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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서로 용서하라 (고후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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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용서하라 (고후 2:5-11) 

사이몬 비젠탈이라는 유명한 유대인 인권운동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2차 대전 중에 3년간 수용소에 갇혀 있었고, 일가친척 89명이 나치의 손에 희생됐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구한 비젠탈은 유대인을 살해하거나 학대한 전범들을 찾아내는 단체의 소장으로 50여 년간 나치의 범죄 증거를 찾아내 1100여명을 법정에 세워 법의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저서 “해바라기”라는 책에서 “용서란 공평한 것인가?”라는 심각한 질문을 합니다. 

비젠탈은 당시 20세의 젊은 나이에 독일군에 의해 강제수용소란 극한상황에서 목숨을 연명해 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독일군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병원에서 청소를 하는데, 간호사가 와서 자신을 죽어 가는 한 병사의 침대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22살 난 나치 친위 대원이었습니다. 이 병사가 자신의 손을 꽉 잡더니만 이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한 유대인 마을에서 독일군이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30명이 사망한 후 우리는 한 유대인 건물에 300명 이상의 주민들을 몰아넣고 휘발유를 붓고, 수류탄을 던져 죽였습니다. 불타는 건물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총을 쏘았습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독일 병사가 이어가는 이야기를 비젠탈은 계속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마다 독일 병사는 그의 손을 꼭 잡으며 "제가 한 짓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 결코 마음 편히 죽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가지 마세요."라고 애원하였습니다. 독일 병사는 용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비젠탈은 말합니다. “나는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 군인 쪽을 바라본 뒤 한마디 말도 안하고 방을 나와 버렸습니다.” 그 군인은 용서받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는 책의 끝 부분에서 묻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만일 이 비젠탈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결코 답하기 쉬운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용서와 심판의 문제는 인류역사 이래로 계속 논의 되어온 문제이며, 성경의 핵심적인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그리스도인의 용서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방문 계획을 변경한 일로 인해서 진실성과 사도성을 비난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로 인해서 많은 근심과 걱정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근심하게 만드는 일로 인해서 사도 바울만 근심하고 비난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잘못된 분위기로 인해서 교회를 이루고 있는 공동체, 다른 성도들에게도 근심이 되고 걱정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가장이신데 사업이 잘 안되십니다. 또는 직장이 어려움이 있고, 건강이 안 좋다거나, 개인적으로 힘들고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때, 집안에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고, 말도 없고 걱정이 많은 것 같으며 자녀들이 여러분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때 마다 아이들도 굉장히 무겁습니다. 부모님의 근심과 걱정은 가족 모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입니다. 나 혼자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 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공동체 안에서 누구를 비판하고 근심하게 만든다면 그 사람 때문에 그 공동체가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범죄한 사람들을 용서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 안에서 범죄하여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근심하게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범죄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책망했던 근친상간의 범죄를 한 자를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다른 주장은 바울이 제 2차로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는데, 그때 성도 중에서 사도 바울을 대적하고 모욕하며 심한 굴욕감을 안겨준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혹은 바울을 대적했던 거짓교사들과 어기에 현혹되어 동조했던 사람들이라고 추측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 범죄한 자는 이미 교회로부터 치리를 받은 것 같습니다. 

6절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징계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이 범죄자는 죄에 합당한 벌을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더 이상 책망이나 벌을 내리지 말고 이제는 용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까?

1. 교회의 복잡한 모든 문제는 용서로 마무리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가장 은혜로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잘못한 사람들을 징계할 것을 지사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징계를 징계로 끝내지 않습니다. 이미 충분한 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제 위로해 주고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용서로 마무리 하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권징을 하는 이유는 권징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권징을 통해서 잘못한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회복하도록 돕는데 있습니다. 그럼으로 너무 심한 권징으로 범죄자 당사자가 오히려 절망하고, 낙심하고, 근심하게 되면 바른 권징의 시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학교나 기타 기관에서와 같이 교회에서도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징계를 가할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장소이기 때문에 처벌하는 일이 없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로교회의 당회와 공동의회에 치리권이 있으며 이렇게 함은 하나님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조치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을 보세요.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범죄자를 향해서 지금까지 한 권징으로 되었으니까 더 이상의 징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범죄자를 용서하여 사랑을 나타내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심하게 징계하면 범죄자가 큰 근심에 빠져 아예 교회를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책이 지나치면 거기 눌려서 돌이킬 수 없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지나친 근심으로 침몰되면 다시 살릴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8절에 “사랑을 저에게 나타내라”고 하는데 사랑을 다시 확인시켜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전처럼 사랑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말 어쩔 수 없이 자녀에게 매를 대었다면 마지막에는 따뜻하게 안아줄 것입니다. 그 날 저녁 잠잘 때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야단을 맞았지만 다 잊은 듯 편히 잡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을 재확인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할 때, 사랑할 때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2:17-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윈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 말씀은 용서의 이유와 용서의 근거와 용서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기억하십시오. 기독교인은 모든 복수의 권한을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복수의 칼을 하나님께 반납한 사람들입니다. 왜 하나님이 완벽하게 갚아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용서하는 이유와 근거입니다. 사람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시든지 녹여 놓으시든지 그 분의 섭리속에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용서하며, 사랑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의 자세입니다. 


2. 사랑으로 용서하라고 권면하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용서하라고 하셨고, 우리도 용서를 받은 자 이기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5:43절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눅 17:4절에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주기도문에서도 서로 죄를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10절에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라’는 원문의 뜻은 “그리스도의 얼굴 앞에서 용서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을 의식하고 용서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하고, 그리스도가 용서하셨기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보고 계시기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는 용서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용서하기 보다는 언젠가는 앙갚음하려고만 합니다.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용서의 본을 보여주셨기에 용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범한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는 일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다음의 모습은 그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지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경우가 아닐 때가 많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알기에 개인의 관용함으로 그리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용서로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용서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용서를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범죄자를 용서하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그 큰 죄에서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미 주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우리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의 용서와 구원이라는 복음의 위로와 사랑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바로 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랑의 용서와 위로의 편지인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뜻은 ‘선물을 주다, 은혜를 베풀다’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의 의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인간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은혜로서 주어지는 선물인 것처럼 바울 사도의 용서도 그런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여 비난의 화살을 쏠 수가 없는 이유는 나 자신이 죄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이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비난이 아니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공동체는 교회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잘못하고 범죄한 사람들에 대하여 교회가 징계하고 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났을 때에는 용서하고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을 향하여 비난하지 않고 깊은 사랑으로 용서해 줄 때 공동체는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근심하게 한 사람들을 용서로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 교회가 천국이 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용서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 궤계를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탄은 용서하지 않게 만들어 교회와 잘못한 사람을 모두 파괴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일은 사랑과 용서와 위로인데, 사단에게 속한 일은 증오와 반목과 분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우리에게 죄 범한 사람까지 용납하고 위로하고 다시 사랑하게 하시는데, 사단의 궤계는 우리로 반목하고 분리해서 다시는 사귐이 없게 만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반목과 불화와 분리가 사단의 궤계인지 몰라서 이 길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아서 여전히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권징을 빌미삼아 범죄자를 용서하지 않고 심한 근심에 빠지게 하고 실족하게 된다면 이것이 사단이 바라는 것입니다. 권징을 빌미삼아 사단에게 속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사단에게 속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죄인 줄을 모르고 속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잘못을 범한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그를 멀리하는 것이 의롭고 선한 일인 것 같이 생각하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교회를 갈등하게 하고 나누는 일이기 때문에 다른 범죄를 저지르는 것 못지않게 교회를 파괴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은 자기가 정의의 편에 섰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잘못한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멀리하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 있어 죄의 기준이 성경이 아니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비난하고 험담하고 정죄한다고 죄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의 잘못을 정확하고 세밀하게 분석해내서 비판하는 사람이 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죄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더 교회를 파괴하는 힘이 강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기준을 선택하여야 합니까? 성경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으로 용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존심을 죽이고 자아가 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도 살고 교회 공동체도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으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사랑으로 용서함으로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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