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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어나 함께 기도하자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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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함께 기도하자 (눅 22:39-46)


I. 큰 슬픔의 때에

한 성도가 자신의 십자가는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자신의 십사가를 지고 천성가는 언덕을 오르는 꿈을 꾸었습니다. 또 자신의 십자가는 너무 크고 무겁다고 불평했더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십자가를 보여주며 바꿔지고 가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중 제일 작은 십자가, 빛나는 보석과 금으로 장식된 십자가를 짊어져 보았습니다. 

어찌나 무거운지 꿈쩍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그 속을 들여다 보니 아픔의 강철, 고뇌의 금강석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이번엔 장미꽃으로 장식된 화려한 십자가를 짊어졌습니다. 그러나 장미 가시들이 어깨 팔 다리를 찔러서 도무지 짊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 속을 들여다 보니 화려함 뒤에 눈물과 갈등이 가득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결국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감사와 기쁨으로 언덕을 오르게 되었더랍니다. 

여러분, 십자가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잘사는 사람에게도, 화려한 사람 뒤에도 십자가는 있습니다. 문제는 이 십자가를 어떻게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의미를 묵상하는 사순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 !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때입니다. 

편안히 잠자는 때가 아니라 깨어 기도하는 때란 말입니다. 

오늘 본문 45절에 퍽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슬픔과 고난, 염려와 걱정이 있으면 기도할 것 같은데 
“슬픔을 인하여(기도하지 못하고) 잠이 들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몹시 화가 나면 IQ가 80 - 돌고래 수준으로 떨어진답니다. 그래서 바른 판단과 바른 결정을 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극한의 슬픔에 빠지면 IQ가 70 - 원숭이 수준으로 떨어진 답니다. 
뭘하고 뭘하지 말아야 하는지 분간이 어려워진답니다. 
화가 한번 나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기분을 바꾸는데 여자들은 5분이 걸리고 남자들은 30분이 걸린답니다. 화가 난 남자들은 건드리지 말고 바나나나 먹을 것을 갖다 주라는 겁니다. 돌고래, 원숭이 수준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 큰 슬픔, 큰 염려에 빠져 기도하는 시간 기도가 불가능하며 오히려 잠이 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본문 45절에 보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제자들은 슬픔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스승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이 자신들의 고난으로 이어질 것을 알고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오히려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요나라는 선지자가 나옵니다. 니느웨를 위한 소명을 거절하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던 요나. 그 밑바닥에서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망각으로의 도피 ! 
“에라 잠이나 자자” 큰 갈등 속에 도피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나를 향한 구약의 외침은 무엇이었습니까? 
자는 자여 어찜이뇨? 슬픔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음성은 무엇이었습니까? “어찌하여 너희들이 자고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사회, 한국교회, 그리고 우리들의 삶의 정황과 무엇이 다릅니까? 지금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잠들어 있는 우리를 향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라!”

어릴 때 나뭇가지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안일도 숙제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신나게 놀다가 한 아이 손에 가시가 박힙니다. 그러면 아이는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며 집으로 달려갑니다. 
“엄마, 아파요. 가시가 박혔어요.”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 삶에 아픔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가정공동체에 민족공동체에 역사전체에 고통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달려들어가야 할 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생에서 감당키 어려운 고통을 만날 때 마다 달려갈 품이 있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는 품이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나의 삶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달려갈 때마다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품어주시는 자비로우신 그 분의 품, 역사의 운행자가 되시며 만왕의 왕되신 아버지의 품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박대했지만 언제나 박대하시지 않는 아버지의 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싼 삶의 상황이 어려워져만 갈 때에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 갈 것입니까? 집안이 기울어져 갈 때에 사업이 어려워 질 때에 직장생활이 불안할 때에 내 앞 길이 매우 불투명하고 불안하게 보일 때에 세상 사람들은 이 삶의 상황을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갑니까? 

우리가 살면서 어쩔 수 없는 난관과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때 
이런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있습니다. 
직면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끌어안고 정면돌파하는 것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방법입니다. 기도하면 상황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상황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합니다. 

II.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가?

기도할 때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첫째,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에 가장 영광스러운 결과는 기도하는 내가 변화하는데 있습니다. 
기도는 나의 잘못을 깨닫게 해줍니다. 나의 부족과 연약함을 알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불순종했던 나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우리 자녀들이 속을 썩여서 기도하다보면 나 자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속 썩이던 자식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신랑되신 우리 주님 앞에 나 자신이 얼마나 순결하지 못한 신부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업문제를 놓고 기도하다 보면 나 자신은 하나님의 도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회개하도록 해 줍니다. 신앙인의 가장 위대한 축복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세워줍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줍니다. 하늘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선 기도하는 나부터 변화시킵니다.

둘째,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문제를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행위입니다. 언제나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역사하실 기회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바로 그 순간에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나를 향해 역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 문제속에 하나님이 간섭하시도록 문을 여는 것이 기도입니다.

셋째, 기도는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나에게 부여해 줍니다. 

물이 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수영을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문제가 어려운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풀 수 있는 실력 없음이 문제입니다. 이때 기도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 풀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기도는 만사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넷째, 기도는 감사와 찬송을 가져다 줍니다.

찬송은 가장 신령한 차원의 기도요 곡조가 붙은 기도입니다. 
세계 수 많은 종교 가운데 기독교에만 찬양이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눈을 만든자가 보지 않으랴. 귀를 만든자가 듣지 않으랴”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필요했고 미켈란젤로가 필요했습니다.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는 헨델이 필요했고 하이든이 필요했습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를 고발하는 한 상소문에는 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정한 날 정한 시간에 모여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마쳤다.” 

지금 우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기도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옛 평양신학교에 최봉석이란 학생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면 그는 눈물을 펑펑 쏟아냈습니다. “너는 왜 기도만 하면 우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대답했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으면 일본에 빼앗긴 우리나라가 불쌍하고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난다. 그리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해서 눈물이 난다.”

III. 영적 전쟁터에서 

무엇보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의 영적 승리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해 집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해야 역사가 행복해 집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기도의 동산에 올랐던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 그것은 곧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과의 싸움도 아니었고 제사장들의 문제도 아니었고 
헤롯이나 빌라도의 문제도 아니었고 
바로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신앙생활에 승리하기 위한 마지막의 적, 가장 무서운 적이 있다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사회에서 멋지게 승리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싸움에서 아름답게 승리하던 사람이, 어려운 상황 속에도 멋지게 승리하던 사람이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처절하게 깨어지고 좌절하고 자기 앞에 패배하는 모습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던 분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노도 광풍을 잔잔케 하시던 능력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 분이 왜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그 시간에 기도해야만 했을까요? 

일찍이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해야 했습니다. 
자기를 꺾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동산에 올랐습니다. 
기도는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눈에 보이지 않는 위대한 한 사역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운데 위대한 설교와 위대한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연약한 민초들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중간 중간 눈에 보이지 않는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기도의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큰 기적을 베푸신 다음 홀로 산에 올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했습니다.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고요한 새벽 미명에 일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분의 가르침이 권세 있는 자와 같을 수 있었던 비밀이었습니다.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 베풀어 주실 수 있었던 신비가 바로 기도 가운데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능력이, 이런 신비가, 이런 비밀이 나갈 수가 없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부부가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가정에서 어린 자녀들을 함께 불러 모아 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놓고 가장된 사람이 기도해야 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교회에 시대적인 비전을 주셨는데 그 비전을 함께 이루기 위해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한국교회가 이제는 좀 더 진실하게 아버지 앞에 나와 항복하고 무릎 꿇고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전능하신 아버지의 자비를 구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주님 고난 당하신 이 고난의 절기 - 깨어 기도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령 받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하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이 땅에 가장 연약한 사람들이 손에 손을 붙들고 기도하게 될 때에 
하늘의 신비한 권능을 체험하고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받은 사람들이 기도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기도로 내 이웃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람들을 가슴에 품고 내가 해야 할 가장 위대한 사역은 기도하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가장 무서운 적은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다.

기도하지 않고 성공하면 성공 때문에 망합니다. 실패가운데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가장 비참한 실패에 내가 빠져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내가 실패자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도할 수 있다면, 하나님 앞에 한걸음 더 전진할 수 있다면, 실패가운데서도 살아계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성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IV. 기도는 호흡

기도는 행사가 아닙니다. 기도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기도는 끊임없이 숨을 쉬는 심장의 박동입니다. 
기도는 호흡과도 같습니다. 

수영을 배울 때 제일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이 호흡법입니다. 이 숨쉬기가 잘못되어 있으면 수영선수가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메케한 물만 마시다 나옵니다. 

우리의 육체가 탄생의 첫 울음과 함께 호흡을 시작하여 이 땅을 떠나는 그날까지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난 그날부터 성도는 기도의 호흡으로 살아갑니다. 

이 기도의 호흡이 잘못되어 있으면 건강한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물속에 빠져 실신한 사람을 건져내 제일 먼저하는 일은 호흡을 살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병든 사람을 살리는 길은 죽은 기도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약 60조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포들의 움직임을 보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지 모릅니다. 입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온 영양분은 60조개나 되는 세포에 똑같이 나누어집니다. 그 속도는 1초 만에 지구를 한 바퀴를 도는 만큼의 매우 빠른 속도입니다. 살이 찌면 온 몸이 뚱뚱해지고 살이 빠지면 온 몸이 홀쭉해집니다. 한쪽 볼만 살찌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온몸이 균형있게 살찐다는 것은 영양분이 골고루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60조개의 세포들은 완전한 사랑의 유기적 관계를 유지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을 가지고 공평하게 배급을 준다 하더라도 더 가는 곳이 있고 덜 가는 곳이 있게 마련인데 우리 몸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영양 공급에서 빠진 세포가 있다면 그 세포는 곧 죽고 말 것인데 다행히 우리 몸은 완벽한 분배로 똑같이 영양분을 나눕니다. 이렇게 똑같이 나누어서 먹어야 하는데 자기만 독식하는 놈이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놈을 일컬어 ‘암세포’라 부릅니다. 

그래서 자기만 아는 사람들을 보고 ‘암적 존재’라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몸이 신비하고 과학적이라고는 하지만 참으로 궁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음식물도 목으로 들어가고 공기도 목으로 들어가는데, 어떻게 정확하게 이 둘이 제 갈 길을 찾아 가는가 하는 점입니다. 간혹 음식이 기도로 잘못 들어가게 되면 재채기를 해서라도 밖으로 다시 튀어나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호흡이라고 말씀하실 때 여기 진리가 있습니다. 
기도는 밥 먹듯 하루 세 번 띄엄띄엄 하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 쉬듯이 피가 돌듯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호흡입니다. 
하루종일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도요, 
잠자리에 들면서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한국교회가 세계에 수출 할 수 있는 최고의 영적 상품이 기도운동입니다. 

새벽기도운동입니다. 저는 한소망교회 같은 건강한 교회가 여기 있으므로 이 도시의 품위가 달라진다고 믿습니다. 우리교회의 예배, 교육, 특별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새벽기도, 능력기도는 세계 어디 내어 놓아도 자랑할 만한 영적 상품가치가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도로 이 도시, 이 나라 - 영적 품위와 품격이 달라지기를 원합니다. 

V. 기도 비상

사랑하는 여러분, 비범한 상황은 비범한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필사적인 기도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제자들이 잠들어 있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소리치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 몸부림치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피곤하여 졸면서도 언뜻 언뜻 예수님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이 잔을 내가 마시지 않고 다른 길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잠속에서도 예수님의 절규의 기도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제자들은 성경을 기록할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절규하던 예수님의 기도소리를 똑똑히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기도할 필요가 없는 유일한 분이 있다고 하면 바로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기도하셨습니다. 매달려 기도하셨습니다. 피를 토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함께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이 민족이 하나님 앞에 돌아와야 할 때입니다.  

한국교회가, 한국정치가, 한국 기업문화가 새로워져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잠들면 민족이 잠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면 민족이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가정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의 자식들이 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쓰러진 그 자리 절망했던 그 자리, 낙망했던 그 자리에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희망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절규하며 기도하던 그 밤 한 비극적인 기록을 본문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눅 22:45-46)

잠자는 자는 말이 없습니다. 대화가 끊어집니다. 영적 대화, 기도가 단절된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잠자는 자’란 ‘죽은 자’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 영혼이 병들어 죽은 상태를 말합니다. 잠자는 자는 행동이 없습니다. 
사역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라 ! 
지금 당신은 잠잘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깨어 기도해야 할 사람입니다. 
비상한 축복을 위해서는 비상한 기도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조금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시며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유대인들은 종종 기도할 때에 서서 기도합니다.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에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고 영광스런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은 일어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곤 했습니다. 감사할 때에 찬양할 때에 삶이 평범하게 잘 펼쳐져 갈 때 우리는 그렇게 위엄을 갖추어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낭만적으로 폼을 갖추어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땅에 엎드려 몸부림하며 절규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41절에 보면 예수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도의 자리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여겨져서 43절에 보면 “천사를 보내 기도를 도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44절에 보면 얼마나 처절하게 매달려 하나님앞에 몸부림하며 기도했던지 “땀방울이 피방울이 되어서 뚝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었다는 이 말은 막연한 과장법이 아닙니다. 정신적인 극한의 고통과 집중 속에서는 정말 땀이 붉은 피가 되어 흐른다고 의사들은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생명을 거는 기도, 땀이 피가 되는 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다고 하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비틀거리는 역사, 목표를 알지 못하고 질주하는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가만히 바라만 보아도 되는 것입니까? 

무너져 가는 기업을 바라만 보며 울며 역사를 한탄만 하고 있어도 되는 것입니까? 방황하는 내 자식들을 바라보며 침체되어져 가는 영적인 이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구경꾼으로 전락해도 좋더란 말더란 말입니까? 

핏방울이 땀방울이 되도록 절규하며 비명이라도 질러야 되는 때가 아닐런지요? 
한국교회가 한계가 없는 부흥을 보길 원한다면 비상한 기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민족을 살려 주소서. 한국교회에 부흥을 주소서. 
몸부림해야 한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느끼지 않습니까?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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