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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습 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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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습 3:14-17) 

세상은 물질적으로 예전에 비해 풍요로워졌지만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더욱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특히 조울증이나 우울증은 감정의 기복이 대단히 커지는 것으로 현대인들에게 대단히 많이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사실 어떤 질병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람의 감정은 조석으로 변하기에 흔히 날씨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아침에는 밝고 힘차게 출발했다가 저녁때는 우울하게 마무리되는가 하면 맑았다, 흐렸다가를 반복합니다.
말 그대로 변화무쌍한 것이 인간의 감정이라고 하는데 여러분들의 지금 날씨는 어떠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사람들의 감정은 변덕스러운 날씨처럼 하루에도 몇 번씩 맑았다 흐렸다 비가오고 천둥이 쳤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화창한 과정을 반복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우리에게 삶의 감정을 바꾸어 놓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원인은 대부분 ‘환경의 영향’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환경이 사람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또 하나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말’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안 들었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한마디 말에 표정이 달라지고 갑자기 흥분도 하고 절망적인 사람으로 변하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한주간을 천국과 지옥을 오가셨다면 대부분 이 두가지의 원인으로 인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의 바탕에서 감정을 잘 다스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가 결정적으로 기분 나빠질 상황이나 흥분하거나 낙심하게 될 말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묘하게 우리의 삶속에 한번씩 툭툭 건드려서 우리를 격동시키고 흔들어 놓고자 합니다.

무엇 때문이지 알 수 없는 절망감과 무기력함,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신분이 있다면 그 분은 지금 사탄의 교활한 속임수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우리나라가 OECD 국가 가운데 자살률이 최고로 높은 나라로 지금은 심각한 사회문제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단의 속임수에 속고 있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위해 처방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는 약을 주셨는데 그 하나는 ‘소망’ 이며 다른 하나는 ‘확신’ 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절망적인 현실과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현실에 결코 속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뭐라하든 결코 흔들림 없는 우리의 소망과 우리의 확신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신 말씀처럼 변함없이 우리에게 늘 좋은 것을 주시는 주님을 믿는자는 결코 흔들림이 없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믿는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지 전혀 그리스도인 답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남들이 절망하는 상황에서 여지없이 절망하고, 남들이 소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만 자신도 긍정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그리스도인들도 있습니다.

다 긍정적이고 소망스러울 때는 물론이고 남들이 다 절망하고 낙심하는 때에도 절대 희망을 버릴 줄 모르는 사람들,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던 사람들, 오로지 구속의 주 예수만으로 얼마든지 긍정적일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본문에 앞선 1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이라는 명칭으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남은 자는 남들이 절망의 늪에 빠져 있을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시대나 이렇게 희망과 소망의 날을 기다리고 있는 남은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셨고 저와 여러분들도 그러한 남은 자가 되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배경은 히스기야 왕에게는 ‘므낫세’ 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와 달리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므낫세가 왕이 되었을 때에 유다 백성들은 신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심각한 타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온갖 더럽고 추한 우상숭배가 만연하였고 므낫세가 죽고 그 아들 ‘암몬’ 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 못지 많은 악을 행하였습니다.

암몬은 아버지가 저지르던 죄를 계속 이어 받다가 결국 2년만에 암살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여덟살이었던 아들 ‘요시야’ 가 왕위를 이었는데, 이 요시야는 그래도 나라를 잘 이끌어 ‘종교개혁’ 과 ‘우상타파’ 를 실시하였지만 온 나라와 백성들은 이미 병들대로 병이 들어 더 이상 손쓸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고 바로 그 때에 등장한 선지자가 ‘스바냐’ 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깨끗한 물이었다 하더라도 한번 썩게 되면 거기에 다시 맑은 물을 부어도 완전히 처음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당시 유다에 새로운 개혁의 바람을 일으켜 보려고 하였던 사람들도 다시 완전한 회복이 어려워진 상황에 좌절하고 그야 말로 모두가 낙심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이때 스바냐가 등장한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심판의 메시지’ 를 선포합니다.
부패한 유대와 예루살렘은 물론이고 그 이웃 민족들마저 다 갈대아 사람들에게 파멸되고 말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이 메시지를 접한 사람들은 저마다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스바냐를 통해 또 다른 메시지를 전하게 하셨는데 그것은 어둠의 현실 속에 주신 희망의 메시지로 그 가운데 ‘남은 자’ 즉 너희 중에 남은 자가 있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지금 절망의 깊은 골짜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우울한 소식만 들려지는 가운데 그들 중에 역사의 그루터기로 쓰임 받을 만한 남은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엘리야 선지자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바알의 선지자와 싸워 승리하고 쫓기는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하나님! 지금은 저 혼자 뿐입니다. 내가 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멋지게 이겼지만 보십시오 아무도 하나님을 따르겠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외쳤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너는 혼자가 아니며 내가 아직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남은 자 7000을 예비해 두었다” 는 말씀이셨습니다. 

여러분 엘리야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하나님께서는 나만 혼자 남았다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용사 7000을 남겨 두셨다고 격려하십니다.

그러므로 포기와 절망이라는 감정의 이끌리어 요동하거나 자포자기의 늪에 빠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처럼 우리들도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나 혼자 잘 믿는다고 세상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게 보입니다. 

더군다나 사탄은 지속적으로 공격하며 우리에게 말합니다. 

‘너 혼자 바르게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네가 무엇으로 대세를 거스릴 수 있겠느냐? 그러지 말고 다른 사람들처럼 적당히 타협하고 네 마음대로 즐기기며 살라’ 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면서 이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버티는 그루터기이자 남은 자들로 이 시대의 유일한 소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과 부활의 소망을 가진 저와 여러분이 넘어진다면 이 세상은 정말로 소망 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릴 넘어뜨리기 위해 사탄은 자신이 동원 할 수 있는 온갖 유혹과 말과 환경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저지르게 되는 작은 실수와 잘못들을 크게 확대해서 ‘그것봐라 너라고 별수있냐?’ 하면서 이 그루터기를 뿌리채 뽑으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격동키시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스바냐 선지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무엇입니까?

16절 ‘그 날에 사람이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시온아 네 손을 늘어뜨리지 말라’ 

‘그렇다고 기죽을 것 없다. 힘내라 네가 이 시대의 희망이다. 내가 너를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 너도 결코 나의 잡은 손을 놓치마라. 마귀에게 속지마라. 내가 널 사랑한다 네 손을 늘어 뜨리지 말라’ 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근거로 15절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할렐루야!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 하였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용서 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감정의 기복은 ‘죄책감’, ‘형벌’ 에 대한 두려움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사탄에게서 “너라고 별수 있냐?” 는 소리를 들을만한 과거의 어떤 죄악된 일을 하였을 때 그 말에 한순간 좌절해 버리고 말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러한 말에 속지 말며, 위축되거나 주눅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하루에도 수 없이 들려오는 정죄의 음성에 우리는 삶의 의욕과 용기를 상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말씀하시길 ‘여호와가 너의 형벌을 제하였다’ 고 선언하십니다. 
즉 그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이미 용서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사탄의 속임은 바로 거기 있습니다. 

그러니깐 우리의 죄를 지적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 스스로 의욕이 상실되어서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게 해서 ‘더 이상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는 생각을 갖게 하거나 ‘회개 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와 같은 생각을 갖게 해서 회개의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옛날 인도의 마을 시장에서 한 농부가 메추라기 한 떼를 팔기 위해 가져 왔습니다.
농부는 메추라기 마다 발목에 줄을 매고 중앙에 동그란 막대기를 중심으로 해서 모든 줄을 한 끝을 묶었습니다.
마치 메추라기들은 원형 안에서 노새들이 곡식을 빻기 위해 계속 도는 것과 같이 반복해서 도는 모습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메추라기에 관심이 없었을 때에 마침 독실한 브라만이 지나 가다가 이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힌두교 사상를 믿었기 때문에 이 조그마한 생명을 불쌍히 여겨 메추라기의 가격을 묻고 그 농부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것을 다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지불하고 브라만은 농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 이제 그 새들을 다 놓아 주시요” “뭐라고요, 선생님?” 놀란 농부가 묻자 다시 “내가 말하지 않았소. 새 발목의 줄을 끊어 모두 풀어주란 말이요”

농부는 시키는대로 칼로 메추라기의 다리에 묶인 줄을 끊고 새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메추라기 떼들은 줄이 풀어졌음에도 계속적으로 둥글게 그 자리를 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새들을 억지로 날려 보냈지만 얼마정도 날아가더니 메추라기들은 다시 그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라는 것입니다.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묶여 있던 기억이 결국 자유의 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몸을 묶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면 이 메추라기와 같이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죄로부터 자유케 되고, 정죄함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예전의 상태로만 생각하는 낮은 자존감은 사단의 치명적인 무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을 때 그 어떤 소리와 환경에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처럼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을 믿으시고 당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놀라운 것은 오늘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용서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 시켜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스라엘 왕 여호와가 네 가운데 계시니 네가 다시는 화를 당할까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형벌을 제거 하였을 뿐만 아니라 원수를 쫓아내어 네 자리를 되찾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갈대아 사람들을 패망 시키고 유다 족속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회개할 때 용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러분 원하기는 이 하나님의 회복케 하심을 믿으시고 우리를 연약하게 하고 스스로 좌절하게 하는 모든 사단의 속임수에서 용서와 회복의 하나님을 강하게 붙드시고 담대하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이 시대의 그루터기로 자부심과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정말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의기 소침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여러분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너무나 잘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날씨가 흐리고 비나 눈이 와서 낮이 어둡다 해도 우리는 해가 없어졌다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구름이 많이 가려서 낮이 밤인 것 같아도 여전히 태양은 그 구름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요즈음 경제가 어려워서 문을 닫는 가게가 많이 생겼습니다. 무엇을 할 때마다 삶이 어렵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그래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마치 구름 뒤에 언제나 태양이 있듯이 환난 속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멀리 하늘 보좌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아무리 어려움 가운데 우리가 있어도 우리를 구원하실 전능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우리에게 닥친 환난과 시련을 이겨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스바냐 선지자는 이 믿음을 강조하며 두 손을 축 늘어뜨리고 낙심하며 살지 말고 힘차고 용기 있게 살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 믿는 우리들이 의기소침해 질 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 는 말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살아 계신 하나님이 내 삶을 통제 하시고 감정의 기복에 따라 살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우리가 이 시대에 자부심과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17절 말씀을 계속 읽고 묵상하면서 ‘너’ 라는 대신에 자신의 이름으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나님이 잠잠히 사랑하시는 나의 하나님이 나 때문에 기뻐서 어쩔 줄 을 모르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 받고 사는 사람은 ‘행복해서’ 주눅 들거나 낙심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위력입니다. 남들은 걱정이 태산 같아도 얼굴이 환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알아보면 반드시 그 사람은 사랑받고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 기운이 쑥 빠져 버린 그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너희는 왜 이러고들 있는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질 않느냐. 그리고 그 분이 너희들만을 사랑하신다고 하질 않더냐. 그 분은 너희에게 구원을 베푸실 분이시다.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시는 그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는데 뭐가 그리 걱정이냐.’ 

이 말씀은 세상에 묻혀 위축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그루터기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들을 그루터기로 남겨 두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낙심하며 주저 앉아 무기력하게 살아서는 안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도와 주십니다. 은혜를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원하기는 이 말씀으로 더욱 위로와 소망이 되어 세상을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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