또 그 분 앞에 나의 인생을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하는 사명의 회복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도록 여러분의 마음의 빈 그릇을 가지고 나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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