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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십자가 (에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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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십자가 (에 7:1~10)

여러분들은 현대인들의 건강의 최대 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시대에 따라 많이 바뀌었지만 최근에는 거의 일치되게 스트레스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성인병뿐만 아니라 암이나 다른 온갖 질환의 근원이 바로 스트레스라고 말합니다. 

스트레스는 건강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의 모든 것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이고 무서운 원수입니다. 사회에 스트레스가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에게, 어린 사람에게도 나이든 사람에게도, 가진 사람에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스트레스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이 스트레스를 해결할 수 있는가는 참 큰 문제입니다. 

한 정신과 의사가 방안을 제시했는데 상당히 괜찮은 방안인 것 같습니다. 그 정신과 의사는 스트레스는 일종의 전염병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전염병이라면 병의 원인이 되는 균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왔는데 이제는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 병원균을 주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스트레스는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전파됩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어떤 사람에게 풀까요? 사람이란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풀어야하므로 어떤 형태로든 해결해야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십자가 앞에 나와서 다 털어놓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집에 오면 약한 아내 그리고 아이들이 그 스트레스에 노출됩니다. 그러다 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은 아이들은 또 학교에서 자기보다 만만한 아이들을 괴롭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구에게도 풀지 못하는 이 만만한 아이들, 따돌림을 당하고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은 풀 데가 없기 때문에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하는 일까지 생기게 됩니다. 

여러분도 언론을 통해서 자살하는 사람의 보도를 많이 보았겠지만 실제는 이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저는 이에 대해서는 언론이 잘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이 이런 것을 일일이 보도하게 되면 예방하는 차원보다는 이럴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 개연성 쪽으로 더 보게 됩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론이 이것을 보도하는 것을 자제했으면 생각하는데, 실제로 언론이 그렇게 하는 같습니다. 

이 의사는 특별히 스트레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피해자라고 말하는데 실제로는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다고 말합니다. 내가 받는 스트레스보다 내가 퍼뜨리는 스트레스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의사는 이제는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려는 노력을 시도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하는데 저는 상당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어떻게 하든지 남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고 살겠다고 결단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말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만든, 우리가 퍼뜨린 스트레스에 우리가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정확한 표현입니다. 

바벨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에서 유대인 출신인 에스더라는 사람이 왕비가 되었습니다. 페르시아에는 제 2인자, 왕 바로 다음에 하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하만이 모르드개 때문에 유대인들 전부다 죽이려고 작정을 하고 계획을 세운 후, 음모를 만들었고 그 음모는 그대로 성공했습니다. 이제 곧 유대인들은 다 죽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왕비의 사촌오빠인 모르드개가 알고 왕비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대비해서 네가 왕비가 되게 하신지 모르겠다. 그러니 왕에게 가서 이 문제를 해결하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에스더는 그럴 만한 처지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왕의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 달이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자칫 잘못하면 그 일 때문에 자기가 무서운 일을 당하게 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을 각오를 하고 그렇게 해보기로 작정했습니다. 그 때 한 말이 그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로다’ 라는 말입니다. 

에스더가 작전을 짰습니다. 파티를 열었으니 왕에게 와달라고 부탁한 후 한 사람을 더 초청했는데 바로 자기 오빠와 민족을 죽이려고 하는 하만이었습니다. 왕과 하만 두 사람만 초청한 것이었습니다. 에스더는 두 번이나 파티를 준비하고 초청했습니다. 파티에서 왕이 그나하게 술을 마신 후 혹시 당신에게 무슨 소원이라도 있으면 어떤 것이라도 다 들어주겠노라고 왕비에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비가 큰 결심을 하고 어려운 말을 했습니다. “내가 죽게 되었습니다. 내 민족이 죽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나에게, 우리에게 노예가 되라고 하면 그것은 감수하겠지만 까닭도 없이, 이유도 없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말하자 왕이 깜짝 놀라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누가 그런 일을 하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왕비는 여기에 대한 대답을 하기 전에 많은 고민을 하고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아마 많은 연습도 했을 것입니다. 왕비는 “이 악한 하만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나라의 제 2인자, 지금까지 어떤 일이든지 왕으로부터 다 허락을 받고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고 있는 하만을 향해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은 격노했습니다. 잠시 마음 정리를 하기 위해서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왔는데, 그 틈에 하만이 왕비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자기 처지 때문에 왕비를 붙들고 애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람 쐬고 들어온 왕이 그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왕은 하만이 궁궐에서 왕비인 자기 아내에게 못된 짓을 하려고 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었을 것입니다. 술을 마신 왕이 총리정도 되는 하만이 술을 마셨으니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 거의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화가 난 왕은 그 자리에서 하만을 체포하여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온갖 계교를 다 만들고 작전을 꾸몄던 하만, 모르드개를 죽이고 유대인을 모두 다 죽이려고 했던 하만의 계획은 도리어 자기 자신을 멸망시키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대역전극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정말로 거침없이 파죽지세로 나갔던 하만의 모든 계획이 갑자기 떨어지게 되고 대역전극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생각해봅니다. 방금 에스더 7장에서 보았듯이 오해입니다. 사실 하만은 정말로 악한 사랍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오해입니다. 왕이 좀 심했습니다. 하만으로서는 정말로 억울한 일입니다. 어쩌면 왕비 에스더가 자기 오빠를 구하고 자기 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연출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하만의 입장입니다. 하만이나 그의 가족들은 정말로 억울하고 그것은 오해라고 생각하겠지만 과연 하만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 우리는 생각해야합니다. 역사적으로 하만이 억울하게 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른 신하들은 인사를 했지만 모르드개는 자기 신앙 때문에 큰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서 모르드개의 민족인 유대인들을 전부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 어린아이들이나 노인들까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다 죽여도 되고, 모든 재산을 다 빼앗아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일까지 만들었나를 생각하게 되면 자기가 억울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해라고 말할 자격이 있겠습니까? 좀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부메랑,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다 돌아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원통하고 분통하게 만든 사람입니까? 유대인들은 정말로 억울했습니다. 그대로 자기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완전한 부메랑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정말로 깊이 생각하셔야 하고 기억하셔야 합니다. 돌아옵니다. 그것으로 끝날 것 같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반드시 돌아옵니다. 힘이 있다고, 내가 무엇을 가졌다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많이 배웠다고, 어떤 무엇이 있다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 없는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 못 배운 사람들을 억울하게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직접적으로 괴롭히는 사람들도 많고, 간접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내가 돈을 버느라고 하는 일 때문에 입에 풀칠도 못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여기까지 생각해야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은 지금은 잘 되는 것 같고, 기세가 하늘을 찌를 것 같지만 과연 계속 될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돌아가는 일은 하만처럼 자기가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장대에 달려 죽는 그 길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의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의 세계에서도 하나님의 손은 미칩니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네가 그렇게 했는가? 내가 다 네게 돌려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돌려받는 것은 이런 좋지 않은 것뿐만 아닙니다. 좋은 것도 돌려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성경에서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많이 말씀하시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고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고자 하는데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큰 목적은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많이 강조하시고 되풀이해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다 주시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에게나 주시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나 주실 수가 없습니다. 아무에게 주다가는 그 사람이 망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받지 말아야할 복을 받아서 무너지고 말기 때문에 아무에게 주시지 않고, 받을만한 사람에게만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런 자격을 갖추도록 하시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 과부, 어려운 사람들, 없는 사람들,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살아보겠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돌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돌보는 사람에게 내가 복을 주시겠다. 내가 챙기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전도서 11장 1절에서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떡을 물위에 던지라고 말씀하셨는데, 물은 흘러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뒤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전11:1) 라고 말씀하십니다. 위대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흘러간 물위에 던졌는데 거기서 다시 돌아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희한합니다. 강물에 떡을 던져서 저 밑에 흘러가서 없어지고 말았지만 하늘에서 떡이 떨어지기도 하고, 또 더 위에서 오기도 하고, 뒤에서 오기도 하고, 내려갔던 물이 거꾸로 올라와서 주기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떡을 던지면 다른 사람이 먹는데, 누가 집어먹겠습니까? 힘들고 어렵고 불쌍한 사람들이 집어먹게 됩니다. 내가 갚아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다 돌려받습니다. 안 좋은 것도 돌려받고 좋은 것도 돌려받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을 주시겠습니까? 생각하셔야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으로만 그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악한 것을 주고 악한 것으로 돌려받을 것인지 아니면 좋고 귀한 것을 나누어주고 하나님으로부터 좋고 귀한 것을 돌려받을지 결단해야합니다. 

점점 더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월가로부터 시작된 99%라고 이야기 하는 이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단시간에 끝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계속될지 모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고,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을 더 하라고 월가로부터의 소요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젊은이들이 불만이 가득할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에게 ‘내가 너희들에게 복을 많이 주지 않았는가? 복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만의 이 일을 보면 정말로 대단하고 극적인 대역전극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습니까? 모르드개는 죽을 뻔 했는데 살아났습니다. 유대인들도 다 죽을 뻔 했는데 살아났습니다. 그렇게 기세가 덩덩하던 하만은 한꺼번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하만은 대단하게 몰아붙였습니다. 맨 먼저, 모르드개가 절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르드개 한 사람만 죽이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아 그가 유대출신임을 알고 유대인들을 다 죽이려고 했습니다. 왕이 허락하기 힘들 것 같자 교묘하게 왕의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이렇게 몰아나갔습니다. 

하만은 여기에도 또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입궐하고 퇴궐하면서 모르드개를 보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모년 모월 모일까지 살아있는 꼴을 보지 못하고, 그 한 사람이라도 먼저 죽이고자 하여 자기 집에다 장대를 준비한 후, 밤에 왕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습니다. 지금까지는 하만이 결재를 요청했을 때 왕이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가 결재를 받으러 갔으니, 이제 내일 아침이면 모르드개는 장대에 매달려 죽을 것이고, 며칠 후면 유대인들은 다 죽게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만이 참으로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실수한 것이 있는데, 작은 실수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몰라도 크게 모르면 안 됩니다. 실수해도 크게 실수하면 안 됩니다. 하만이 무엇을 몰랐고, 무엇을 크게 실수했습니까? 절대로 대적하지 말아야할 상대를 대적하였고, 절대로 건드리지 말아야할 상대를 건드린 것입니다.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이것은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기 바랍니다. 

모르드개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너무도 아끼는 사람입니다. 너무도 좋아하시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사랑스러워하는 민족들입니까? 지금은 비록 잘못하여 매를 맞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식들입니다. 누구를 대적하려고 덤벼들었습니까? 그는 너무 몰랐습니다. 상대를 몰랐습니다. 대적할 것을 대적하고, 상대할 것을 상대하고, 건드릴 것을 건드려야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을 상대하고 대적하고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조금 덜 똑똑해도 이런 데서는 제대로 똑똑해야합니다. 하만도 그동안 똑똑했습니다. 대단했습니다. 도대체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기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하여 한 사람도 아닌 전부 다 죽이겠다고 결재를 받았습니다. 그 결재를 받았으니 정말로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만보다 훨씬 더 대단합니다. 어떻게 하만이 하나님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만에게 하신 일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겠다고 장대를 준비하고 결재판을 들고 갔는데,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벌떡 일어나서 왕에게 잠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잠자지 말라고 하시는데 잠잘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잠이 오지 않은 왕에게 하나님께서 궁중일기를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궁중일기에 오래 전에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지금 하만이 죽이려고 하는 모르드개였습니다. 사람들을 불러 그에게 어떤 포상을 했는지 물었는데, 아무 포상도 하지 않았다고 하여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하만이 결재판을 들고 들어왔습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고자 하는 말을 꺼내기 전에 이런 귀한 사람에게 어떻게 대접했으면 좋겠는지 물었습니다. 하만은 착각하였습니다. 악한 사람은 이처럼 잘 착각합니다. 자기라고 생각한 하만은 왕처럼 대접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모르드개를 왕처럼 대접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다 장대위에 달려서 죽었습니다. 

하만은 오랫동안 권세를 누리고 오랫동안 준비했지만 하나님은 단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대단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하나님입니다. 하만의 권세가 한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도 거기에 대적하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일어서신지 이틀 만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 저 선한 사람, 저 신앙인 모르드개를 살려주시고 유대인들이 저런 변을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렇게 권세가 등등한 하만을 가라앉혀서 못된 짓을 하지 않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정도로 소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정도만 하고 말 것 같으면 일어서지도 않을 것이고, 내가 손을 보려고 하면 대강 손보고 끝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참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을 아십시오. 길게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는 것 같습니다. 너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너무 온순하신 것 같습니다. 너무 부드러우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재고 있고 무게를 달고 있습니다. 보고 계시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끝내버리십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실망하지 마시고 좌절하지 마시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이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갚아주시는 것도 그렇고 복을 주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충성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고 정말로 신앙적으로 살았고, 정말로 선하게 살고, 불쌍한 사람을 늘 생각했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살았는데 왜 이렇게 풀리지 않는지 생각하신다면 조금 더 기다리십시오. 

유대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디 가셨는가? 왜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되게 하고,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하시는지 생각했지만 오늘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오래 끌지 않습니다. 우리가 깜깜한 데 있으니 한없이 긴 것 같지만 곧 입니다. 그렇게 멸망시키면 하나님도 속이 상하시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든 돌아오도록 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될 때는 ‘매네 매네 대갤 우바르신’ 이라고 하십니다. 도무지 세어보아도 함량미달이고, 무게도 모자라고 규격도 모자라 안 되겠다고 생각되실 때 한꺼번에 처리하고 마십니다. 

주시는 것도 한 번 주시기 시작하면 이제 그만 주시라고 말할 정도로 주십니다. 여러분, 이 정도를 받아야합니다. 마음 조급하게 살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생각하시고 넉넉하게 계십시오. 정말로 멋지게 서 계십시오. 누가 이야기하면 걱정하지 마시고 기다리라고 말하십시오. 아이들이 와서 말하면 기다리라고 말하십시오. 교회에서 누가 상담하면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하십시오. 그렇게 말씀하시고, 여러분도 그렇게 계십시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시기 시작하면 정말로 감당하지 못합니다.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십니다. 

누가복음 6장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눅6:38)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떨 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까? 주님께서 이어서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1)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한 번 주시면 그렇습니다. 돌려받을 때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돌려받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주십시오. 그리고 혹시라도 안 좋은 것이 있으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지 마시고, 괴롭게 하지 마시고, 가슴 아프게 하지 마시고 절대로 다른 사람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마십시오. 그 눈물이 나에게 돌아오고 그 괴로움이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다짐하십시오.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으시겠습니까?

이제 에스더를 생각합니다. 모든 상황은 끝입니다. 이 일 전에 에스더는 어쩌다 내가 왕비가 되어 오늘 이렇게 곤란한 입장에 처했는가, 나는 이미 한 달이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한 밀려난 신세인데, 지금 나간다면 나는 정말로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아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실 때는 자주 거기에 십자가를 함께 주십니다. 혹시 경제력을 주실 때, 좋은 자리를 주실 때, 혹은 직분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 직분만, 명예만, 재물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십자가도 함께 주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좋은 것만 받으려고 하지 마시고 십자가도 함께 받으십시오.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받으십시오. 

만일 에스더가 이 십자가를 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추론해봅니다. 에스더는 이미 왕을 만나지 못한 지 한 달이나 지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밀려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제는 영영 왕의 측근에서 밀려 끝나버릴 수도 있습니다. 한걸음 더 나간다면 권모술수에 능한 하만의 간계로 말미암아 아주 안타까운 모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 왕비 와스디가 폐위된 것처럼 에스더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에스더도 처음에는 좀 주춤했습니다. 그러나 ‘죽으면 죽으리로다’ 라고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귀하신 뜻을 이룬 것은 물론 오빠 모르드개도 구하고 민족을 구했습니다. 

게다가 7장이 끝나면 8장입니다. 8장 첫머리 1절에는 ‘그날 아하수에로 왕이 유대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날은 하만이 죽은 날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집 한 채 주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달 동안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한 에스더는 이미 왕의 사랑, 여인의 가장 큰 기쁨인 이 사랑을 상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상실로 끝날 뻔 했던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의 모든 문제가 해결 났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런 것도 다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죽으면 죽으리로다’ 라고 했을 때 계획하고 소원했던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까지도 다 우리들에게 돌아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혹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선물이 있습니까? 잘 보십시오. 거기에 하나님께서 여러분들로 하여금 지라고 함께 주신 십자가가 없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바라십니다. 복과 함께 주신 십자가이든, 좋은 것과 함께 주신 십자가이든, 좋은 것이 하나도 없이 주신 십자가이든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지기를 소원하십니다. 복과 함께 받았든지, 십자가만 받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기쁨으로 받으십시오. 그리고 지십시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 혹시 하나님께서 에스더에게 주신 덤 같은 복을 주신다면 이것도 기쁨으로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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