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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항상 기뻐하고 기뻐하라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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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고 기뻐하라 (빌  4:4-7)

대부분의 부부가 오래 살수록 남편이 아내에게 기가 죽는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할아버지는 할머니한테 기가 죽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젊었을 때 할머니 속을 꽤나 썩였으니 나이 들어서 자꾸 구박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 는 생각에 할머니에게 내기를 제안합니다. “할망구, 우리 심심한데 내기나 한판 합시다. 내기에 진 사람이 죽을 때까지 이긴 사람 말 들으면서 종처럼 살기. 어때?” 할머니야 안 그래도 맘 편하게 살고 있는데 웬 내기냐 싶어서 단숨에 거절했습니다. 하지만 하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할아버지 때문에 결국 지쳐서 “도대체 무슨 내긴데 그러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어이없게도 “누가 오줌을 더 멀리 누는가!” 를 시합하자는 것입니다. 버럭 성질을 낼 줄 알았던 할머니는 뜻밖에도 흔쾌히 승낙을 하면서 한 마디 합니다. “대신에 규칙은 내가 정하는 거야 알았수? 영감!” 신이 난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시합 결과, 놀랍게도 할아버지는 완패를 당하고 할머니의 승리로 끝나버렸습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할머니가 정한 규칙은 딱 한가지였습니다. “손대기 없기!” 

이럴 때 우리는 웃습니다. 웃음은 참 좋은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삶에 웃음이 없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평균수명이 굉장히 짧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인간에게 웃음이란 긴장을 이완시켜서 스트레스를 해소해 줄 뿐 아니라 심장박동, 근육상태, 혈액순환 등에도 영향을 미쳐서 에어로빅 효과를 낸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20초만 소리 내어 크게 웃어도 5분 동안 힘들여서 노를 젓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합니다. 

사람의 뇌는 18가지의 신기한 요소를 생성해 내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엔돌핀> 이요, 다른 하나는 <아드레날린> 이라는 것입니다. <엔돌핀> 은 사람이 많이 웃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감사한 마음, 기쁜 마음을 가질 때 생성되어 흘러나옵니다. 이 <엔돌핀> 은 암세포는 물론 인체에 해가 되는 많은 균들을 잡아먹습니다. 

그러나 <아드레날린> 은 반대로 인간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며, 근심과 걱정에 사로잡히고, 남을 원망하고 저주하며 시기하고 질투할 때, 또는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 생성되는 것으로 암을 유발하고 소화불량이나 기타 건강에 해로운 요소들을 활동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웃어야 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그것도 활짝 웃고, 소리 내서 웃는 것이 좋습니다. 평생 살면서 활짝 웃어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불행입니다. 원래 사람은 웃음을 배우면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울음으로 세상살이를 시작합니다. 이때는 안 울면 큰일입니다. 누구든지 태어나면 울어야만 삽니다. 그래서 엉덩이를 패서라도 울리고야맙니다. 비록 그렇게 울면서 태어나지만 그 이후부터는 웃음을 배웁니다. 아이들을 웃게 하는 딱 한가지의 방법이 있지요. 무엇입니까? “우르르 까꿍” 입니다. 이 말이면 아이들이 다 웃습니다. 이렇게 웃음을 배우기 시작해서 평생을 웃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한국 사람들은 어른이 될 수록 잘 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한 많은 민족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지나친 양반 문화에 젖어서인지 늘 오만가지 상을 하고 삽니다. 

여러분, 웃음이란 무엇입니까? 기쁨의 외적 표현입니다. 또한 즐거움은 웃음의 내적 원천입니다. 웃음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기쁨과 즐거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의 핵심도 즐거움입니다. 신앙생활을 즐거움으로 해야지 주일에 교회 오는 것을 고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원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기뻐야 됩니다. 그런데 인상을 푹 쓰고 앉아있거나 내내 평안하지 않는 마음으로 앉아 있다면 그건 분명히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 상태라든가, 부끄러운 신앙상태가 문제일 경우 즐겁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로는 예배에 올 때마다 그 모양입니다. 기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건강하게 사는 사람일수록 즐거운 삶을 사는 사람이고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내가 얼마나 즐겁고 기뻐하며 사느냐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기뻐해야 할 것과 특별히 신앙생활이 즐거워야 할 것을 거듭 말씀합니다. 4절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거듭 거듭 기뻐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라고 하는 바울의 강조를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신앙인다워라.” 는 말입니다. 

또한 “신앙적으로” 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기뻐하지 못하고 불평이 일어난다할지라도 신앙 속으로 가져오면 즐거움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답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비법입니다. 모든 일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 이해 못할 일이 없고, 용서 안 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5절이 그 말씀 아닙니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누구에게나 다 되는 일이 아닙니다. 또 저절로 되는 일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적으로 바로 되어야 이런 신앙적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고 합니다. 본문 6절과 7절을 봅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게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상태가 시원치 않아서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못하는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매일 인상 쓸 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가 잘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니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비뚤어지면 불평이 생깁니다. 불만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망가뜨리고 평안이 없이 살아가다가 훌쩍 떠나버리는 이것이 영혼이 병든 사람이 밟게 되는 수순입니다. 

[헨리 나우웬]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쁨과 행복은 다릅니다. 행복해야만 기쁜 것은 아닙니다. 기쁘다고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일에 불행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 속에도 여전히 기쁨이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기에 불행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진리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언제든지 깨달을 수 있는 진리입니다. 

신앙에 병이 들고 믿음에 문제가 생긴 사람은 자기 딴에는 아니라고 할지 몰라도 분명히 하나님과 멀어져 있습니다. 주일성수하지 않는 것, 헌금생활 하지 않는 것, 봉사하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생긴 문제입니까? 교회에 대한 불만입니까? 목회자에 대한 불만입니까? 성도 간에 일어난 불화의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외부적인 문제들은 다 핑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내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신앙에 문제가 있는데 무슨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입만 열면 부정적인 말들이요, 불신앙적인 말들만 쏟아놓지요. 이래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과 나와의 신앙적 관계는 분명해야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고,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 하는 것이잖아요. 그렇다면 다른 핑계로 이 기본적인 것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되어야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말씀입니다. 

혹자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 삶의 형편이 기뻐할 수 있는 형편이 되어야지 기뻐하는 것이지 먹고 살 것도 없는 판국에 무슨 기쁨이고 즐거움이냐!” 고....정말 그렇습니까? 여러분, 이런 사람은 아무리 많은 물질을 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뻐할 수 없고 즐거워할 수 없는 이유가 반드시 또 생길 것입니다.  
외부의 조건과 환경이 내 기쁨을 좌우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바울로부터 기뻐하기를 권면 받고 있는 빌립보교인들이야말로 외부적 환경과 조건으로는 결코 기뻐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리스도를 전파하던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박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무슨 기뻐할 일입니까? 그러나 이것마저도 기쁨으로 여기라는 바울의 말입니다. 곧 외부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신앙적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영어 “JOY” 라는 단어를 잘 분석해 보면 비밀이 있습니다. 이 단어의 첫 자 J는 Jesus(예수)입니다. 즉 예수님이 나의 인생에 있어서 제일 처음에 와야 된다는 뜻입니다. O는 Others(이웃들), 나의 삶에 현장에서 하나님 다음으로 이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Y는 You(당신)을 말합니다. 맨 마지막에 당신을 생각할 때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쁨이라는 단어가 J.O,Y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이 순서를 얼마나 바꾸고 살아왔습니까? 항상 내가 앞자리에 아니면 중간 자리에 있기를 원하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나를 마지막으로 내 보내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내 신앙을 먼저 살펴 볼 것이요, 그 다음은 이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하고 혹은 존경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느냐를 생각할 것이요, 그 다음이 나입니다. 이순서가 올바로 될 때 진정한 기쁨이 완성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이 아름답지 않아 기쁨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기뻐하지 못해서 세상이 어두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미워서 내 속에 즐거움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즐거워하지 못해서 그 사람이 미운 것입니다. 때로 신앙생활이 짐이 되고, 가끔씩은 신앙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같아서 후회가 됩니까? 그럴 때마다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있어야할 신앙적 기쁨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오늘 바울의 말씀 속에서 신앙적 기쁨의 비결을 깨닫고 그 기쁨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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