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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 1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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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시 121:1-8)


시편 121편 전반부를 각색해보았습니다.

내가 저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 산인가? 그 산인가? 아니야.

저 산들이 나의 도움인 줄로 알고 그것을 의지했을 때 나의 삶은 엉망이 되어버렸어.

구원의 감격도 없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했어. 

그러나 오랜 방황 끝에 이제 깨달았어. 나의 도움은 저 산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야

저 산들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내게 도움을 주신다, 나를 지키신다, 나를 인도하신다.

영적으로 파산 지경에 이른 지금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회복시켜 주신다.


각색한 부분을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시인과 같은 경험을 가졌거나 지금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중고등학교 때는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대학을 진학하고 직장을 다닌 후에는 주님과 멀어졌다는 후회가 생깁니다. 결혼 전에는 그래도 교회 열심히 다녔는데 아이 키우느라 애를 쓰다 보니 어느 새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건강할 줄 알았는데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리고 나니 건강할 때 주의 일을 좀 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둡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겠다고 좌충우돌 살다보니 벌써 인생 황혼 길에 접어들었다는 마음이 듭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어떤 일을 당할지라도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여전히 새날이 밝아옵니다.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인하여 후회스럽거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편 121편을 함께 살펴보면서 사순절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흐트러진 신앙생활을 점검하면서 영적으로 각성하고, 신앙의 열심을 회복하고,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열매를 보여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 330장 2절을 불러 볼까요? 

시편 121편에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그 히브리어 표제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오름의 노래’ 또는 ‘계단의 노래’입니다. 표제에는 성전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성전을 추가한 이유는 여기서 말하는 계단이 성전에 올라가는 계단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산을 향하여" 하면서 '산'은 단수로 번역되어 있으나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복수형으로 나옵니다. 더구나 산들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있습니다. 아무 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산들을 가리킵니다. 그 산들은 시인이나 이 글을 읽는 일차 독자들에게 아주 잘 알려져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아주 높고 웅장한 산은 없는 대신 구릉과 산지가 많습니다. ‘산’은 시온 산을 비롯한 예루살렘 주변 산들을 가리킵니다. 저는 아직 성지순례 가보지 않았지만 예루살렘은 수도로 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라고 합니다. 해발 760m에 위치해 있고 동쪽으로는 기드론 골짜기, 서쪽으로는 중앙 골짜기와 힌놈 골짜기로 연결되어 있어 예루살렘은 적군의 공격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천연 요새입니다. 예루살렘의 이런 지정학적 환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존과 안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이후 다윗이 예루살렘에 수도를 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옮겨 다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호와는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마른 광야에서 그들을 지키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와 같은 돌보심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가르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였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하였고, 아침마다 어김없이 내려오는 만나를 통하여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과 주변에 있는 산들이 든든한 방패가 되어 적군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준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출애굽을 거쳐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열정이 약화되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 환경이나 수고는 헛될 뿐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다른 민족의 침략으로 인한 위협은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들 가운데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니 백성들은 어느 때보다 영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한국에도 60년대까지 보리고개가 있었습니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보니 독일에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파견하고 대통령이 구걸하다시피 하여 차관을 얻어왔습니다. 국가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잘 살아 보세'가 국가적인 구호가 되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잘 산다'는 말은 ‘돈이 많다’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한국 교회는 모이기를 힘쓰고,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부흥회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60-70년대가 한국 교회 최대의 부흥기였습니다. 교회성장이 경제성장과 맞물리다 보니, 물질주의가 교회에도 침투하여 영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예를 많이 들면서 신앙생활 잘하면 그들처럼 부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물질적인 복은 많이 강조하였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치는 것은 소홀히 하였습니다. 그 결과가 이제 나타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열심히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등이 따듯하고 편안해지다보니 그 열정이 많이 식어버렸습니다. 세상 속에서 믿는 자의 구별된 모습을 별로 보여주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90년대 접어들면서 한국교회는 성장이 두드러지게 둔화하였고 요즈음은 정체 내지는 심지어 감소 징후도 보입니다. 현재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많이 파송하고 경제적인 번영을 바탕으로 많은 사업도 벌이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위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외적인 환경을 의지함으로 하나님을 멀리 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기를 인식한 시인은 영적 각성을 촉구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바라보며 도움은 그 산들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에 시인은 단호하게 외칩니다. 진정한 도움은 병풍과 같이 둘러선 산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산들을 지으신 여호와께로부터 온다는 겁니다. 그들이 광야를 지날 때 그 산들과 같은 방패는 없었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광야 생활에서 그들이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한 역설적인 진리를 점차 잊어가고 있음을 깨우칩니다. 

하나님은 도움의 근원이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고난과 역경을 만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을 때에 오직 말씀으로 모든 것을 만드셨습니다. 무질서 속에서 질서를 세우셨습니다. 하늘을 만드시고 땅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대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둘러 진을 치고 있고, 산이나 바다가 가로막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능히 주의 백성들을 건져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생기게 하십니다. 옥문도 여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시인은 '여호와'와 '지키다'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던 모든 길에서 대적의 위협으로부터 그들을 지켜 주시고, 또 그들에게 물과 음식을 공급해 주시고, 연약할 때 힘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지켜 주셨고,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까지 가는 동안 경험했던 모든 위험에서도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지키시는 분입니다. 
 
어떻게 도우십니까? 

수학적으로 무한대 나누기 1은 무한대. 무한대 나누기 100도 무한대입니다. 무한대 나누기 인류 인구인70억 또한 무한대입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은혜를 원하더라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채워주실 수 있습니다. 3절에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고 했는데 4절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한 개인만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큰 민족 전체를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신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어려움 가운데서도 힘을 주셔서 넘어지지 않고 걷도록 붙들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땅과 기업을 주시고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수많은 대적들로부터 그들을 구원해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시고 채워주십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의 돌보아주시는 은총을 믿고 전진하면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라도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통해 구속하신 그 백성을 돌아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문제들이 하나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이 어려움 가운데 반드시 피할 길이 있고 이길 수 있다는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도우십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121:4).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신들은 잠을 필요로 하고 잠을 잘 권리가 있는 존재로 나옵니다. 그래서 신이 사람들의 소음 때문에 잠을 방해받게 되자 각종 재앙을 보내고 결국에는 홍수로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잠시도 우리를 향한 시선을 떼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은 전혀 없습니다. 바다 끝에도, 심지어 스올에도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물론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밝히 아시며, 모든 행위를 통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그늘이 되어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시며 낮의 뜨겁고 심지어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해뿐 아니라 밤의 음침하고 두려운 달빛으로부터 지켜 주신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나가고 들어오는 일처럼 수시로 발생하는 모든 일까지도 돌보아 주시며, 온갖 종류의 하나님 일상생활에도 친히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영혼을 지켜주십니다.  

누구를 도우십니까?

창조주 하나님은 또한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고, 왕들 중에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자손과 땅과 하나님의 임재의 복을 받았지만, 나중에는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죄와 불순종 때문이었으며, 행한 대로 갚으신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기억하시고, 바벨론에서 포로로 있던 이스라엘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그들이 깨뜨렸던 하나님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과 복은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부터 땅의 모든 족속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언약과 복이 궁극적으로는 온 세계 모든 이들을 향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지만 영적인 믿음의 자손이며,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 언약을 맺고 그분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에 수반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언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복을 받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만을 의지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 우리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알았으면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우리의 본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 우리의 죄악 됨, 우리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영적 각성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그분의 도움이 임합니다.  

1)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노이아’는 ‘변화’라는 의미의 헬라어 ‘메타’와 ‘마음’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누스’가 결합된 단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생각의 변화’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생각의 변화’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죄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이킴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둘째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후 돼지를 치며 살아가다가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후회는 자신의 잘못에 대해 자책은 하지만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자신이 한 잘못에 대하여 뉘우치며 그것에서부터 돌이킵니다.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 그냥 탄식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가룟 유다는 후회를 했지만 회개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목매어 자살했지만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는 않았습니다. 참된 회개가 죄에서 돌이킴이라면 우리는 수시로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시로 죄를 범하며 잘못된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자백’으로 번역된 헬라어 ‘호몰로게오’는 ‘같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호모’와 ‘말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로게오’기 합성된 단어로 /같이 말하다/ 즉 ‘죄에 대하여 하나님과 동의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에 동의하고 죄를 미워하며 더 나아가 죄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갈망을 표현합니다.  그런 회개의 삶을 통해서만 천국의 삶이 임하게 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며 각자의 삶을 돌아봅시다. 

잠시 여러분의 삶을 돌아봅시다. 끊어야할 악한 습관은 없습니까? 아무도 모르지만 은밀한 가운데 자행된 죄악은 없습니까? 종교적 말과 행위로 포장된 위선은 없습니까? 이 모든 것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인정하며 자기중심적 삶과 온갖 종류의 탐욕,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관과 태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머리를 뜯고 가슴을 쥐어박는다고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회개도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통회하고 자복하고 버리는 결단을 하도록 성령께서 회개할 힘을 주셔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를 하려면 위로부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회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을 부어주셔서 우리를 깨끗케 하며 우리를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철저히 인정하고 돌이키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2) 하나님께 눈을 들어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고난을 당하면서 많이 생각해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내린 결론은 세상의 어떤 것도 자기를 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다면 끝장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할 마음이 생기면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때만 온전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절망 가운데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이며, 그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하는 것이 산을 향하여 눈을 드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은 있지만 절망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하늘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말해주는 책입니다.

렘 33:2,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마 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무엇보다도 영적인 능력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성령을 통하여 옵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용서할 수 있는 능력, 원수를 위해 기도해줄 수 있는 능력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자들만이 가집니다. 우리 모두 하늘에 속한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도움의 근원인 것을 깨달은 자들은 찬양을 회복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요 주관하시는 통치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참 신이시며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위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의 손으로 온 천지를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생의 작은 일까지도 아시고 다스리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은 영원합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고 앞으로도 예비하신 아름다운 것을 주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묵상하고 기억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자인지 깨닫게 됩니다. 이제 우리의 입술에 부정적인 말, 험담, 비방, 원망, 걱정거리를 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고백해야 합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  

40년 광야 유랑이 거의 끝나갈 무렵입니다. 호르마라는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먹을 양식도 없고 물로 없으며 먹을 것이라고는 이제 싫증나는 만나뿐이라고 불평을 했습니다.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평을 듣고 먹을 양식을 공급해주셨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평에 진노하셔서 불뱀을 백성들 중에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에게 자기들이 원망과 불평의 죄악을 범했음을 인정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뱀들이 떠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에 모세는 백성을 위한 중보기도를 드렸고,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고 명하시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누구든지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세가 만들어 장대 위에 단 구리뱀을 본 자는 누구든지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통 가운데 땅만 바라보고 여전히 불평을 한 자들을 다 죽고 말았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이 사건을 인용하며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철을 계속 밟습니다. 그러나 시 119편에 나오는 시인과 같이“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말씀을 배우게 되었다”고 고백하며 고난을 통하여 삶의 초점을 다시금 하나님께로 맞추면 신앙생활을 회복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현 주소를 알아야 합니다. 잘못 가고 있으면 즉시 주님께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영적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진정한 도움은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4000년 전 아브라함 때나, 3500년 전 모세 때나, 3000년 전 다윗 때나, 2000년 전 예수님 때나 여전히 동일합니다. 구원의 소망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결정됩니다. 헛된 우상이나 세속적인 성공의 모델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인생의 주인이요 사랑의 긍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의 아딴 것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눈을 드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전능자의 그늘로 피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우리가 처한 상황을 아시며,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줄 마음을 갖고 계시며, 그뿐 아니라 해결해 줄 마음을 갖고 계시며, 그뿐 아니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자이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지치고 힘들 때도 있지만 하나님만이 도움이시라는 너무도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붙들면서 전능자의 그늘에서 쉼을 얻고 열정과 은혜를 회복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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