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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삼하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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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삼하 9:1-8)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과 므비보셋이 나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제2대왕이고 므비보셋은 이스라엘의 제1대왕인 사울왕의 손자입니다. 본래 사울왕과 다윗은 장인과 사위 사이여서 한 때는 그 관계가 무척 좋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왕이 하나님을 떠나 제 분수를 모르고 교만해지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리고 악신까지 들리게 되자 다윗을 원수처럼 죽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물어야 합니다. 
왜 사울이 다윗을 죽일려고 했습니까? 사울은 다윗에게서 좋은 점을 찾지 않았습니다. 자기에게 미움이 될만한 것만 보았고 찾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은 사울에게 있어서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좋은 사위였습니다. 전쟁에 없어서는 안될 용맹스러운 장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정직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에게 있어서는 다윗이 자기 겉에 있다는 것은 축복이요, 유익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런 유익하고 좋은 것을 인하여 기뻐하거나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도리어 자기 겉에 다윗이 있음으로 인해서 자기에게 불리하고 나쁜 것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사울자신에게는 천천을 돌리는 것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결국 그래서 다윗을 미워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군사들까지 동원해서 손수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사울은 그래서 자기에게 축복이요 유익인 다윗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옛날에 어떤 목수 부자가 집을 건축하는데 아들목수가 일을 아주 날렵하게 잘하니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나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들목수를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아들목수가 지붕 꼭데기에서 일하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확 밀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면서 뒤를 돌아보니까 자기 아버지목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하는구나 생각되어서 그냥 땅으로 떨어졌는데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좋은 것을 인하여 생각하지 못하고 나뿐 것을 인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면 결국 그 결말이 이렇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28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거라사인 지방에 가셔서 무덤사이에 거하는 군대귀신 들린 자를 만났습니다. 그때 군대 귀신 들린 자가 예수를 알아보고 소리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님을 자신을 괴롭게 하려고 오신 분으로 인식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생활의 일부분을 괴롭게 생각하신적은 없습니까? 

어디 각부의 활동과 구역활동이 성도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서 생긴 것이겠습니까? 예배나 성경공부나 각종 모임들이 성도들을 괴롭히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올무이겠습니까? 기도,전도,각종 교훈들,이 모든 것이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보다 건강하고 보다 안전한 신앙생활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러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잘못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 자기를 미워하는 것, 자기를 괴롭게 하는 것, 그런 소극적이고 부정적이고 좋지 못한 것을 바라보기 보다는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인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그래도 좋은 점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아직도 남아 있는 긍휼을 봅니다. 한번은 사울왕이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잡으려고 들판을 헤매다가 피곤하여 어느 굴속에서 쉬게 되었는데 그만 깊은 잠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굴속에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숨어 있었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을 충돌질하기를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날에 일어나서 가만히 사울의 옷자락만을 베어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에 찔려 삼상24:5-7 에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윗은 할 수만 있으면 자신을 괴롭게 하는 사람조차도 한 가지만이라도 긍휼히 여길 조건만 있으면 긍휼히 여길려고 힘썼습니다. 99가지가 달라도 한 가지가 같으면 한 길을 가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다윗과는 달랐습니다. 99가지가 같아도 한가지가 다르면 죽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울 왕에게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요나단입니다. 다윗만 아니면 요나단은 아버지로부터 차기의 왕권을 물려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서에 보면 다윗과 가장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상 20:17에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하므로 그로 다시 맹세케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했고 삼하 1:26에서는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이 서로 나쁜 점만 보았다면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가 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만약 요나단이 다윗을 볼 때 "저 놈은 아버지의 원수요 나의 왕권을 빼앗는 자이다."  또 다윗은 요나단을 볼 때 "저놈은 나의 원수의 자식이요 저가 살아 있으면 언제나 나의 왕권이 위험하다."  이렇게 나뿐 것만을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원수지간도 가장 깊은 원수지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각각 하나님의 뜻을 보았고, 좋은 것을 보았고, 의로운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했기에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터에서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로 사울 왕도 그 아들들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제 2대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나서 제일 먼저한 것은 사울과 요나단을 죽게 한 불레셋 적군을 물리쳤고 다음에는 사울 집안의 남은 자를 찾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울 집안의 사람을 찾으면 내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그 남은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요나단의 아들이자 사울의 손자인 무비보셋이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사울의 손자에게 사울의 전 재산을 되돌려주습니다. 그리고 자기 왕자 중의 하나와 같은 권세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때 므비보셋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지당한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다윗에게도 있고 다윗의 신하들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에게 "네 아비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내가 너에게 은총을 베푼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귀한 복음이 있습니다. 여기에 귀한 은혜의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므비보셋과 같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은혜를 베푸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식탁자리에, 은혜와 축복의 자리에 초대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죄되고 허물된 것을 인하여 나를 상관하시지 않고 나를 위해 피를 흘려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 이름을 인하여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축복하시며,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것이 은혜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 큰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겠습니까? 여전히 사울을 인하여 미워하고 죽이고 죄 지으며 살 것입니까? 아니면 요나단을 인하여 용서하며, 이해하며, 화목하며, 의를 이루며 살 것입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또다른 므비보셋과 같은 존재들이 우리 겉에 있을 수 있습니다. 껄꺼러운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말 죽을 때까지도 안 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저 사람 천국에 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조차도 보기 싫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요나단(예수님)을 인하여'내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한 식탁에 같이 앉아서 못 먹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귀한 삶의 결단을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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