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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무 곳에서나 예배드리지 말라 (신 12:11-14, 요 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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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곳에서나 예배드리지 말라 (신 12:11-14, 요 4:20-21)

예배의 대상도 없고, 이름도 없는 신에게 제사하고 예배하는 불쌍한 인생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 주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오래전 제가 연동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새벽기도회 시간인데 어떤 부인이 기도하면서 흐느끼며 “아버지”를 연발하는데 너무 안타까워 저의 기도가 다 끝나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기다렸습니다. 그 분은 기도를 다 끝내고 나가면서 “룰루랄라” 신이 나서 나갔습니다. 저는 괜히 맥이 빠졌습니다. 괜히 혼자 속 끓이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주여, 이름만 불러도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만 불러도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시편 128:4에는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고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힘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살아 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도움을 받고, 그 이름에 예배하면 영혼의 쉼을 얻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제1세대 복음성가는 단순하기도 하지만 정감도 많습니다. 오래 전 복음성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 “예수 이름으로 예수 이름으로 승리를 얻었네”. 이 전에서 주의 이름을 불러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에서 주의 이름을 불러 병이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에서 주의 이름을 불러 문제가 해결받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에서 주의 이름을 불러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려야 합니다. 

신명기 12:14 상반절에는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라고 합니다. 이전에 13절에는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라고 합니다. 13절의 ‘아무 곳’이란 말과 14절의 ‘택하실 그 곳’이란 말은 서로 상반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을 강조하기 위하여 먼저 아무 곳에서나 제사를 드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주 귀한 손님이 우리 집을 방문한다는 기별이 왔을 때 ‘아무데서나 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저도 외국에 여행 중 어느 집을 방문하여 그 집의 ‘안방’을 차지한 때가 있었습니다. 귀한 분에게 근사한 대접을 하고 싶어 함께 식당에 가서 “뭘 드실래요?”라고 했는데 “아무 꺼나 먹지요”라고 하면 대접하는 편에서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무 꺼나가 아니라 제대로 주문해야 바른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귀한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인데 아무데서나 아무 꺼나 그냥 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예배의 정성을 보십니다. 
  
11절에는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이라고 합니다. 이전 성경 번역에는 “한곳을 택하실 그 곳”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기에 좋은 곳에 임의대로 제단을 쌓고 자기 방법으로 우상을 섬기던 이방 풍습과는 엄격히 구별된 상황에서, 구별된 선민 이스라엘에게서, 구별된 거룩한 이름이 찬양과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신명기가 기록될 당시는 광야 여행 중이므로 성막에서 제사하고, 정해진 곳이 없지만 가나안에 들어가 정착하게 되면 한 곳에서만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 한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질 유다지파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정해진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를 보세요. 홍해를 건너고 더 이상 애급 군대의 위협도 없고 완전히 출애굽에 성공했을 때 하나님은 “이제 성공했으니 빨리 제사부터 드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희가 사흘 길을 가서 나의 산에서 내게 희생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시지만 아무데서나 제사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제사는 정해진 장소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데서 아무렇게 예배드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배의 장소와 예전이라 불리는 예배방법이 필요합니다. 예배란 뜻의 라틴어 ‘라트레이아’(latreia)는 원래 ‘섬김’이란 뜻입니다. 공동체를 위해 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이 말이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의 섬김을 뜻하게 되었으며 곧 예배의식(liturgy)이란 단어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예배에서의 분명한 장소와 의식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단인 통일교의 교주 문선명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라는 곳입니다. 그런데 통일교에서는 그 곳을 성지로 지정하여 많은 돈을 투자하였습니다. 오래 전 제가 북한에 갈 때에 고려항공을 탔는데 제 옆에 어떤 일본인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계속 자그마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제목을 보니 ‘성지정주’였습니다. 통일교 교인인데 문선명 고향에 성지순례를 가는 중이었습니다. 문선명의 고향은 통일교인들에게는 성지입니다. 그들이 경배하는 곳입니다. 옳지 않은 것을 믿는 사람들도 아무데서가 아니라 그들이 경배해야 할 자리를 찾고 알고 있습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는 매년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성지순례를 갑니다. 성지순례를 그들이 말로 ‘하지’라고 하는데 그들은 ‘하지’를 신앙의 척도로 봅니다. 메카는 그들에게 거룩한 곳입니다. 전 세계 모스크의 제단은 모두 메카를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슬람 나라들을 가보면 길하고 관계없이 비뚤게 모스크를 지어 놓습니다. 제단이 메카를 향해야 하기 때문에 길에서 벗어나도 모스크는 건축합니다. 무슬림들이 하루 5번 참배할 때도 메카를 향하여 엎드립니다. 이방종교 예배의 정성에 비하면 우리가 오히려 모자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정성을 보시지만 장소도 따지십니다. 
  
신명기 4:29에는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고 합니다. ‘거기서’가 어디입니까? 가나안입니다. 약속한 거룩한 땅입니다. 성전이 건축될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리라고 하십니다. 
  
청교도들은 “왜 예배에 빠지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니까요”라고 대답한답니다. 우리교회에서 주님을 꼭 만나기를 바랍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 워싱턴의 어느 교회에 어느 교인이 와서 안내하는 집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대통령이 참석합니까?” 그 때 집사님이 대답했습니다. “글쎄, 대통령이 올지 안 올지는 몰라도 주님께서 참석하실 것은 확실합니다”. 주님이 반드시 계시는 교회, 주님이 응답하시는 예배에서 주님을 꼭 만나기를 바랍니다. 
  
텔레비전을 보니 경기도 포천의 금룡사 뒷 절벽에 어느 할머니가 딸의 병을 고치려고 아주 오랫동안 천개 가까운 작은 불상들을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들은 아무데나 바위를 깎아 불상을 세우면 됩니다. 그 정성이면 뭐든지 이룰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우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아무데서나 말고 반드시 하나님의 전에서 드려야 합니다. 
  
요즘은 이동성(mobility)과 일회성(disposability)이  발달하여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왔다 갔다 하고 뭐든지 오래 쓰지 않고 한 번 쓰고 버리는 것이 많습니다. 자연히 사람들의 머릿속에 교회도 내 교회라는 개념보다 아무 교회나 가고, 필요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유개념보다 대여개념이 발달하는 시대입니다. 이런 사고는 자연스럽게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을 통하여 예배드릴 수 있다고 행각하고 이런 것들이 예배장소를 대신합니다. 텔레비전에나 라디오나 인터넷을 통한 예배도 괜찮다는 것은 자기만족의 예배입니다. 예배는 자기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케 해 드리는 행위입니다. 교회를 대신할 어떤 곳도 예배장소가 아닙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이 예배할 곳은 다른 교회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연동교회교인이기 때문입니다. 연동교회 교인은 꼭 연동교회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결론 

광림교회 원로목사님이신 김선도감독의 어머니 이숙녀전도사님이 쓰신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라는 책에 보면 감리교 김충식감독의 이야기가 잠시 나옵니다. 김충식감독은 어린 시절에 경기도 가평이 고향이었는데 17세 때 수십 리를 걸어서 사경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 당시 어른들은 자기가 먹을 쌀자루를 매고 갔습니다. 일주일 동안 매일 그 먼 길을 걸어서 현재 수동교회인 입석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옛 신앙의 어른들은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드리는 것을 생명처럼 여겼습니다. 아무데서나 예배하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걸어서 낮 예배에 참석하고 다시 집에 갔다가 또 한 시간을 걸어 저녁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이런 선조들의 신앙이 현재 우리교회의 뿌리이며 힘이며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드러내는 것이 참 예배입니다. 예배는 아무데서나 하는 것이 아니라 꼭 교회에 나오셔서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입니다. 혹시 늦잠을 자서 부지런히 교회에 와도 축도 시간밖에 못 참석해도 내 교회까지 오는 것이 예배의 의미입니다. 우리 교인들이 예배에 목숨을 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무데서가 아니라 우리교회로 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참 성도, 참 예배자가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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