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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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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욘 4:1-11)


1. 생명의 가격

한 사람의 생명의 가격이 얼마나 될까요?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다고요. 한 사람의 생명은 천하를 다 주고도 바꿀 수 없을만큼 귀합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의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0여년 전, 세계은행(World Bank)의 수석 경제학자였던 미국의 로렌스 서머스는 부유한 나라의 쓰레기를 가난한 나라에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나라는 임금이 낮기 때문에 쓰레기장의 작업자가 사망하거나 병에 걸리더라도 국가적인 손실이 덜하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에 대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가난한 사람의 생명과 부자의 생명의 가치가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을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얼마 전에 시리아 독재정부에 대한 반정부 데모를 취재하던 영국 선데이 타임즈 기자인 마리 콜빈이 시리아 정부군의 포격을 받아 사망했습니다. 그는 최근의 리비아, 이집트 등의 민주화 혁명을 취재하였고, 지난 2001년 스리랑카 내전을 취재하다가 왼쪽 눈과 청력을 잃어서 눈에 안대를 하고 다녔습니다. 시리아 혁명 취재가 몹시 위험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가 목숨을 걸고 뛰어든 것은 시리아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하루 속히 시리아가 민주화 되고, 고귀한 생명의 희생이 더 이상 없어야 되겠다는 생명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 예수님의 생명을 버릴 정도로 가치있는 것입니다. 

2. 생명보다 물질에 더 관심을 가진 현대인

그런데, 요나는 어떠합니까? 니느웨가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릴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을 안 요나는 “매우 싫어하고 성냈다”고 합니다. 니느웨에 사는 12만명의 시민을 살려주신 것이 요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성낸다”는 단어는 히브리어 의미로 ‘불이 활활 타오른다’ 는 뜻입니다. 속에서 불이 났다는 것입니다. 속칭 뚜껑 열린다는 것이죠. 
열받은 요나가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지 않습니까?”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 받았을 때, 이미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실 생각이 없으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니느웨를 살리기 위해 요나를 보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과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악한 도시 니느웨는 망해야 한다고요. 자기가 다시스로 도망한 것은 니느웨를 망하게 내버려둔 것이라고요. 
그런데, 요나는 2절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을 얼마나 잘 합니까?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가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이방나라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악한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화가 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 대해 너무 관대하다고 말입니다. 

요나는 화가 나서 니느웨 성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어떻게 되나 보자 하고 구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하여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그늘이 지게 하셔서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6절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12만명의 목숨을 살려주신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 성내고 싫어하면서, 자신을 시원하게 해준 박넝쿨로 인해서는 그렇게 기뻐하였다니...

이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보다 박넝쿨이 더 좋다니....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은 것 같지만, 우리 자신도 역시 그러하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가지만, 우리는 거기에는 무관심합니다. 그보다 올해 월급이 얼마나 올랐나 여기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3.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어찌 아끼지 않겠느냐?

요나의 분노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10-11절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루살이 박넝쿨도 이렇게 아끼는데,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12만명의 사람과 많은 가축을 어찌 아끼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니느웨의 악만 보시지 않고, 그 안에 사는 12만명의 시민과 가축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을 어찌 아끼지 않겠습니까? 
여기의 “아끼다”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어로 “눈”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눈으로 아껴본다,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본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로 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시민들을 눈물 흘리시며 불쌍히 여기신다는 뜻입니다. 

시편145: 9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런 마음이 글로벌 마인드, 세계시민의식입니다. 
세계 시민이 모두 한 형제요 자매라는 의식입니다. 
요나에게는 이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1964년 제노베스라는 20대 후반의 처녀가 밤늦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집 근처에서 괴한에게 습격을 당하여 살해되었습니다. 이 처녀는 갑작스럽게 아무 소리없이 살해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고통을 겪으며 수많은 목격자 앞에서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살인범은 무려 35분 동안 대로에서 그녀를 쫓아 다니면서 3번이나 그녀를 칼로 찔러 살해하였습니다. 더군다나 그녀가 습격당하고 있는 동안 38명이나 되는 그녀의 이웃들은 아파트 창문을 통해 그녀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그 어느 누구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답니다. 왜 선량한 시민들이 단 한 명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을까요? 

학자들 중 몇 명은 그들이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는 사건에 말려들어 사생활이 침해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충분치 못합니다. 
당시 대중매체들은 구경꾼들의 행동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이제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매정한 사회에 살고 있다. 현대인의 삶, 특히 도시인의 메마른 삶이 우리를 이토록 척박하게 만들었다.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의 곤경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고 매정하게 대하는 인정이 메마른 사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현실적인 해석은 이러합니다. ‘누군가 도와 주겠지’ ‘아마도 누군가가 이미 경찰이나 병원에 신고했을거야’ 라고 모두 생각했을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로버트 치알디니, 설득의 심리학, p.201-205)

우리 주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죽음인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이 우리 가까이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박넝쿨 때문에 기뻐하기도 하고, 그 박넝쿨이 사라지면 슬퍼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무한경쟁사회, 각박한 현실에 치여 살다보니,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21세기 요나의 모습입니다. ‘내가 안해도 누군가 하겠지,’ ‘내가 못 도와줘도 나보다 여유있는 누군가 도와주겠지.’
이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도시에 200만명이 넘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악한 니느웨 시민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껴주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이 땅 시민들을 아끼지 않겠습니까? 

4.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마지막으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니느웨만 아니라, 요나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2절에 요나가 고백한 하나님을 다시 생각해봅시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가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말 안듣는 요나에 대해 얼마나 은혜로우시며 자비롭게 대하십니까?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그에게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지 않습니까?

요나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갈 때, 풍랑을 일으키시고,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시고, 육지에 토해내어 제2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성내고 대들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참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넝쿨을 요나를 위해 준비하셨습니다. 벌레를 예비하시고,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심으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왜 사랑하실 수 밖에 없는지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요나를 끝까지 심판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사랑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입니다.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를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마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마10:29-31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물며 너희일까보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우리가 요나처럼 때때로 분순종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모릅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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