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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 8: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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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막  8:14-21)

[존 그레이] 이라고 하는 사람이 30여 년 동안 부부관계 상담소를 운영하며 인간관계 세미나를 열었고, 저술, 강연, 상담 등 활발한 활동을 통해 얻은 사실들을 책으로 써서 화제가 된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라는 책을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아마 한 번쯤은 읽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부부란 화성에서 온 남자 같은 사람과 금성에서 온 여자 같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끼리 만나서 처음에 눈이 맞아서 사랑을 할 때는 서로 다른 매력에 끌려서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남자니까 여자라서 좋고, 여자니까 남자라서 좋은 것입니다. 나와 다른 부드러움이 있어서 좋고, 야성미 넘치는 거친 모습이 매력이 있어서 좋은 것입니다. 

남녀란 본래적으로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것 때문에 끌려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만나서 살아가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서부터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싸움의 발단이 뭐냐 하면 “왜 이렇게 서로 다르냐!” 는 것으로 싸운다는 것입니다. “왜 내 생각 같지 않느냐?”, “왜 내 맘 같지 않느냐?” 는 것이 싸움의 주 메뉴가 된다는 것이지요. 남자는 여자를 보고 "날 닮아라!" 그러고 여자는 남자보고 "왜 여자의 세계를 이해 못하는 이런 사람이 됐느냐" 고 결국 서로가 나를 닮으라고 피 터지게 싸운다는 것입니다. 

이게 재밌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서로 다른 것 때문에 매력에 끌려서 만나서 사랑하고 살다가 이제 너무 달라서 못 살겠다 그러니 얼마나 재밌는 일입니까? 이게 어쩔 수 없는 부부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싸우지 않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해결책이 있다면 “서로 다르다는 것 자체를 인정하고 살라!” 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쉬운 게 아니란 말입니다. 

사실 사람이 좀 다르다고는 하나 궁극적으로는 남녀노소가 다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에는 다를 바가 없지 않습니까? 남자들은 이런 이의를 답니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남자는 흙으로 만들었고 여자는 갈비뼈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만든 부분이 다른데 어떻게 남자와 여자가 같을 수 있냐는 것이 남자들의 항변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을 잘 보면 만들어진 소재는 다르지만 창조된 영혼, 즉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는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들어진 것은 서로 다른 부분으로 만들어졌지만 창조된 바는 같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실은 같은 것이 대부분이요, 다른 것이라곤 아주 미미한 부분일 뿐입니다. 

이런 가정이 있습니다. 남자는 박사가 되고 출세한 사람인데 비해서 여자는 사실로 초등학교도 못 나왔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결혼을 시켜줬기 때문에 한 겁니다. 그런데 이 집에 대화가 어떻겠습니까? 남자는 항상 부인을 구박합니다. “이 무식한 여편네야, 내가 데리고 살아 주는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 또 여자 쪽에서는 “잘난 사람 맘대로 해라. 나야 뭐 식모로 들어왔다가 식모로 갈 거니까!” 이러고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거야말로 완전히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입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 많아서 남자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치매가 와서 아무도 몰라봅니다. 그 부인이 오히려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 사람 좀 보세요. 제 나이도 모르고 제 이름도 모르는 바보가 됐어요.” 여러분, 진작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사람답게 살았겠지요. 인간이란 결국은 처음과 마지막이 다 똑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 동안 얼마나 지식 있는 삶을 사느냐 보다는 얼마나 지혜로운 삶을 사느냐가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이란 때로는 배워서 알아야 하고, 익혀서 깨달아야 하는 법입니다.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수용하는 삶의 과정이 마지막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안 배우겠다, 내 철학대로만 살겠다고 할 때 문제가 있습니다. 어려운 지식을 배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배우라는 것입니다. 지식은 젊을 때일수록 배울 수 있는 것이라면 지혜란 나이가 들수록 더 배워지는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것과<지혜>라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실제적인 경험 보다는 이론을 들으면서 기억하고 그 기억을 축적하고 논리적으로 정돈해서 이해를 함으로써 그것이 지식이 되는 것입니다. 고로 전문적인 차원의 노력이 동반되어야하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건에 부딪히면서 경험하고 깨닫게 되는 모든 일들을 통하여 터득하는 삶의 방식이 지혜입니다. 

깨달음이 지혜를 주고, 지혜가 믿음을 주고,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실생활에서 생명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있는 사람이란 이런 과정을 잘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는 무언가를 알려고 하고 깨달으려고 하는 자세가 잘못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고 아예 듣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아예 듣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들을 수 있을 때 들어야 되고 깨달을 수 있을 때 깨달아야 합니다.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고, 깨닫고 싶어도 깨달을 수 없는 상황이 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안타까워 말씀하십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마음이 둔하냐? 또 기억지도 못하느냐?” 

예수님께서 떡 다섯 덩이로 오천 명을 먹이는 역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굉장한 사건입니까? 이런 엄청난 사건을 볼 때에 당연히 깨달음도 많고 느낌도 많고 감격도 커야 옳습니다. 아마 당시에는 실제로 그랬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과 몇 시간 후에 그 깨달음이 없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시다가 하시는 말씀이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교훈을 하십니다. 누룩은 유대인들에게는 악의 상징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헤롯의 옳지 않은 것들, 비 신앙적인 것들, 외식주의와 형식주의 위선과 이기주의, 세속주의를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비유해서 “한 번 받으면 자꾸 퍼져나간다. 누룩처럼 무서운 힘으로 퍼져나간다. 

그러므로 조심해라.” 는 뜻으로 말씀하시려는데 “누룩” 하시니까 제자들이 ‘아이쿠, 빵이 없구나. 우리가 빵을 준비하지 못했구나!’ 하고 완전히 엉뚱한 문제로 판단하고는 서로 시비를 벌입니다. “왜 빵을 준비하지 않았느냐?” 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했겠지요. 바로 거기에 불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가 막히셨습니다. 그래서 “너희들은 도대체 왜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내가 지금 빵 이야기를 하는 거냐? 그까짓 빵 정도의 문제라면 몇 시간 전에 충분히 먹을 것을 나눴던 기적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제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해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큰 능력을 보고도, 감격하고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떡 하나 없는 것 가지고 서로에게 책임전가를 하고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문제는 지금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로 서로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 한심한 것입니다. 

오늘 날 사람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보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들로 종종 다툽니다. 만약에 지금의 이 모습을 예수님께서 본다면 아마 본문에서와 같은 말씀을 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은혜도 모르고, 본질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아!” 하고 말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제자들, 어느 사이에 오천 명을 먹이고 사천 명을 먹이는 큰 기적을 보았건만 어느 새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 감격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놀라웠고 존경스러웠던 주님의 그 능력도 잊어버리고 떡이 없다고 그것도 본질적인 문제도 아닌 것을 놓고 함부로 서로를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깨닫지도 못하느냐. 기억지도 못하느냐. 어찌하여 서로 수군거리느냐.”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는 열 가지 재앙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놀란 애굽이 보내줌으로 홍해를 건너는 감격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두 주일도 못 가서 그 은혜를 잊고 원망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결정적인 죄목이 원망 죄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수시로 불평하고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면 언제나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느냐? 기억하지 못하느냐” 여러분, 은혜에 대한 건망증 환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됩니다. 은혜는 깨달아야 은혜입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능력으로 바꾸어집니다. 결국 은혜를 깨닫고 은혜를 기억하고 그 기억한바 은혜로 오늘의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해결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물고기의 IQ는 0.3이라고 합니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또 입질을 합니다. 어떤 분이 정치인의 IQ도 0.3이라고 했습니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또 뇌물을 먹는 것을 보면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오늘도 끌려가는 정치인은 여전히 발생하고 그 일은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날의 은혜를 곧 잊어버리고 옆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어 복 받는 것을 보면서도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신앙 IQ 0.3을 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받은바 은혜에 대하여 깨달음이 있어서 늘 감사하고 그 은혜 속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 받으면서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깨달음이 없어서 늘 원망하고 수시로 불평하면서 믿음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디 깨달음이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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