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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처구니없는 인생 (삿 16: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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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인생 (삿 16:18-22)

 
❚어처구니없는

뉴스에 이런 사건 기사가 나왔습니다. “어처구니없는 목사.” 또 무슨 소린가 싶어 들여다보니 전남 보성에서 어떤 목사가 세 자녀를 굶기고 때려 죽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기사 밑에는 여지없이 기독교와 목사들을 비난하는 수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어떤 교단에도 속하지 않고 신학교도 다닌 적이 없습니다. 목사안수도 안 받고 스스로 목사가 된 사이비, 가짜 목사입니다. 

그런데 언론은 그런 사실을 알리지도 않은 채 그냥 ‘목사’가 큰 사고를 쳤다고 보도합니다. 물론 그 이후에 기독교계의 항의를 받았는지 “정식으로 안수를 받지 않은 채 교회를 운영해 왔다”라는 말을 넣기는 했지만 그래도 너무 속상하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무책임하게 터뜨릴 줄만 아는 언론이나 모든 상황이 정말 ‘어처구니’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말하면서 제일 많이 등장한 말이 뭔지 아십니까? ‘목사’라는 말이 일곱 번이 나왔고 ‘어처구니없다’는 말이 세 번 나왔습니다. 오늘은 이 ‘어처구니없다’는 말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 ‘어처구니없다’에서 ‘어처구니’가 뭔지 아십니까? 몇 해 전 수요예배 때 사사기 강의를 하면서 설명을 들은 분도 있겠지만 이 ‘어처구니’란 말의 뜻을 모르고 사용하는 분이 의외로 많습디다. ‘어처구니’란 바로 맷돌을 돌릴 때 쓰는 나무 손잡이를 뜻합니다. 

지금이야 가정마다 믹서도 있고 분쇄기도 너무 좋은 게 많지만 옛날에는 가정마다 곡식을 갈 때 쓰는 맷돌이 있었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대부분 이 맷돌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무거운 돌 두 짝으로 된 맷돌을 저희 할머니나 어머니가 돌리고 있으면 옆에 앉아 신기하게 들여다보다가 재미있겠다 싶어 나도 한 번 돌려보자고 하는데 조금만 돌리면 의외로 아주 힘이 듭니다. 힘도 힘이지만 맷돌 돌리는 요령이 없어서였겠지요. 그래서 금세 또 힘들다고 내려놓곤 했던 기억이 저도 있습니다. 

그 맷돌을 손으로 돌릴 때 쓰는 흔히 나무 손잡이의 명칭이 바로 어처구니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맷돌을 갈려고 하는데 나무 손잡이인 ‘어처구니’가 없다,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히겠습니까? 이 어처구니로 불리는 작은 나무 손잡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것 하나 없으면 그 무거운 맷돌을 돌릴 도리가 없지요? 그래서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상황을 “어처구니없다”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어처구니없는 삶

그러고 보면 주인공 삼손은 참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난 석 주 동안 살펴본 삼손의 삶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태어나기 전부터 택하고 거룩하게 구별하신 ‘나실인’인데 결정적인 순간마다 거룩이 아닌 세상 쪽을 선택하고, 자기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따라 삽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출하는 사사로 쓰려고 엄청난 힘을 주셨는데 그 힘 가지고 자기 정욕대로 쓰고, 또 그러다가 사고치고,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복수하면 더 큰 복수를 하는 데 힘을 쓰고 삽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16장 1절에서 삼손은 가사에 사는 한 기생을 좋아했다가 또다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킵니다. 또 바로 뒤 4절에 보면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무슨 죄겠습니까? 더욱이 혈기가 넘치는 젊은이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뭐 잘못이겠습니까만 문제는 삼손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앞서 딤나 여인의 외모를 보고 쏙 빠져서 부모가 왜 하필 이방인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 하느냐고 반대해도 빡빡 우겨서 결혼을 했다가 실패를 하고 큰 낭패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또 기생을 보고, 그 다음 바로 들릴라를 보고 사랑에 빠진 것입니다. 보아하니 이 둘도 블레셋 여인입니다. 특히 들릴라는 삼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무척 예뻤겠지요. 그래서 앞뒤 안 가리고 또 빠집니다. 결국 이 여인 때문에 이성과 판단력 잃고 배신당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너무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뭔가에 너무 빠지면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조정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삼손처럼 여자에게 빠지면 그 여자가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가 돈에게, 권력과 명예에게 빠지면 더 이상 내가 그 돈이나 권력을, 명예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취미에도 너무 빠지면 더 이상 취미가 아닙니다. 건강이나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나를 지배하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방해하기 쉽습니다. 왜? 하나님 대신 자기를 먼저 사랑해달라고, 섬겨달라고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빠질 대상은, 지나치게 빠질 대상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는 세상 그 무엇도 아닌 하나님에게만 빠져야 합니다.

그런데 삼손은 하나님께 빠지지 않고 세상의 정욕에 빠집니다. 그러다가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에게 완전히 푹 빠집니다. ‘들릴라’는 영어로 ‘딜라일라’(Delilah)입니다. 1968년에 나온 미국 가수 톰 존스(Tom Jones)의 노래 제목인데 우리나라에서 이를 번안해 조용남이 불렀다가 금지곡이 됩니다. 그런데 이 노래 원곡 가사를 보면 자신을 배신한 여자 이름을 Delilah(=들릴라)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삼손을 배신한 여인 들릴라의 이름이 영어에서 아예 ‘요부,’ ‘배신한 여자’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혀 눈이 멀기 전에, 잘못된 사랑에 눈이 멀어 이 ‘치명적인’ 이름을 가진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가 이 여인에게 배신당하고 힘의 원천인 머리카락을 잘리고 힘이 다 빠져 블레셋 군인들에게 잡혀 두 눈이 뽑힌 채 큰 연자 맷돌을 돌리게 되고 맙니다. 보세요. 정신 못 차리지요. 여러 차례 실패하고 고생도 했으니 정신 차릴 만도 한데 똑같이 실수하고 같은 죄를 짓습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어처구니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더니만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자 힘을 회복하고 마지막에 마지막 힘 한번 반짝 쓰고 죽습니다. 

16장 뒷부분에 보면 힘이 사라지고 눈이 뽑힌 삼손을 조롱하려고 블레셋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인 다곤 신전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 삼손을 끌어내 재주를 부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삼손은 비록 두 눈이 안 보이지만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면서 회복된 힘을 가지고 신전의 두 기둥을 붙잡고 무너뜨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함께 죽습니다. 

그의 죽음이 멋있어 보입니까? 역시 멋진 영웅의 최후라고 생각되십니까? 아닙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평생 하나님 위해 쓰라고, 이스라엘 백성들 구하는데 쓰라고 엄청난 힘을 주셨더니 평생토록 딴 짓 하는 데만 쓰다가 맨 마지막에 반짝 한 번 하나님 위해 쓰고 죽습니다. 그러니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지요. 그래서 삼손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처구니없는 삶이요 어처구니없는 죽음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본디 목적대로 안 쓰면 하나님이 다 거두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삼손의 힘, 눈, 자유 모두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건강, 능력과 권력 모든 것을 본디 목적대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하나님 대신 다른 것에 빠져 낭비하게 되면 하나님은 삼손처럼 다 거두어 가십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에 설교준비를 하면서 본문을 자세히 읽고 묵상하다가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21절을 보세요. 함께 읽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
을 돌리게 하였더라

두 눈이 뽑힌 삼손이 가사에 끌려가 뭘 돌립니까? 맷돌이지요. 감옥에서 커다란 맷돌(연자 맷돌) 돌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맷돌을 돌리면서 뭘 잡았겠습니까? 그렇지요. ‘어처구니’입니다. 이스라엘 맷돌에도 어처구니가 있어요. 다만 커다란 연자 맷돌은 사람이 아니라 나귀나 소가 돌리니까 좀 더 큰 어처구니겠지요. 이 장면에서 제가 깨달은 것입니다. “삼손이 결국 ‘어처구니’를 잡게 되는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진짜 잡아야 할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 잡아야 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만 잘 붙잡고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삼손은 엉뚱한 어처구니를 잡고 살았습니다. 육신의 정욕, 세상의 욕심 잡고 살았습니다. 예쁜 여자 잡고 살았습니다. 이런 것들은 꼭 붙잡아도 금세 사라지고 말 허무한 것들입니다. 이것 붙잡으면 힘이 되고 위로 받을 줄 아는데 아닙니다.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니까 삼손이 어처구니없는 삶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짜 잡아야 할 하나님 안 붙잡고 세상의 허무한 것 붙잡고 살면 삼손처럼 엉뚱한 어처구니를 잡은 삶이 되고 그래서 결국 어처구니없는 삶, 어이없는 삶,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하도 어처구니없어 하나님이 그렇게 억지로 맷돌 돌리게 하시고 억지로 어처구니를 잡게 하신 것입니다. “야 이놈아 그거라도 잡아라. 네 인생 마지막에 평생 나를 안 잡고 산 것을 후회하며 그 어처구니 잡고 맷돌 돌리며 반성해라.”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삼손은 그래도 마지막에 깨닫고 마지막 힘을 반짝 써서 블레셋 사람을 많이 죽이고 죽습니다. 인생 종점에 가서야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했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안타깝지요. 너무 아쉽지요.

❚아름다운 죽음

지난 23일 뉴스에 한 분의 죽음에 대한 보도가 나왔습니다. 시각장애인이면서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미국 차관보까지 올랐던 강영우박사입니다. 이 분은 독실한 신앙으로 교회를 섬긴 장로님으로 68세를 일기로 췌장암으로 별세했습니다. 68세라면 너무 짧고 아쉬운 죽음입니다. 아쉬운 죽음이라는 점에서는 삼손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의 죽음은 삼손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삼손은 그저 아쉽기만 한 죽음이라면 강영우장로님의 죽음은 정말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죽음입니다.

1944년 경기도 문호리에서 태어난 강장로님은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듬해 축구공에 눈을 맞아 시력을 잃었습니다. 같은 해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나며 10대 가장으로 불우한 청소년기를 겪었지만 연세대를 졸업한 뒤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교육학으로 한국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가 됐고, 2001년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에 의해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로 발탁됐습니다. 당시 미국 이민 100년 한인 역사상 최고위직이었습니다. 강장로님은 유엔 세계장애위원회 부의장과, 소아마비를 극복한 루스벨트 대통령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루스벨트 재단 고문도 지냈습니다.

강장로님은 작년 10월 암이 발견돼 투병을 시작했고, 연말에 자신을 아는 모든 지인들에게 일일이 이런 작별 편지를 보냈습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을 살아온 제가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을 허락받아 감사합니다.” 올 1월에는 국제로터리재단 평화센터 평화장학금으로 25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부인 석은옥여사에게 임종을 앞두고 보낸 편지 내용입니다. 제가 읽어드리지요. “아직도 봄날 반짝이는 햇살보다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당신을 난 가슴 한가득 품고 떠납니다. 지난 40년간 늘 나를 위로해 주던 당신에게 난 오늘도 이렇게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 더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장례식은 자신이 평생 섬기던 버지니아 센터빌 중앙장로교회에서 3월 4일 치러질 예정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분의 죽음에서 감동을 느낍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임종을 앞두고 “주님, 제 인생이 평생 고난의 연속이었는데 이제 좀 안정되게 인정받고 살만 하니 저를 왜 이렇게 빨리 데려가십니까?” 하고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용히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지인들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사랑한 아내에게 사랑의 편지를 남기고,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기부금으로 내놓고 가셨습니다. 저는 이 분의 삶이 엄청난 역경을 이겨낸 아름다운 본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이분의 죽음이 더욱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그 누구의 죽음보다 위대한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면 죽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할 줄 알았지 준비할 줄은 잘 모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었건 젊건 상관없이 언제나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참된 신앙은 그 사람이 살아있을 때보다 오히려 죽음을 맞이할 때 가장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삼손처럼 아쉽기만 한 죽음, 어처구니없는 죽음도 있습니다. 강영우장로님처럼 위대하고 아름다운 죽음, 누구보다 커다란 감동과 영향력을 끼치는 죽음도 있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사셨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며, 우리는 과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마지막 순간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어떤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결단하고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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