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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적인 선택과 결단의 원칙 (삼상 2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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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인 선택과 결단의 원칙 (삼상 23:1-13)

[A. W. 타겟]이라는 사람이 쓴 <창>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 가운데의 내용입니다. 어느 작은 병실에 두 남자가 입원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환자이고 또 한 사람은 디스크 환자였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수술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어야 했지만 폐암 환자는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자리에 일어나서 창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병세로 보자면 폐암말기 환자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왜 그런지 늘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디스크 환자가 창밖을 보고 있는 폐암 환자에게 도대체 밖에 무엇이 보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호수에 보트와 백조가 한가로이 떠있고 호숫가를 산책하는 연인들과 잔디밭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의 얼굴이 보이네요.” 

이 말을 듣고 난 후로 디스크 환자는 화가 났습니다. 폐암 환자가 말기의 병환에도 얼굴에 늘 기쁨이 있는 까닭이 침대가 창문 곁에 있어서 수시로 창밖을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고, 자기는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그의 생각에는 빨리 폐암 환자가 죽어서 나가면 저 창가의 침대를 차지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폐암 환자가 심하게 기침을 하면서 신음하기 시작했습니다. 디스크 환자는 비상벨을 눌러서 의사를 부를까 하다가 침대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갑자기 옆 침대가 조용해졌고 고통 받던 폐암 환자는 그의 기대대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창문 곁 침대로 옮기게 되었고 그는 옮기자마자 있는 힘을 다해서 침대를 붙들고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창밖에는 호수도, 잔디밭도, 산책하는 연인들도, 아이들도 온데 간 데 없고 회색의 콘크리트 담벼락 뿐이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폐암 환자의 기쁨이 환경 때문에 생긴 기쁨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선택한 기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창조적인 상상으로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기뻐할 수 있었던 그 사람 앞에 한 없이 부끄럽고 죄스러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스스로 선택한 기쁨이라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입니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의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나를 행복하게 할 수도 있지만 불행하게도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선택이란 곧 자기의 결단입니다. 무엇을 결정하고, 어느 쪽을 선택하며, 어떤 결단을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단 속에는 그 사람의 인격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더군다나 성도로서의 그의 신앙이 그의 결단 속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같이 신앙생활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신앙의 정도를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경력으로 보자면 따라갈 사람이 없고, 말을 들어보면 청산유수 같습니다. 그런데 신앙적인 모습을 보면 실망스럽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도대체 그 사람의 신앙을 가늠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정말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과 결단의 순간이 어떠한가로 그 사람의 신앙성숙도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결정적인 결단의 순간에 다윗이 어떻게 결단하고 선택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이 결정과 결단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것이 가장 신앙적인 결정인가를 배울 수 있게 하는 좋은 교훈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추격을 하자 다윗은 도망 다니는 중입니다. 자기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때에 동족들이 있는 그일라가 블레셋에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나아가 블레셋을 쳐부수고 그일라를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구원해준 그일라 사람들의 배신으로 사울에게 붙잡힐 뻔한 위기를 당하면서도 살아남은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어려운 결정과 결단을 지혜롭게 하는 다윗의 모습 속에는 신앙인의 선택과 결단의 원칙이 무엇이지 나타나는데 오늘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우리가 신앙적인 선택이나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실수하기 쉬운 일이 무엇인지도 함께 깨닫게 될 것입니다. 

먼저, 다윗의 결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점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했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 지금 블레셋이 그일라를 괴롭히는 데 내가 가서 블레셋을 쳐부술까요?”하고 묻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중한 모습입니다. 행동이 먼저 앞설 수 있는 상황이지만 다윗은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행하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먼저 결정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 내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하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기도란 자신의 생각과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검증 받는 일이지 이미 내려진 내 결정을 가지고 나가서 하나님을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가장 단점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생각에 합당한 일이면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막무가내로 고집 부리는 일입니다.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일들, 누가 봐도 아닌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지어놓고 실수하며 살아가는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하기 좋은 말로 “하나님의 뜻이다.” 혹은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이다.” 라는 스스로의 생각에 빠져서 실수를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울입니다. 

오늘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이르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넘기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읍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의 이 생각이 얼마나 착각입니까? 2절을 보면 다윗이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은 다윗의 생각대로 가서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생각을 인정하시고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울이 지금 하나님이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자기에게 주었다고 하는 말은 얼마나 큰 착각입니까? 

14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다윗을 사울에 손에 붙이신 적이 단한 번도 없습니다. 보세요. 사울은 한 번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제 생각과 판단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불신앙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뜻 운운하면서 교만을 떨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정초에 재밌는 광경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특히 계룡산에는 해괴한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제사음식을 한 보따리를 싸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올 해 무슨 좋은 일이 있을는지 산신령에게 물어보러 온 사람들입니다. 천만 원 이상 드는 제사비용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옵니다. 재밌는 것은 제사 후에는 꼭 마른 명태 한 마리를 물속에 던집니다. 꼬리는 가라앉고 대가리가 물 위로 하늘을 향해서 곧추 서면 한 해가 길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다 명태 한 마리씩 다 던지고 갑니다.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사람들이 가고나면 얼른 장대를 들고 명태를 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에 건지는 명태가 평균 100마리가 된답니다. 그 사람의 집 처마에는 말려 넣은 명태가 즐비합니다. 잘 말렸다가 반찬 해먹는답니다. 산이 무슨 말을 해 줍니까? 산신령이 있기나 한 것입니까? 자기불안을 어디에서도 해결할 수 없어서 스스로 택한 자기만족의 방편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만족에만 의지한다면 이것 역시 불신앙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참된 기도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생각과 계획을 검증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결단에 필요한 가장 첫 번째 요소입니다. 

다윗이 결단을 하는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은 자신의 감정을 극복했다는 점입니다. 목숨을 걸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원한 후 다윗은 그 성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일라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맙니다. 블레셋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들의 목숨을 살려 준 은인에 대한 대가가 배신이었으니 이게 얼마나 배은망덕입니까? 다윗으로서는 정말 속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다윗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화가 나는 일 아닙니까? 

여러분, 사람이 은혜를 모를 때 정말 마음이 아픕니다. 나는 모든 것을 주면서까지 사랑해 주고, 기도해 주고, 보살펴 주었는데 어느 순간 돌변하여 나를 향해서 비수를 꽂을 때 그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했는지 11,12절을 보면 그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사울에게 내주겠습니까?” 하고 다윗이 하나님께 두 번씩이나 물어봅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속상하는 일입니까? 통상적인 사람의 감정이라면 밀려오는 배신감에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요, 감정이 상하여 냉정한 판단력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고 사울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아무 말 없이 떠나갑니다. “두고 보자, 지금은 내가 할 수 없이 떠난다마는 언젠가 돌아와서 너희들을 요절을 낼 것이다.” 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즉 앙금을 남겨 놓은 채 임시로 상황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모두 내려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대 부분은 감정 이기지 못해서입니다. 

약1:20에서 야고보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했습니다. 감정 때문에 잘못 선택하고 결정하여 하나님의 뜻을 어그러뜨린다면 정말 미련한 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은 절체절명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을 극복함으로써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순간순간에 나의 인격이 나타나고, 나의 성품이 보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나의 신앙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오늘 다윗에게서 배우는 신앙적인 결단의 원칙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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