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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먼저입니까? (마 8: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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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먼저입니까? (마 8:18-22)

오래된 썰렁한 유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을 아십니까?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넣는다. 문을 닫는다.’ 그러면 기린을 냉장고에 넣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냉장고 문을 연다. 기린을 넣는다. 문을 닫는다?’ 아닙니다. ‘냉장고 문을 연다. 코끼리를 꺼낸다. 기린을 넣는다. 문을 닫는다.’입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순서가 뒤바뀌면 일을 제대로 풀어갈 수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유머에서 기린을 냉장고에 넣을 때 먼저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코끼리를 꺼내야만 기린을 넣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순서인데, 우리는 기린을 넣어야 한다는 것만 생각한 나머지 코끼리 꺼내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냥 웃자고 만들어낸 유머이지만 인생의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요? 커다란 통에 큰 돌과 자갈과 모래를 가득히 채우는 방법은 큰 돌부터 넣는 것입니다. 큰 돌을 넣고 자갈을 넣으면 큰 돌 사이의 빈 공간에 자갈이 들어갑니다. 그런 후에 모래를 넣으면 모래가 자갈이 들어간 후 생긴 빈 공간을 채워줍니다. 그런데 거꾸로 부피가 작은 모래부터 넣으면 자갈이나 큰 돌이 들어갈 자리가 남지 않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순서에 따라서 성취되는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양의 돌과 자갈과 모래일지라도 넣는 순서에 따라서 통에 다 넣을 수도 있고, 다 넣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곧 우선순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달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대부분의 경우 중요한 일을 먼저 합니다. 그런데 어떤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 차이 때문에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선순위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때로 갈림길에서  분명하게 선택하고 결정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의 신앙은 무엇을 먼저 선택할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걸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보다 먼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게 하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 요한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태복음 3:5-6) 수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몰려와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례 요한이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자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세례 요한이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내 ‘당신이 메시야 아니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마만큼 세례 요한은 당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심의 초점이 세례 요한에게 비춰져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백성들로부터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spotlight)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자신에게 집중된 그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바꾸어주었습니다. 예수님에게로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나는 그분의 신을 들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등장하시자 ‘이 분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에게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관심이 집중된 가운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예수님은 첫걸음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된 산상수훈의 말씀을 선포하시자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굉장히 놀랐습니다. 지금껏 그런 권위있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의 진리를 그렇게 명확하게 가르쳐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본문 바로 앞인 마태복음 8: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중풍병에 걸려 있던 백부장의 하인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줍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예수님은 놀라운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에워쌓다.’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던지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시려 했습니다. 
 
그 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 앞에 나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는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서기관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왜 그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서기관은 원래 왕을 보필하는 높은 지위의 관리였습니다. 그런데 구약성경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서기관은 종교지도자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가 멸망한 이후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기록하는 일을 서기관이 맡았습니다. 그러기에 서기관은 율법에 대한 전문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율법을 필사하고 연구할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해석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일도 했습니다. 

또 율법에 근거해서 어떤 것이 옳은지 판단하는 재판관 역할을 하기도 했고, 율법을 전수할 제자들을 양성하는 일도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신학교 교수나 성경학자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랍비(선생님)라는 칭호로 불리면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마태복음 23:6-7절에 당시 서기관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백성들의 어른으로 또 선생으로서 존경과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면 주변에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존경의 뜻으로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잔치에 가거나 회당에 가면 사람들은 그들을 높은 자리(귀빈석)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로서 그렇게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대우를 받고 있던 서기관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는 랍비라고 불리면서 다른 사람을 제자로 삼아 제자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누군가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그에게 굉장한 수치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랍비라고 존경을 받고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쳐야 할 그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성경해석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합니다. 성경은 그 정확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요청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는지도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후 문맥을 통해서 우리는 이렇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그 누구보다도 인기를 얻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모습에서는 율법교사들인 서기관들보다 더 권위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시는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권위 있게 말씀을 전하는 방법이나 지혜를 배울 수만 있다면,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능을 전수받을 수만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백성들로부터 받은 존경은 몇 곱절 더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 서기관은 그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이 말씀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푼다면 이런 말입니다. ‘내 제자가 된다 한들 세상에서 얻어지는 것 하나도 없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에워싸일 만큼 인기를 얻고 있지만 나는 누추한 집 한 채 없단다. 내 제자가 되는 길도 그와 같다. 그런데도 내 제자가 될래? 정말로 내 제자가 되고 싶으냐? 내 제자가 된다고 뭔가 얻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더 가난해지고 더 초라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여러분,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더 많은 영광이 주어지는 것 아니다. 어쩌면 더 힘든 길을 가야 한다. 내 제자가 된다는 것은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비워야 하고 더 많이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데도 정말로 내 제자로 살래?’ 
  
이런 주님의 물음 앞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 믿고 더 행복해지고 싶어했는데, 예수 믿으면 더 건강해지고 더 좋은 일만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제자들에게는 주님께서 더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나를 따르는 너희들, 그런 나와 함께 그런 삶 삶을 살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자의 삶에 좋은 것만 가득하다면 세상 누군들 예수 믿으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병이 당장 낫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고 잘 안 되던 사업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금새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그런 것들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더 고난을 받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더 많은 것을 희생하고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래도 예수를 믿으시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요 참 믿음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더 많은 것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서기관은 어떤 결정을 내렸겠습니까?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했을까요? 아니면 조용히 물러가고 말았을까요? 우리는 궁금한데 성경은 그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그 서기관이 아니라 오늘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때로 서기관처럼 지금보다 훨씬 더 나은 뭔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예수를 따르겠다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첫 번째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적과 방법 중에 무엇이 먼저여야 합니까? 우리는 방법보다 목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배워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삶에서는 목적보다 방법이 더 중요시 여겨지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등 하는 것입니까? 좋은 대학에 가는 것입니까? 1등을 하고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은 방법일 뿐입니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요 과정일 뿐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학생들이 그 과정을 목적으로 착각합니다. 참된 목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방법이나 과정을 목적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1등 하려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좋은 대학에 가려고 죽도록 공부합니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1등을 했다면, 그래서 좋은 대학에 갔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참된 인생의 목적을 갖지 못하면, 그 목적을 상실해버렸다면 1등을 해도 무의미하고, 좋은 대학에 갔다는 것도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에도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어가는 방법과 과정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자가 되는 것입니까? 부자가 되는 것이 예수 믿는 목적이라면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부자가 되려면 교회당에 오실 것이 아니라 지금도 일터에 나가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경제전문 잡지를 읽고 돈 버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어느 주식을 사야 빨리 부자가 되고, 어느 아파트에 투자를 해야 많은 시세차익을 낼 수 있는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목적이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기 계실 것이 아니라 병원에 가시든지 천변에 나가 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등산을 하고 헬스클럽에 가서 땀을 흘려야 합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 예수를 믿으십니까?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여기는 그것을 가르쳐주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부귀영화 누리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목적은 예수님을 닮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어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예수 믿는 목적입니다. 이것이 먼저가 되지 않고 부차적인 것이 우선시 된다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궤도를 수정해야 합니다. 지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재설정해야 합니다. 잘못된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가시다가 예수님께서 다른 한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오늘 본문에서는 그가 먼저 예수님께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누가복음 9장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먼저 그 사람을 향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를 ‘제자’라고 가르쳐줍니다. 아마도 그는 이미 예수님께로부터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아니면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돌아가신 아버지를 장사하는 것은 아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아들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들로서 마땅히 해야 할 아버지의 장례조차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큰 오해를 낳게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말씀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기독교는 부자지간에 마땅히 갖춰야 할 윤리조차도 무시하는 불효막심한 종교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루지 못하게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냐 하는 것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서기관에게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의 목적을 분명히 가르쳐주신 것처럼, 여기에서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냐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따라나섰는지 되돌아갔는지 그 결과를 기록하지 않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그 제자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러 갔는지 가지 않았는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말씀만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도 이 제자는 갈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치러야 하느냐, 아니면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 길을 계속 가야 할 것이냐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정해 주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먼저라고 말입니다. 먼저 해야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이 있는데, 먼저 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주님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라는 것이니다. 

우리는 종종 중요한 것과 시급한 것을 구별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다급한 일이 일어나면,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버립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시급한 것과 중요한 것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시급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급한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다급한 일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틈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할 때에도, 교회를 섬길 때에도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고 중요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둘을 혼돈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다급해서 빨리 처리해야 할 일도 며칠 지나고 나면 별로 다급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뜻입니다.
  
상담할 때도 종종 그런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상담을 하고 싶어 합니다. 빨리 해결하지 않으면 뭔가 큰 일이 날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상담하는 사람은 의도적으로 ‘지금은 상담 일정이 다 잡혀 있으니 3일 후에 오라’고 시간을 잡아 줍니다. 그러면 상담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안달은 나겠지만 상담하는 사람이 시간이 안 된다고 하니까 3일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3일이 지나 상담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상담받겠다는 사람이 안 나타납니다. 그러면 전화를 해서 ‘왜 안 오느냐?’고, ‘오늘 만나서 상담하기로 했지 않느냐?’고 말하면 ‘이제는 안 가도 되겠다.’고 대답합니다. 처음 전화를 걸 때에는 곧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별 문제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에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것은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급한 일 때문에 더 중요한 일을 포기할 수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아마도 이 제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 갔다가는 정말 중요한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간다는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아버지의 장사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 지금 우리의 삶이나 생각 속에서 하나님보다 앞세우는 것이 있진 않습니까? 내 사정이 다급하다는 것 때문에 주님은 뒷전으로 물러나 있지 않습니까? 사실 때로 우리가 그렇게 삽니다. 아직도 내 삶이 먼저입니다. 내 사정이 먼저입니다. 하나님보다 내 일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먼저이기를 원하십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이 먼저이기를 원하십니다.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잘 쓰는 말입니다. ‘여자 먼저’라는 뜻입니다. 남자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여자를 먼저 생각해 준다는 것입니다. 남을 배려해 주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에서는 ‘갓 퍼스트’(God first)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여야 합니다. 

19세기 미국 최고의 설교자라고 불리는 필립스 브룩스(Phillips Brooks, 1835-1893)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하늘의 것을 먼저 추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것을 먼저 추구해보시오. 그러면 하늘과 땅의 것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 속에서 하나님이 먼저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뒤로 제쳐두고 땅에 것을 먼저 추구하면 하늘과 땅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에서 누가 먼저입니까? 하나님입니까? 나입니까? 우리에게는 무엇이 먼저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내 계획입니까? 우리 ‘갓 퍼스트’(God first)의 신앙을 가지십시다. ‘갓 퍼스트’(God first)의 신앙으로 사십시다. ‘갓 퍼스트’(God first) 하나님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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