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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떠나가려느냐? (요 6:6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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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떠나가려느냐? (요 6:66-71)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을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려면 동기를 부여해줘야 합니다. 동기부여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보상과 징계입니다. 이 방법은 자녀들이 어렸을 때 주로 쓰는 방법입니다. “너 학교에서 일등하면/ 반장되면/ 아버지 심부름 하면 선물 하나 사줄게.” 이런 식으로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얻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외적이고, 동물적인 욕심으로 치닫게 만들 위험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보상을 얻을 때는 열심을 내지만, 그 보상이 사라지면 금방 모른 척하고 뒤로 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도 못할 때 징계를 준다고 하면 다시 억지로 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위축이 되어서 그저 겨우 따라갈 뿐입니다. 

두 번째는 경쟁을 통한 동기부여입니다. 개인이나 팀, 혹은 단체의 차원에서 경쟁을 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이기면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보너스까지 받습니다. 그런데 이긴 사람과 진 사람이 너무 극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경쟁이 지속되면 이긴 자들은 우월감과 뽐내는 마음을 갖게 되고, 반대로 진 사람은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 협력자가 되지 못하고 적이 되고 맙니다. 

세 번째는 삶에 진정한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는 행복이라는 의미, 다른 형태로는 성숙한 성품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거나, 가슴에 뜨거운 사명을 심어줘서 인생의 목적과 목표를 전해주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면세계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쉽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발동이 걸리면 누가 뭐라 해도 그 길을 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영향력의 동기부여입니다. 

물질적, 육체적 만족을 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들끓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파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행보는, 다른 영적 지도자들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래서 더욱 사람들의 눈에 확 띄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소외된 자, 힘든 자, 그리고 병든 자들의 친구로 오셨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생존권의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은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따라가야 할 것인가? 따라가는 것을 멈출 것인가?’ 그들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를 통해서 오천 명이나 되는 배고픈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병이 들어 괴로운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대어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이 들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시고,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복된 존재임을 선포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육체의 문제가 해결되고, 먹고 마실 수 있다. 질병이 치유 받는다. 인간대접을 받을 수 있다.’ 신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뒤따라 왔고,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임금이 되시면 최고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예수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거절하십니다. “난 너희들의 임금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한복음 6:15)

예수님께서 제일 처음에 빵을 주시고,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쫒아내어 주신 이유는 거기에 멈춰 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에게는 빵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빵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빵보다 더 큰 것이 필요하고, 질병에서 치유 받는 것보다 더 큰 인생의 동기와 목적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저 소박한 행복을 원했습니다. “그냥 먹고 마시는 것만 주시면 돼요. 우리의 병만 고치시면 돼요. 그러면 우리는 행복해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 이상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었던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영적인 말씀을 시작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생명수다. 나를 먹고 마셔야 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오히려 민중들은 머뭇거렸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영적인 말씀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부담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주어졌을 때는 좋아했고, 질병이 고쳐졌을 때는 환호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영적인 말씀을 듣게 되자 혼란스러웠습니다.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요한복음 6:60)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가 안 돼. 너무 어려워. 도대체 왜 예수님은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는 거지? 그냥 먹고 마시는 것만 있으면 되지, 왜 다른 것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지? 그런 것에는 관심 없어.”라고 말하면서 따라가던 것을 멈추었습니다. 아예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한복음 6:66)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아왔습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쫓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높였고, 예수님께서 임금의 자리에 오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 되기를 사양하시고, 오히려 영적인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물러가버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중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물질의 소박함,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내적 탐욕을 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그룹에 해당하는 인물은 본문 후반부에 나오는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뒤따라 왔지만 예수님의 생각과는 다른 마음으로 마지막까지 가게 됩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정치적인 야망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물질의 탐욕을 예수님께서 채워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룟 유다의 이런 마음은 다른 민중들이 갖고 있었던 것보다 더 집요하고 더 의도적이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탐욕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유다의 특징은 자기의 생각을 예수님에게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야 된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서 초청한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변화될 거라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가르치셨습니다. 때로는 권면하셨고, 때로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심지어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의 속에 있는 야망과 탐욕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에 의해서도 변화되지 않는 것, 예수님은 그것을 마귀라고 부르십니다. 사탄이라고 명명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70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요한복음 6:70)

바로 가룟 유다를 가리키시는 것이었습니다. 마귀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탐욕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거짓의 영을 사람들에게 쏟아붓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그랬습니다. 그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기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돈과 명예를 탐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거짓의 영이 그를 포로로 삼은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야욕을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기 위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요새 환절기에 들어서면서 독감이 유행입니다. 이런 독감을 인플루엔자(influenza) 바이러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전염되는 유행성 감기라는 의미입니다. 최근에 올리버 제임스(Oliver James)라고 하는 사람이 정신적인 질병을 이야기하면서 만들어낸 단어가 있습니다. 오한과 발열이 있고, 인후염과 근육통, 그리고 기침이 나는 독감인 인플루엔자와 비교해서 어플루엔자(Affluenza. affluent+influenza)라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풍요를 추구하는 소위 부자병입니다. 올리버 제임스는 ‘어플루엔자’라는 책에서, ‘어플루엔자’라고 하는 병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대인들에게 있는 탐욕의 병입니다. 돈이나 재물에 집착하면서 부자가 되기 원하는 병입니다. 

이런 탐욕을 부추기는 분위기에는 모토가 있습니다. “소비는 나를 자유케 하리라. 소비하면 할수록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라는 것입니다. 그는 책에서 이 시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소비지상주의의 환상을 쫒는 병에 걸려있다고 지적합니다. 이 병에 걸리면 무력감, 과도한 스트레스, 채워지지 않는 욕망, 쇼핑 중독, 그리고 나만 챙기는 나르시시즘과 만성 우울증에 걸린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미국의 월가로부터 시작된 금융 위기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유럽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은 시장 경제를 중심으로 했던 자본주의의 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기주의적인 양상을 띄면서 돈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 없이 돈에 돈을 더하는 탐욕의 질병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특별히 세 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보이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진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지나친 소비문화가 활성화되어 많은 사람들이 쇼핑 중독증에 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명예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권력주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러한 질병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을 그냥 그대로 놔두고 있는 것일까요? 다른 이유에서가 아닙니다. 세상이 거짓 약속을 선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소비하고 과시하면 내적 공허가 채워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세속 사회에서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을까요? 제자들처럼, 가룟 유다처럼 예수님을 따라가고 마지막까지 옆에 있기는 하지만 전혀 딴 생각을 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의 목적이 나 자신의 축복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기도는 무언가 잘못 될 염려가 있습니다. 헌금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할 것이라고 하는 단순한 마음으로만 헌금을 한다고 하면, 우리의 헌금은 우상에 재물을 바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부자가 되지 않아도 신앙생활을 끝까지 할 수 있을까요? 건강하다가 질병이 들어도 우리의 신앙이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만약 많이 가져야하고, 건강해야하고, 세상 속에서 내 힘이 높아져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만족할 수 있다면 이것은 가룟 유다와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쫓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세 번째 그룹에 해당하는 제자는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제자들이 다 물러갔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아프고 외로웠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참 외로움을 많이 타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3년 동안 열심히 가르치고, 함께 있었는데 제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의 수준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남아있는 열 두 제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통해서 위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제대로 알고 따라왔는지 묻고 싶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6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요한복음 6:67)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먹고 마실 때는 그렇게 예찬했던 사람들이 보이는 것만 바라보고 좋아하다가 떠났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만 남았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가겠느냐?” 예수님의 외로움이 듬뿍 담겨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물어보실 때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물 위를 걷는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에 걸린 자를 고쳐주시는 것도 옆에서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 이상이신 분임을 베드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을 살펴보겠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요한복음 6:68~69)

“예수님께서 먹고 마시는 것을 주셔서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고치신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십니다.”라고 베드로는 대답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신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소망교회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의 인격과 성품이 좋아서, 예수님이 갖고 계셨던 꿈과 생각과 그 말씀이 좋아서 예수님을 따라가고 계십니까? 이것은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 그것을 뛰어넘는 예수님의 인격과 예수님의 사랑을 보면서 자기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느 단계에 올라가야 이것이 되는 것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다녔던 것처럼 예수님 믿으면 복 받을 수 있고, 뭔가 고침을 받을 수 있고, 세상에서도 출세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왔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거기에 머무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예수님에게서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게 될 때, 그분 안에 영생의 말씀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그분만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소망이시고, 만족이시고, 기쁨이신 것을 확인하게 될 때에 우리는 예수님의 뒤를 끝까지 따라는 진정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을 되돌아보십시다. 내가 예수님의 선물만을 추구해서 여기까지 왔는지, 아니면 그분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고, 그분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기에 주님을 따라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온전한 사랑의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가슴에 새기시면서 신앙의 기쁨을 마음껏 증거하는 복된 성도님을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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