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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쇠가 주님에게 있습니다 (계 3: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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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가 주님에게 있습니다.(계 3:7-11)      
 
신앙생활은 교회생활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교회는 주님이 세우신 기관이며.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생활을 잘하려면 교회를 보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교회를 긍정적인 눈으로 보면 교회생활을 잘 할 수 있고, 교회를 부정적인 눈으로 보면 교회생활을 잘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인 눈을 가지고 교회를 보면 부정적인 부분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죄인들이 모여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변화는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합니다.
   
교회는 병원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는 환자들이 많습니다. 병원이 클수록 환자는 더 많은 것입니다. 종합병원에는 다양한 환자들이 모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병원이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완전하신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어느 날 크로스비 지 채펄에게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나에게 한 번이라도 완전한 교회를 보여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 교회에 가겠습니다. 물론 예수도 철저하게 믿겠습니다.” 그때 채펄씨는 대답했습니다. “그런 교회를 소개할 수 없어서 미안하군요. 만약 그러한 교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들어가는 순간에 당장 완전성이 깨져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땅에는 완전한 교회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바꿔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어떤 사람은 불행한 가정생활을 합니다.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은 가족들이 완전하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가족들에게도 단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족들의 단점을 바라보며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장점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정생활은 행복한 것입니다. 반대로 불행한 가정생활을 하는 사람은 가족들에게 있는 장점 보다는 단점에 집중하기 때문에 감사보다 불평과 원망이 앞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생활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봅시다. 광야생활은 힘든 생활이기는 했으나 그래도 주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고, 주님의 보살핌으로 인하여 많은 기적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서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었고,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셨고,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광야의 단점에 집중했던 사람들은 불행한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반면 광야의 장점에 집중했던 사람들은 행복한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다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구성원들의 장점을 보고 감사하는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지난 4주간 사도신경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성령의 감동이 있어서 사도신경을 잠시 쉬고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교회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를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소아시아에는 7교회가 있었습니다. 각 교회의 특징을 간략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버린 교회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죽도록 충성한 교회입니다. 버가모 교회 발람의 교훈을 따라간 교회입니다. 두라디아 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하고 우상을 숭배한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교회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은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는 현재 ‘알라 쉐히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 인구가 1천 명 정도 되는 도시였는데 지금은 8만 명 정도 살고 있다고 합니다. 빌라델비아는 주후 5세기에는 ‘작은 아테네’로 불려 질 만큼, 많은 신전이 있었고 거기에서 많은 종교행사가 거행되었던 우상의 도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아서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제가 읽은 글 중에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교인 수는 70-80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교인수가 몇 만 명이었던 것에 비교하면 빌라델비아 교회는 아주 작은 교회였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는 유명한 사람이 교회를 세운 것도 아닌 것 같고, 유명 인사들이 출석하는 교회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아주 작은 교회이며 작은 능력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있었던 여러 교회 중에 주님이 믿을 수 있는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였습니다. 저는 바라기는 주의 은혜로 우리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주님이 믿을 수 있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였습니다.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주님이 닫으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그 주님이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는 열린 문을 두셨으니 닫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서 “열쇠가 주님에게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이 가지신 열쇠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이 가지신 열쇠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열쇠를 가지셨다는 말은 주님에게 권한이 있다는 말입니다. 가령 곡간의 열쇠나 금고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재정의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어떤 권한을 가지셨습니까? 
 
1) 예수님은 믿는 자를 천국에 들여보내는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사람들이 범죄 한 후에 천국문이 닫혔습니다. 천국문이 닫혀 있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도 자기의 능력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성경 롬 3:23에서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님은 천국의 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고난당하신 이유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민 21장에 보면 광야를 횡단하던 백성들이 길로 인하여 하나님과 주의 종인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원망과 불평이 큰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의 종을 원망하고 주의 종에 대해서 불평하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리고 죽어갑니다. 뱀의 독으로 고통당하던 백성들이 모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모세가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십니다. 백성들 중에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놋뱀을 바라본 자들은 살게 되고 뱀을 바라보지 않은 자들은 죽음을 당합니다.
   
요 3장에 보면 장대에 달린 놋뱀이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보여주는 비유라고 가르쳐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사람은 영생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고 십자가의 공로를 거절하는 사람은 영벌을 받아 지옥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천국에 들여보내는 권한을 가지신 분입니다. 
 
2) 예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왕권을 가지신 분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임금이었습니다. 고대국가에서 왕은 나라의 주인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습니다. 어떤 사람도 왕의 명령에 불복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는 말은 주님에게는 온 우주의 통치권이 있다는 말입니다.
   
온 우주의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성경 마 28:18을 보니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또 성경 빌 2:10에서 말씀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예수님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왕이십니다. 그래서 계 19:16에서는 예수님을 ‘만앙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징벌의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범죄자를 잡아서 감옥에 가두는 권한이 있습니다. 주님이 열쇠를 가지셨다는 의미는 주님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을 징벌하는 권한을 행사하신다는 말입니다.
   
성경 신 28:15-68을 보면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징벌하십니다. 하늘의 문을 닫으셔서 온갖 저주가 임하게 하십니다. 기근과 전쟁 그리고 질병 등 다양한 저주를 통해서 징벌하십니다. 성경 계 21:8을 보면 믿지 않는 자들과 불의한 자들을 영원한 지옥의 고통으로 징벌하십니다. 계 20:1에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와서 옛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불리는 용을 잡아 가두고 문을 잠가 버립니다. 주님은 마귀도 징벌하십니다. 성경 히 12:5-8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들을 징계로 징벌하셔서 바른 길을 가게 하십니다. 
 
4) 예수님은 축복의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왕은 왕과 나라에 충성한 사람들에게 상을 내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충성스러운 자기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천국 창고의 열쇠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 창고를 열어서 말씀대로 사는 백성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말 3:10을 보면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신 28:12을 보면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하는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5) 예수님은 사역의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주의 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역의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주의 일을 하는데 곁에 있으면서도 주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역의 문이 열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주님이 사역의 문을 열어주시면 해야 할 주의 일이 보이고 그 일을 할 마음이 생기고 또 그 일에 헌신합니다. 사역의 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고후 2:12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사역할 때 주님이 드로아에서 사역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사역의 문이 활짝 열리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사역의 문이 열릴 때 기쁨으로 헌신하셔서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리기를 바랍니다. 
 
6) 예수님은 안전의 권한을 가지셨습니다. 
   
본문 말씀 10절을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가지신 다윗의 열쇠는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안전장치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입니다. 양의 안전이 목자에게 달린 것처럼 우리의 안전도 주님에게 달린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목자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양을 버리지 않고 양을 지키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저는 며칠 전에 운전하다가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주머니와 부딪힐 뻔했습니다. 좌회전을 하는데 골목에서 자전거를 타고 오는 분을 보지 못해서 큰일 날 뻔했습니다. 또 한 번은 골목에서 직진하는데 어떤 아저씨가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와 자동차 사이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물건을 끌고 나오는데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저는 즉시로 주님에게 감사했습니다. 주님이 저를 지켜주셨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안전의 권한을 가지신 분입니다. 
 

2. 예수님은 누구를 위하여 긍정적으로 열쇠를 사용하시고 누구에게 열린 문을 두십니까? 
   
본문 말씀 8절에는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 ‘네 앞에’라는 말은 그 편지의 대상이 되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떻게 주님을 섬겼는가를 살펴보면서 주님이 누구를 위하여 긍정적으로 열쇠를 사용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은 최선을 다해 주님을 섬긴 사람들을 위하여 열쇠를 사용하십니다. 
   
8절을 보니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 말은 자기에게 있는 능력이 크든 작든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문을 열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은 우리가 큰 것을 가졌느냐 작은 것을 가졌느냐보다 최선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것이 작아도 그것으로 최선을 다했다면 주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몇 달란트를 맡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최선을 다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맡은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눅 2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헌금함에 돈을 넣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여기서 렙돈은 동전의 명칭입니다. 그 과부는 금전이나 은전을 헌금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가치가 적은 동전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녀의 형편을 아시기 때문에 그녀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눅 2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큰일에 관심이 많은데 주님은 최선에 관심이 있습니다. 전 원주연세의과대학교목이셨던 김영호 목사님의 기도시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제목은 “작은 것 하나”입니다. 
 
   주님,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 당신에게 한 것이라 하셨지요.
   그러니 많은 사람들에게 행해야 한다는
   우리의 헛된 욕심을 버리게 해 주시고
   작은 자 하나를
   당신 사랑하듯 사랑하며 살게 해 주소서 
 
   주님,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셨지요.
   그러니 많은 것을 행해야 한다는 
   우리의 헛된 욕심을 버리게 해 주시고
   작은 것 하나를 
   서로 함께 나누며 살게 해 주소서 
 
   주님,
   작은 일에 충성한 자를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시며
   당신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리라 하셨지요.
   그러니 큰 일을 행해야 한다는
   우리의 헛된 욕심을 버리게 해 주시고
   작은 일 하나를
   당신의 기쁨으로 행하며 살게 해 주소서 
 
   주님,
   두 세 사람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당신이 그들 가운데 함께 있으리라 하셨지요.
   그러니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한다는
   우리의 헛된 욕심을 버리게 해 주시고
   작은 모임 안에서
   주님 당신을 만나며 살 게 해 주소서 
 
주님의 관심은 우리의 능력이 크냐 작으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작은 능력을 가졌어도 그것으로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면 첫째가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 첫 번째 계명인 하나님 사랑은 다하는 사랑입니다. 마 22:37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신앙생활은 다하는 사랑, 최선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2) 예수님은 말씀을 지킨 사람들을 위하여 열쇠를 사용하십니다. 
   
본문 8절에 보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자기의 주의나 주장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각, 내 사상, 내 철학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내 생각과 내 사상, 내 철학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느냐를 살펴야 합니다. 시119:133을 보면 시편 기자는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시편기자는 자신의 발걸음이 세상의 유행이나 철학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기를 기도합니다.
   
백장흠 목사님은 말씀을 지키려면 3가지가 해야 한다고 설교하셨습니다.
   
첫째, 말씀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돈이 소중하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낭비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존경심을 갖습니다. 나라가 소중하다고 알고 있는 사람은 애국자가 됩니다. 사람이 복되게 살려고 하면 나는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갖고 있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면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영혼의 소중함을 알아야 전도하게 됩니다. 내가 받은 사명이 소중함을 알아야 충성을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소중하게 여길 때에 지키게 됩니다.
   
둘째, 말씀을 그대로 믿는 것이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 지식으로 말씀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상식으로 말씀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세상 지식과 말씀이 다르면 세상 지식보다 말씀이 옳다고 믿고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 나오면 상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지킬 수 있습니다.
   
셋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면 자기와 싸워야 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신은 세상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길들여진 육체를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침에 늦잠 자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은 새벽에 일어나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몸이 아침에 늦잠 자도록 길들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습관을 바꾸려면 자기와 싸워야 합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새벽에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이겨야 합니다. 
 
3) 예수님은 신의를 지킨 사람들을 위하여 열쇠를 사용하십니다. 
   
변함없는 충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보니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고 말씀합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본문이 기록될 당시 소아시아는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황제 숭배를 내세워 기독교를 엄청나게 박해했습니다. 장장 300여년이나 박해는 계속되었습니다. 박해가 계속되자 박해를 두려워하며 다른 종교와 타협하는 사람이 생기고, 교회를 등진 채 주님을 떠나가는가는 사람들이 생기고, 아예 타락하여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믿음을 지켰던 것입니다.
   
몇 년 전에 6층에서 발생한 불이 7층 일부까지 번지자 7층에 살던 67세 되신 할머니가 완강기 밧줄을 타고 내려오다 2층 높이에서 떨어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중태라는 뉴스가 있었습니다. 화재가 났을 때 그 분이 완강기의 밧줄을 잡은 것은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끝까지 붙들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다쳐서 중태에 빠진 것입니다.
   
믿음도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가 있습니다. 시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가는 교회를 상징하고 동시에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나무가 열매가 풍성하려면 어디에 심겨지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에 심겨지고 주님에게 심겨져야 합니다. 또 그 자리에서 충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무가 자리를 자꾸 옮기다보면 병들고 시들고 결국은 말라 죽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함없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이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주님이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작은 능력을 가졌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섬깁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지킵시다. 그리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주님에 대한 신의를 지킵시다. 그리하여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다윗의 열쇠를 사용하시고 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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