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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 (막 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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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족 공동체 (막 3:31-35)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탄생

기독교에서는 서로를 형제, 자매라 부릅니다. 습관적으로 사용할 때는 별로 의식하지 않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가 막힌 호칭입니다. 형제, 자매는 한 가족이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교회 성도들은 모두가 한 가족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핏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당황스런 호칭일 수도 있습니다. 요즘도 드라마에서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일생 동안 생면부지로 살았던 사람들이 같은 핏줄이라는 이유로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자기 재산까지 다 내어 놓습니다. 물론 서구인들 또한 혈통에 대한 집착은 무시 못 할 것입니다.

이런 정서들에 비추어 본다면 기독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형제 자매라는 호칭이 얼마나 혁명적인 성격인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과 관련된 주님의 말씀은 이미 21절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역시 가족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잘못된 소문과 오해 때문이지만 이렇게 먼 길을 찾아올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밖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무시한다는 듯이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33)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주위에 둘러않아 있는 무리들과 제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34)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가족의 정의를 새롭게 쓰고 계신 것입니다. 핏줄로 맺어진 것인 가족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다”(35)라고 규정합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동일하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는 혈통이나 인간적인 생각이나 의지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믿음을 가진 자들은 혈통이나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니 또한 형제 자매라 불러도 좋은 한 가족입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성도와 같은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엡2:19)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의 정의를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육신의 부모와 형제 자매와 재산을 버리고 선교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새로운 가족이 된 교회 성도들과 함께 매일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떡을 떼었습니다. 새롭게 형성된 가족 공동체는 민족적 경계마저 무너뜨려버렸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헬라인이나 로마인이나 모두가 한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2:14) 교회 안에서는 인류가 한 형제 공동체였습니다.

주인과 노예의 경계도 없어졌습니다. 빌레몬서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인인 빌레몬을 향하여 그의 노예였던 오네시모를 형제처럼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몬1:16-17) 교회사에 의하면 오네시모는 에베소의 감독이 되었다고 합니다. 성적인 차별도 무너졌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교회 안에서의 여성 활동들이 높아졌고, 이 때문에 사도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는 자제령을 내려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이 『신의 도성』이라는 대작을 썼습니다. 이 책은 로마가 기울어가는 과정에서 쓴 책입니다. 로마인들은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었는데 불구하고 왜 로마가 이민족의 침입에 의해서 쇠퇴해져 가는지 불만을 표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해서 기독교를 변론하였는데 그는 기독교의 목표는 이 땅의 도성의 건설에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의 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목표가 있음을 밝혔습니다. 서로의 목표와 삶의 양식이 다릅니다. 이 땅은 땅의 논리를 따라 핏줄로 나누고 민족으로 나누고 신분으로 나누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모든 경계들을 철폐합니다. 현대 사회도 인간들을 끊임없이 가족으로, 민족으로, 신분으로 나누려 하지만 주님의 교회 안에는 모두가 한 가족입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

사해동포(四海同胞)라는 말이 있습니다. 온 천하 사람이, 동포(同胞), 곧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와 같다는 뜻입니다. 사해동포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를 결정적으로 갈랐던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유대교는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를 그대로 고수하였지만 기독교는 가족과 민족 경계를 허물고 세계를 향하여 나아갔습니다. 그 결과 유대교는 민족 종교로 전락을 하였지만 기독교는 백인에서 흑인들, 서구에서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는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 유대인들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방인들을 믿음의 공동체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그들이 가졌던 모든 특권들을 버렸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선택받은 민족이고 구원을 받는다는 선민사상을 버렸습니다. 할례를 받고, 안식일이나 정결법 등을 지켜야 한다는 율법도 버렸습니다. 단 하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음만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100년도 안 되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세상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는 History입니다. 곧 His Story입니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펼쳐져 가는 곳이 바로 역사라는 무대입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국면이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만민이 한 형제가 되는 사해동포입니다. 원래 아담으로부터 나온 인류는 한 혈통이었습니다.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현대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류가 하나 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인터넷과 교통수단의 발달로 그동안 막아왔던 민족 간의 장벽들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경제적 교류가 활발해지고 온난화와 같은 지구적인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인류는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음을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최근 10여년 사이에 한국 사회에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한 외국인 노동자들의 물결은 세계가 점점 하나 됨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이런 세계화를 거스르는 민족주의적 반발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사해동포주의를 향하여 갈 것입니다. 세상은 어찌 되었든 교회 안에서는 더 이상 가족이나 민족의 경계 없이 모두가 단지 형제 자매라 불리는 것이 타당합니다.

통일과 통합은 자기희생이 따라야 이룰 수 있습니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던 가족이나 민족이라는 보호막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기독교는 율법과 민족이라는 틀을 버렸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통일이라는 과업 또한 자기를 부인하는 과정입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통일이라는 비전과 거리가 먼 것은 자기를 희생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가진 물질, 위치, 특권을 버리려 하지 않고 상대방을 종속시키려 하니 통일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제는 분단과 갈등에 익숙해져서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톨스토이의 우화에 나오는 사람의 형편과 같다 할 것입니다. 초원에서 맹수의 습격을 받은 한 나그네가 맹수를 피해 물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물속에는 커다란 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나그네는 땅과 물의 틈바귀에 나 있다는 야생관목 가지에 매달려 간신히 몸을 지탱합니다. 이번에는 검은 쥐와 흰 쥐 두 마리가 나타나서 자신이 매달려 있는 관목 줄기를 갉아먹기 시작합니다. 이제 나그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나그네 바로 옆 관목에 꿀이 묻어 있습니다. 

나그네는 위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꿀을 핥기 시작했고 그러다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를 잊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쌓아놓은 번영은 단 한순간에 끝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열과 불안과 스트레스의 근원은 사실 분단에서부터 기인하고 있습니다. 분단은 민족의 발전도 막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경계를 허물고 하나를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부응하느냐에 따라 민족이 발전할 것입니다. 민족의 발전이라는 측면을 떠나, 민족이 하나 되어 가고 그것을 넘어 사해동포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동북아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민족주의가 강성하기 때문입니다. 언제쯤이면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이나 북한이나 다 한 인류임을 고백할 수 있게 될까요? 쉽지는 않지만 신앙인들은 더 이상 민족주의의 장벽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한국인의 나라도 일본인의 나라도 중국인의 나라도 아닌 모든 인간들이 함께 누리는 나라입니다. 이 하나 됨은 물론 제국주의적인 하나 됨이 아닙니다. 중국이 소수민족들을 억압하며 억지로 중화를 강조하는 그런 하나 됨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이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나누는 진정한 사해동포의 세계를 말합니다. 주님이 꿈꾸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작은 자와 소수 민족이 존중을 받는 그런 하나됨의 세계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비전이 있습니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19:23-25)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위 아래에 있는 강대국들입니다. 

이 나라들은 서로 싸웠고 이스라엘은 이들 나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의 비전은 이 세 나라가 모두 한 형제 국가처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비전에서 중국과 한국과 일본이 서로 평화의 국가를 이루는 비전을 봅니다. 최소한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들 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가족의 조건

물론 여기에는 기본적인 조건이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예수님 주변에 둘러앉은 자들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요 자녀입니다. 우리가 혈통이나 민족이나 신분을 넘어 한 가족이 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어떤 사랑이나 평화나 철학이라는 이념 아래서가 아닙니다. 예수님 안에서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얽매던 이전 것들에서 해방된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뜻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와 같은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다시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이제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가 되어 갑니다.

또한 하나님의 가족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35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온갖 인정과 핏줄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에서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무엇보다 정의에 기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사회에서 가족주의는 얼마나 끔찍한지 모릅니다. 박노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인으로 귀화한 러시아인인데 한국역사를 전공했습니다. 이분이 한국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무어냐고 물어보니까? 

‘가족주의’라고 했습니다. 자기 혈통만 끔찍이 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족주의가 연장되어 지연과 학연으로 엮인 사회를 만듭니다. 속칭 패거리문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패거리문화는 자기편이 아니면 적이고, 집단을 따르지 않으면 왕따 시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고립이고 고독입니다. 참더라도 집단에 붙어있는 것이 안전합니다. 패거리문화는 ‘정의’가 아니라 ‘정’으로 이루어진 문화입니다.

우리는 이제 정에 기초한 가족관에서 좀 탈피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특징은 다음과 같은 예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통법규를 위반했습니다. 경찰에게 적발되었는데 경찰이 마침 자기 친구였습니다. 주위에는 다른 경찰이 없었습니다. “여보게 날세. 미안하네” 한국인은 이럴 경우 “다른 사람들 보기 전에 빨리 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친구 오랜 만이네.” 하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범칙금 스티커를 끊습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정이 좋을 때도 있지만 이 정 때문에 정의가 망가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교통 법규 위반의 경우라면 봐 줄 수 있겠지만 친구에게 편의를 봐주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로 돌아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국사회의 도덕 지수가 잘 오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도 이처럼 자기편과 정을 중시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정의’입니다. 주님은 가족의 기초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볼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여 기독교가 반가족적인 것은 아닙니다. 피로 이루어진 인륜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가족들에게 모진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한 가정의 아들로서 부모와 형제들에게 충실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예수님은 어머니를 걱정했습니다. 정신이 없는 중에서도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6-27)  디모데 서에서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고 말씀합니다.

나중에 마리아는 교회사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신 분으로서 성모라 불린 정도로 추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베드로 이후 예루살렘 교회를 책임졌던 기둥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했으며, 낙타무릎이라 불릴 정도로 기도의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성전에서 떨어져 순교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극단적인 것 같지만 이를 통해서 가정의 기초가 무엇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가정은 버릴 각오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 가정이라면 우리는 열심히 사랑하고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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