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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 영혼을 위하여 (요 4: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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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을 위하여 (요 4:1-26)


어떤 왕이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병은 아주 희귀한 것이었는데, 어의는 이렇게 처방을 내렸습니다. 
“암사자의 젖을 구해 잡수시면 좋아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암사자의 젖은 구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어서 그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왕은 전국에 명령을 내려서 누구든지 암사자의 젖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큰 상을 내리겠노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때 한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자가 사는 굴에 몰래 들어가서 새끼 사자 한 마리를 어미 사자에게 주었습니다. 

열흘 정도가 지나자 그 사내는 암사자와 친해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 약으로 쓸 수 있을 만큼의 암사자 젖을 얻어내었습니다. 그는 사자 젖을 가지고 왕궁으로 가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자기의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다투는 꿈이었습니다.
발은, 만일 자기가 없었다면 사자 굴이 있는 곳까지 갈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눈은, 자기가 없었다면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발이 있어도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맞섰습니다. 심장은 자기가 없어서도 안 된다고 고집하였습니다. 그때, 혀가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말이 가장 중요해. 내가 없다면 너희들로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없어.” 
신체의 각 부분들은 혀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비웃었습니다. 
“무슨 소리! 뼈도 없고 쓰잘 데 없는 조그만 것이 건방지기도 하구나!”
그 사나이는 마침내 왕궁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그 사나이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그것은 무슨 젖이냐?” 

그 사내가 갑자기 뜻밖의 말을 하였습니다. 
“폐하, 이것은 개젖이옵니다.” 
앞서서 혀를 비웃던 신체의 각 부분들은 그 순간 혀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얼른 사과하였습니다. 그러자 혀가 공손하게 다시 말했습니다. 
“아니옵니다. 폐하, 이것은 암사자의 젖이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 지방의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수가라 하는 동네에 들리십니다. 수가의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쉬시고 제자들은 마을로 음식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 사이에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자는 공손히 물을 떠 주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비꼬면서 따집니다. 
“아니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이 사마리아 땅은 갈릴리와 유대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이스라엘을 쳐들어와서 점령한 뒤에 이스라엘의 포로들을 다른 지방으로 옮기고 앗수르 국민을 이 사마리아 땅으로 이주시켰습니다. 그 뒤로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을 점령한 뒤에 또 사마리아 사람들을 쫓아 보내고 다른 지역 이방사람들을 그 곳으로 옮겨 와서 살게 함으로 자연히 혼혈족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 취급하고 무시했습니다.

거기다가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잡혀가서 포로 생활을 한 뒤에 7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후에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할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찾아와서 자기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거절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을 거절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원한을 품고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방해합니다. 그런 저런 이유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과는 서로 상종하지 않고 유대에서 갈릴리를 갈 때에도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면 빨리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단강 쪽으로 돌아 다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 사마리아 땅에 와서 사마리아 여자인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니 그 여인이 이렇게 반응한 것도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이 사마리아의 수가 성까지 와서 이런 수모까지 당하면서 이 여인을 만나고 계신 것일까요?

이 시간 우리는 먼저 한 영혼을 찾으시는 주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수없이 갈릴리와 예루살렘을 오르내리셨지만 사마라아를 통과하신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갑자기 이 사마리아로 지나가시고자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한 사람을 예수님은 지금 수가성의 우물가에서 만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곳곳을 다 가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곳은 사마리아 중에서도 수가라 하는 동네였습니다. 

수가라 하는 동네가 무어 그리 유명하여서 가신 것은 아닙니다. 수가라 하는 곳에 대단한 유적지가 있어서 가신 것도 아닙니다. 물론 야곱이 팠다고 전해지는 그 우물이 있어서 그 우물가에 지금 예수님이 잠시 쉬고 계셨지만 수가라 하는 동네가 풍광이 좋아서 잠시 쉬시려고 가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동일하게 보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십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좋다 한들 하나님이 예비하신 나라보다 좋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셨던 것은 그곳에도 잃어버린 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한 영혼을 지금 만나고 계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처음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할 때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던 여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내게 마실 것을 달라’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당신이 그 사람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그가 당신에게 생명의 물을 주었을 것이오.”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당신에게는 물 길을 도구도 없고 이 우물은 매우 깊은데, 어디서 그 생명의 물을 구한단 말입니까? 당신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큰 분이란 말씀이십니까? 야곱은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신 분입니다. 그분도 친히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마셨고, 그분의 아들들과 가축들도 그렇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누가 되었건 간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계속 솟아나,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우물이 될 것이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께 “선생님, 저에게 그런 물을 주셔서 제가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을 뿐더러 물을 길으러 여기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가서 당신 남편을 불러 이리로 데려 오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이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은 맞는 말이오. 실제로 당신은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고, 지금 당신과 함께 사는 남자도 당신 남편이 아니오. 당신이 방금 전에 말한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 여자는 남편이 다섯 명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함께 사는데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은 아니라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만큼 이 여자는 불행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이 다섯씩 있었다는 것은 이 여자의 행실이 그만큼 개차반이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셨던 말씀 가운데 만일 한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자녀가 없이 남편이 죽게 되면 그 형제가 그 여자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을 죽은 형제의 이름으로 대를 잇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이 여자가 바로 그런 경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 다섯이 다 죽도록 이 여자에게서 자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여섯째 형제와 살고 있으니 이 여자의 마음이 오죽하겠습니까? 동네 사람들이 어찌 수군거리지 않겠습니까? 오죽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그 시선이 힘들었으면 집 밖으로 나서기조차 꺼려하는 제 육시 우리 시간으로 낮 12시에 물을 길으러 동네에서 거의 800미터나 떨어져 있는 이 우물까지 나왔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여인은 자기의 처지 때문에 사람 만나기도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 오히려 사람을 피해 살 수밖에 없는 아픔이 이 여자에게 있습니다. 자식을 낳지 못하는 이유가 누구에게 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지금 여섯째와 사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그 형제들이 빨리 죽었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 이 여자는 저주받은 여자로 여김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이 여자가 일부러 남편을 죽인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지만 그 남자조차도 남편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여자의 신세야말로 정말 처량합니다. 그런 여자를 지금 예수님이 만나고 계십니다. 아니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지나가시다가 수가라는 동네의 우물가를 찾으셨던 이유가 바로 이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여자입니다. 자기 스스로도 부끄러워서 사람을 피해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 낮에 물 길으러 나온 여자입니다. 그런 여자를 위해 예수님이 여기까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원래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열둘을 내어 보내실 때에도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던 예수님이 잃어버린 한 영혼을 찾아 지금 사마리아까지 오셨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유대인이라고 해서 적대시하던 이 여자의 마음이 점차 누그러집니다. 이윽고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시인합니다. 
그랬을 때 이 여자는 무엇보다 먼저 동네로 달려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그토록 피해왔던 동네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합니다. 그 결과 그 동네가 다 예수를 믿게 되고 그 믿음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한 영혼이 변화됨으로 세상 역사가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한 여자 그것도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이 여자를 아니 사람들이 버리기 전에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던 이 불행한 여자를 예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세상에 나처럼 불쌍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우리는 불쌍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행복한 사람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성의 이 여자를 찾아오신 것처럼 지금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만나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주로 메시야로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우리를 택하시고 왕 같은 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 특별한 존재로 우리를 삼으시기 위해서 친히 낮고 천한 이 세상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까지 낮아지셨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만큼 우리는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그 삶이 확 바뀌었듯이 이제 우리의 삶도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주실 정도로 고귀한 존재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그의 소유된 백성 즉 가장 존귀한 자요 보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십니까? 

영국의 조지 왕이 한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을 때 두개의 꽃병이 특별히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꽃병들은 같은 원료, 같은 스타일, 같은 무늬로 만들어졌으나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있는 예술품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또 하나는 투박한 채 볼품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왕은 관리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관리인이 대답했습니다. 
“전하,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또 하나는 구워지지 않았습니다. 시련은 인생을 윤기 있게 하고 생동감 있게 하며 무엇보다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특별히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마리아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이 찾으셨던 단 한 사람 그는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스스로도 포기한 여자였습니다. 버려진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주님이 찾아주셨습니다. 그 한 여자를 위해 예수님이 사마리아까지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를 담금질하고 계십니다. 불에 구워짐으로 질그릇이 도자기가 되듯 그렇게 주님은 지금 우리를 연단하고 계십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풍파가 몰아닥치기도 합니다. 마치 욥에게 나타났던 시련처럼 이웃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물질 다 잃어버리고 자식 잃고 건강 잃고 부부 간의 신뢰도 다 깨지는 그런 어려움이 우리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고 했던 욥의 고백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한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그렇게 우리의 입술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잠언 11장 11절은 말씀하십니다.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그러므로 주님이 찾아주신 그 한 사람 정말 정직하게 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특별한 소유된 백성 된 저와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해서 이런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 향남 지역이, 아니 화성시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해서 새롭게 변화되는 귀한 역사가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 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지금 왕 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라고 하십니다. 이 나라를 가슴에 품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나라를 위해서 이 지역을 위해서 우리는 아픈 마음으로 눈물 뿌려 중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으로 인해서 수가 마을 전체가 변화되었듯이 우리들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이 새롭게 빚으시는 역사가 우리나라에 이 화성 시에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에 놀랍게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 선거 유세를 하고 있을 때, 그는 그 바쁜 일정에도 주일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조지아주에 있는 작은 교회, 자기 나가던 교회, 23년 동안을 개근하며 아이들을 가르쳐 왔던 그 교회로 돌아가 주일하교 학생 20명을 앞에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히 예배했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도... 그랬더니 기자들이 70명이 몰려왔습니다. 기자들과 만나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맙기는 합니다만 다음 주일부터는 다 여러분이 나가는 교회에 나가십시오.” 
아무리 바빠도 예배가 먼저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함이 없이는 내 삶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사업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른 예배의 자세에서 바른 삶의 자세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본요소를 이루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믿음과 행실 그리고 예배입니다. 누구를 믿느냐?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본질이 좋아도 그 결과가 나쁘면 제대로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행실이 따라야 합니다.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고 말한 것입니다. 
믿음이 아래로부터 위를 향해 올라가는 것이라면, 행실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땅의 것을 바라보며 살지 않고 위의 것을 바라보며 삽니다. 그러나 믿음의 실천은 위에서 아래로,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는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곳엔 병든 사람,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죄를 짓고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으로 차고 넘치는 곳입니다. 

믿음이란 위를 바라보며 계속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 올라가는 길은 너무나 가파르고 좁고 험합니다. 그 자신의 힘으로 정상까지 올라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정상에서 끌어올리는 힘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일단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또 다시 아래로 내려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변화산상의 베드로처럼 그 곳에 머물러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그 정상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와야 합니다. 위에서 떠밀어내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 힘이 무엇일까요? 힘을 공급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요 그 힘을 공급받으려면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사마리아 여자가 다시금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네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실 저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은데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니 그곳까지 갈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참되게 섬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느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찾으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그때 가서는 그렇게 할 수 있겠죠” 라고 다소곳이 여인이 말하니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는 그가 바로 나다 즉 내가 바로 그 메시야다” 그렇게 확인하여 주셨습니다.

그 메시야를 지금 이 시간 우리도 만나고 계십니다. 이미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임재해 계실 뿐 아니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할 때마다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심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리 마음을 감동해 주십니다. 새 힘을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 마음으로 우리 영으로 새 힘을 얻게 하십니다. 그 힘을 얻어 우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정말로 귀하게 여기고 항상 주님과 만나고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세상을 이기고 나아가 세상이 필요로 하는 나눔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이어 마케도니아 대제국을 물려받은 안티고노스 휘하에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적진 속을 용감하게 뛰어들어 승전하던 부하가 있었습니다.
안티고노스는 의사를 부하에게 보내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하가 전처럼 용감하지 못했습니다.
안티고노스는 그를 불러 
“병이 있을 때는 그렇게 용감하던 네가 웬일이냐?”고 물었습니다.
부하의 대답.

“그 때는 목숨을 생각하지 않고 싸웠는데 회복된 지금은 목숨이 소중해져 몸을 사리게 되었습니다.”
고난이 있어야 인생이 진지해집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나 주님과 함께 예배하는 자라야 그 고난이 영광과 은총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을 만나기도 부끄러웠던 사람 그래서 스스로 사람을 피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피해 동산 숲속으로 숨었던 것처럼 그렇게 숨어 지내던 여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메시야를 만났다고 동네방네 외치며 다닐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버려진 자가 아닙니다. 더 이상 부끄러운 자도 아닙니다. 더 이상 사람 만나기가 두려운 사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즐겁습니다. 내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래 뜨겁게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세상을 즐겁게 살아갑니다. 

이렇듯 새로워진 삶 정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서서 영으로 예배하고 진리로 예배하는 성도요 그래서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과 은혜를 덧입어 세상을 살아가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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