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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의 말소리 (신 1: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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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말소리 (신 1:19-46)


제가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쯤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을 때 우리나라와 미국 사회의 문화 사이에서 여러 가지 차이점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쌍방 운전자들의 행동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소위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을 때였습니다. 
  
당연히 사고 발생 경위를 논리적, 법적으로 따져서 어느 쪽의 과실인지를 공정하게 판단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큰 목소리로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무조건 비난하면서 몰아붙이는 사람이 이긴다는 어처구니없는 법칙이 현실적으로 통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자동차 사고가 나도 어느 쪽도 결코 소리를 지르거나 삿대질 따위를 하지 않습니다. 
  
일단 'Are you O.K.?'(당신 괜찮습니까?) 정도로 물어 보면서 만약 다친 사람이 있으면 먼저 구급차부터 부르는 것이 제일 급선무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의 과실인지에 대해서 싸우는 일은 전혀 없고 그저 경찰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찰이 사고 경위서를 작성하면 보험회사는 그 보고서에 따라서 서로 적당히 타결을 보게 되며, 만약 타결이 안 되거나 어느 한 쪽이 보험에 들어 있지 않는 경우에는 민사 법정으로 가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사고가 난 직후에 혹시 자기 쪽이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상대방에게 'I am sorry.'라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사람의 문화에서는 그런 말이 그저 '미안하게 됐습니다.'라는 정도의 예의를 차리는 의미밖에 없지만, 미국에서는 '자기의 과실을 인정하는' 말이 되기 때문에 나중에 법정에까지 가게 될 경우에는 아주 불리한 증언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그처럼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 특히 정치계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거리에서 스피커까지 동원해서 지나가는 행인들의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럽게 데모를 하면서까지 자기네의 주장이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하고, 국회의사당 안에서조차 언성을 높이고 험한 말까지 오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우리와 비슷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그것을 두고 '너희의 말소리'라고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신명기 1장 후반부에서 모세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40년을 바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역했던 기간 중에 가장 가슴 아픈 사건 하나를 회고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보다 더 큰 소리를 냄으로써 벌어졌던 비극적인 사건을 모세의 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면서, 교회 안에 사람의 말소리가 높아질 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의 말소리가 높아지는 교회는 자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됩니다.

본문 19절에서 모세가 "너희의 본바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하는 것은 아라비아 사막 북서쪽 지역을 가리킵니다.
그곳은 대부분이 모래와 암석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며 물을 얻기가 어렵고 모래바람도 빈번한, 실로 사람의 생존과 여행에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출애굽한 직후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 덕분에 그 '두려운 광야'를 무사히 통과해서 "가데스 바네아" 즉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남쪽 입구 지역까지 도착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즉시 가나안 정복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20절에서 그는 백성들에게 그 가나안 땅은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라고 선언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 이제 그들 눈앞에 펼쳐져 있음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계속해서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말은 곧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쥐어 주신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저 '올라가기만 하면 얻게'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세는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지금 당장 행동에 옮기라고 강력히 독려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의 말이 떨어졌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첫 반응은 '행동'이 아니라 '말'이었습니다.
바로 22절에서 모세가 그때에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이라고 회상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다 나아와서' 즉 절대다수의 의견을 좇아서 제의했던 사실은 먼저 정탐꾼들을 보내어서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즉 가나안 땅에 대한 정보부터 입수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는 지극히 타당한 의견처럼 들리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모세조차 그 말을 "선히 여겼을" 정도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저하지 말고 올라가서 얻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서 알아볼 것은 알아 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으니 그때부터 벌써 그들의 마음에는 의심과 불안이 싹트고 있었음이 분명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불신앙은 그들이 보낸 열두 정탐꾼들이 돌아와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땅이 좋더라"고 하면서 "그 땅의 과실"까지 증거물로 가져 왔었음에도 불구하고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26절 이하 33절에서 모세가 회고하고 있는 내용이 그것인데, 기록하기를 "26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여 27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28우리가 어디로 갈꼬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29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한" 마음은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거역하는" 죄로 직결되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에서는 "장막 중에서 원망하는" 소리부터 시작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라는 불신앙의 소리까지 거침없이 튀어나오게 되었습니다.
열두 명 중에서 절대다수에 해당되는 열 명의 정탐꾼들이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라고 불신앙적인 선동을 하자, 그 '사람의 소리'가 마치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리면서 '여호와의 명'을 까마득히 잊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백성의 말소리'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면서 자기를 위협까지 하는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모세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보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면서 지금까지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써 그들의 '출애굽'을 기적적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이시니 이제 그들의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도 역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간곡히 일깨워 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모세가 말하고 있는 대로 대세는 이미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들의 말'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리'는 그런 '하나님의 말씀'이 조금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미 그들의 귀와 마음속에 왕왕 울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소위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곳에는 자연히 '상식' '윤리' '예의' 따위는 설 곳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목소리로써 정치를 하려는 곳에는 '법'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어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사람의 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성경 말씀의 소리'는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다수결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금이라도 더 게으르고 편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은 신자가 된 후에도 대부분의 사람에게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사람의 중지라는 것은 오히려 진리와 반대되는 길로 가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란 근본적으로 '살인, 간음, 도적질을 비롯한 온갖 악한 생각들' 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소리가 판을 치는 소위 '민주적 교회'란 곳에는 결국 우리를 죄에서 출애굽시켜 주신 '십자가 대속의 사랑'까지 까마득히 잊어 먹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인들에게 성경 말씀의 명령이란 마치 하나님이 자기네의 행복을 빼앗아 버리시기 위하여 내리는 부당한 요구처럼 여겨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해 줍니다.
'주일은 꼭 예배를 드리면서 성수하자.'라는 것을 누가 다수결로 결정했습니까?
"안식일을 기억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성경 말씀을 따라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구별하여 온전히 바치자.'라는 것을 열심 있는 교인들이 모여서 자발적으로 가결했습니까?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지키는 것일 뿐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하려 하기 마련인 '사람의 말소리'가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거나 교회를 흔들지 않도록 오직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만을 들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람의 말소리가 압도하는 교회는 결국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됩니다.

34절부터 40절에 "34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35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36오직 여분네의 아들 갈렙은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하였은즉 그는 그것을 볼 것이요 그가 밟은 땅을 내가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리라 하시고 37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 가라사대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38너의 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그리로 들어갈 것이니 너는 그를 담대케 하라 그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39또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일에 선악을 분변치 못하던 너희 자녀들 그들은 그리로 들어갈 것이라 내가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산업이 되게 하리라 40너희는 회정하여 홍해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 하시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같은 반역적인 행태는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라는 최악의 사태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지금 모세를 통하여 명백한 말씀을 선포해 주고 계시는데도 그 앞에서 자기네 목소리를 더 크게 지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라는 저주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즉 가데스 바네아의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20세 이상 되는 "이 악한 세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두 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는 엄중한 징벌이 내려졌던 것이었습니다.

모세 역시 "여호와께서 너희의 연고로 내게도 진노하사"라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의 연고'란 가데스 바네아의 사건이 생긴 이후에 광야생활 도중에 있었던 일로서 바로 민수기 20장에 나오는 '므리바 사건'을 가리킵니다.
그때 모세는 물이 없다고 불평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목전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스스로의 흥분에 사로잡히는 죄를 저지름으로써 그 자신 역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대신에 출애굽 제1세대 중에서 오직 "갈렙"과 "여호수아"는 "온전히 여호와를 순종"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또한 "너희가 사로잡히리라 하던 너희의 아이들과 당일에 선악을 분변치 못하던 너희 자녀들" 다시 말해서 출애굽 제2세대와 광야세대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을 "산업"으로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회정하여 홍해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갈지니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교만은 그런 상황에서도 또다시 고개를 들었습니다.
바로 41절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서 그제야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사오니"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참된 회개가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저주를 돌려 보려는 속 보이는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혹 그것이 진심이었다 해도 너무나 늦은 회개였습니다.
그것은 마치 죄인이 재판을 받기 전에 자수하거나 죄를 시인하면 용서나 감형을 받을 수 있지만, 일단 재판장의 판결이 떨어진 후에는 아무리 뉘우쳐 보았자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올라가서 싸우리이다"라고 하면서 실제로 "병기를 띠고 경솔히 산지로 올라" 갔었습니다.
그런 행위를 두고 모세는 43절에서 "너희가... 천자히 산지로 올라가매"라고 했는데, 이 '천자(擅恣)하다'란 말은 '멋대로 천' 자와 '방자할 자' 자를 합친 것으로서 '제 마음대로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셨을 때에는 불순종해 놓고 이제 '광야로 들어가라'고 하실 때에 오히려 다시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방자하기 짝이 없는 불순종일 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볼 것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세일산"에서부터 아모리 족속의 "벌떼"와 같은 반격을 받고 그저 삼십육계를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세일산'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본토 근처까지 가 보지도 못한 채 그야말로 '초전에 박살'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가데스 바네아로 퇴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저 "여호와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하나님은 그들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실"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패전의 아픈 상처를 끙끙 앓는 가운데 46절에 기록된 대로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거한" 후에 원래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홍해의 광야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출애굽 이후 지금까지 지내온 2년에다 이제 38년을 더한 총 40년의 광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한 세대'의 죄악일 뿐입니다.
그처럼 '사람의 목소리'가 높아짐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결국 모든 축복을 잃게 될 뿐 아니라 징벌과 저주를 자초하는 꼴이 될 뿐인 것입니다.

다수결이 항상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며, 민주적으로만 결정하면 필연적으로 '좋은 결과'를 낳게 된다는 판단은 정말 위험합니다.
아테네는 민주주의 정치를 구체적으로 실천했던 대표적인 도시국가였습니다.
'400인 회의'는 아테네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는데 여기에는 귀족뿐 아니라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아테네 시민들이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회원이 되었습니다.
즉 아테네는 소위 '직접 민주주의'의 꽃을 피운 나라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직접 민주주의의 결정적인 약점인 '중우정치', 즉 '어리석은 대중의 다수에 이끌리는 정치'를 예리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래서 그처럼 '민주주의 정치'를 하고 있는 자기 조국 아테네보다도 오히려 '귀족 정치'를 실천하고 있던 스파르타를 이상적인 국가라고 생각하고 공공연히 칭찬했습니다.
즉 '어리석은 다수'보다는 '소위의 엘리트'가 나라를 이끌어 가야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들로부터 '반역자'라고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가 평소에 그렇게 강력하게 비판했던 '400인 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결국 독배를 마시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아테네의 최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처럼 완벽한 직접 민주주의를 자랑했던 아테네는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놓고 스파르타와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지면서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꼭 그것만이 이유라고는 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의 자유가 그토록 강조되고 사람의 목소리가 가장 높았던 나라가 소수의 귀족이 다스리면서 모든 시민을 철저하게 국가에 충성하도록 어릴 때부터 교육시켰던 나라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민주주의가 항상 최선은 아니다.'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 준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에서 소위 '직접 민주주의'를 외치는 사람들도 이 나라의 정치계를 그처럼 악화시키고 퇴보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슨 청문회라는 것을 열어도 자기 고집대로 되지 않으면 회의 자체를 뒤엎어 버리고, 국회의원조차 국회에 등정하지 않고 거리에 나가서 데모를 충동하는 나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소위 '민주적인 교회'를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교회 역시 반드시 그런 꼴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람의 목소리'가 판을 치는 교회는 결국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으며 '가나안 입성'은커녕 몇 십 년이 지나가도 여전히 '광야에서 유리'하는 꼴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말에 이번에 고려신학교를 졸업하게 되는 해외분교 출신 졸업생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자리에서 지금 베트남 선교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의 독노회 노회장이신 코아 목사님의 교회에서 장로들을 세운 이후로 그 교회가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부흥하고 있는지를 선교사님께서 제게 전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장로를 세우더라도 만약 그 분들이 국내 교회에 만연되어 있는 대로 '회의를 하고 말로 정치하는 것'을 장로의 직분이라고 생각했더라면 절대로 그런 축복을 받지 못했을 텐데, 그 장로님들은 처음부터 장로는 오직 '목사를 돕고 교회를 섬기는' 직분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교회가 부흥된 것"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선교사님 역시 완전 동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회든 제직회든 전도회든지 간에 교회 안에서의 '소리'는 단 하나, 항상 성경 말씀의 소리밖에 없어야 합니다.
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 주고 그 성경이 약속해 주는 축복을 그대로 일깨워 주는 것이 바로 목사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믿고 그 말씀이 명령하시는 대로 봉사 충성하는 일에 제일 앞장서야 할 사람이 바로 장로인 것입니다.
'사람의 목소리'가 압도하는 교회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면서, 오직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함으로써 진정한 교회생활을 축복의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는 구약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답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써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가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그런 모세의 리더십을 따르지 않고 자기네들의 판단과 요구만을 다수결로 밀어 붙였을 때에 광야교회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출애굽 제1세대가 광야에서 40년을 유랑하다가 다 죽어 버리고 이제 제2세대만 가나안 입성을 눈앞에 두고 서 있던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그 제1세대의 실패를 제2세대에게 일깨워 주면서 다시는 그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경고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 '장로교회'는 바로 이런 교훈을 그 어떤 교회보다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교회입니다.
"장로교회가 어떤 교회냐?"라고 누가 제게 묻는다면 저는 한마디로 '성경중심의 교회'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복음전파와 성도관리는 물론 행정 및 정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인 성경'만을 따라서 철저하게 시행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장로교회의 특징이요 장점이요 자랑거리인 것입니다.

침례교는 이와는 달리 '교인 중심'의 교회 즉 소위 '회중정치'를 하는 교회입니다.
말하자면 철저히 '직접 민주주의'식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리교는 '목사 중심'의 교회 즉 '감독정치'를 하는 교회입니다.
세상 정치에 비유하자면 '귀족정치'와 같은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장로교회는 목사의 성경중심의 설교를 따르고 당회의 성경중심의 관할과 치리에 복종하는, 세상 정치 형태를 빌어서 표현하자면 '대의 민주적'인 교회정치를 하는 교회입니다.
바로 그 '성경중심'의 교회만이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들리고 시행되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경향교회가 만약 철저한 '민주주의식의 교회 운영'을 해 온 교회였다면 오늘날의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고려신학교는 명실 공히 21세기를 위한 선지학교가 되어서 본교뿐 아니라 세계 각처에 21개의 분교들을 세우고 438명의 현지인 신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경향선교회 역시 파송 선교사 41명, 현지선교사 100명, 선교지교회 353개 곳, 선교지 성도 2만3천여 명을 헤아리는 엄청난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큰 일을 해 내는 가운데서도 이 강서성전 헌당을 비롯하여 경향회관과 교육관까지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기적적인 역사들 가운데 '교인들의 중지'를 모아서, 혹은 '장로들의 자발적인 제의'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오직 원로목사님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에 따라 합심하여 앞으로 나아간 결과 우리가 누리게 된 축복일 뿐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저 역시 우리 경향교회가 이처럼 철두철미하게 '성경중심의 장로교회'인 것에 대하여 큰 자부심을 느끼면서 계속 그런 교회로 지켜 가고자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는 것은 세상에서조차도 저질적인 인간관계, 무질서하고 불법적인 사회풍토를 조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더더군다나 하나님의 절대주권만이 주장해야 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 대신에 '사람의 목소리'가 더 높아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의 소리'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수밖에 없으며, 그런 교회는 가나안을 코앞에 두고도 애굽으로 되돌아가자는 불신앙적인 생각을 압도적인 다수결로 따라가게 되며 결국은 광야에서 유리하는 비참한 꼴을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 경향교회가 그래왔던 것처럼 오직 성경만을 우리의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뜻만 순종함으로써 진정 지금까지 경향이 받은 것보다 더 큰 '축복의 산지'를 기업으로 함께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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