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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선의 모습 (마 2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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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의 모습 (마 23:1-12)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어제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서 네 가정이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주례를 하고 예식장에서 점심을 먹으며 교우들과 이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애경사 때 부조를 하는 것은 큰일을 치루는 가정에 상부상조를 하기 위함인데, 체면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값비싼 결혼 음식을 먹게 해서 결국 상인들의 배만 불리는 셈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작가 김정일씨가 쓴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있습니다. 

유교의 허례허식 체면 문화의 폐해를 지적한 글입니다. 그 글에 보면 중국과 일본이 모두 유교를 버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례를 들면, 중국에는 공산주의 정권 수립 후 봉건적 습관으로 여겨져 금지되었던 상가에서, 곡해주는 업종인 ‘효자업’이 다시 부활되어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인데, 작은 돈만 받고도 곡령자(哭靈者.賣哭業)들이 슬픈 분위기를 조성해주자, 고객들이 쇄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어제 밤 SBS 8시 뉴스에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명품 대여점이 성업중이라고 합니다. 7백만 원 하는 명품 가방은 7-8만 원이면 2-3일 동안 빌릴 수가 있고, 1500만원 하는 밍크코트는 15만원이면 며칠 동안 빌릴 수가 있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이집트의 혼례식 용품 대여점들에서는 웨딩드레스나 비디오카메라 같은 물품뿐 아니라, 하객까지도 빌려준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 친척이 적은 신랑신부들은, 결혼식 때 옷을 잘 차려 입은 남녀를 혼례식용품 대여점에서 빌려, 부유한 삼촌이나 숙모 또는 사촌으로 행세토록 한다는 것입니다. 하객들에게 훌륭한 가문으로 보이기 위함인데, 삼촌은 일당 1-2만 4천원이면 구할 수 있으며, 숙모 임대료는 이보다 약간 더 비싸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간의 허례허식, 또는 외식과 가장하는 습성은 세계 모든 민족이 다 같은 모양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원래 거짓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제자들을 향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 특히 위선을 지적하고, 그들을 본받지 말도록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본받지 말도록 교훈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특징적 행위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언행의 불일치입니다. 

2절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모세의 자리’란 원래 회당에서 서기관들이 율법을 가르칠 때 앉았던 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모세의 위치와 권위가 지닌 상징성에 초점을 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 준 인물로서, 그 능력이나 역할로 보아 이스라엘 역사상 모세를 능가할 인물은 없었고, 따라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거의 신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기 전에,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랍비, 즉 선생이라고 자처하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입만 열면 나의 스승은 누구고, 그 스승의 스승은 누고이고 하면서, 계속 거슬려 올라가 결국 모세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이 모세의 정통 후계자라는 사실을 강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이렇게 자신들을 모세와 연결시키며 스스로를 높이는 데 열심이었으면서도, 그들에게는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로서의 책임 있는 삶이 없었습니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실제 그들의 삶에 있어서는 아브라함이 보여 준 믿음의 행동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높은 자리만 탐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믿음과 경건은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책망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만 국한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역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는 좋아하면서도, 그에 합당한 의무와 책임은 잊어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오히려 지위와 직분이 높아지면 특권이 많아지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지위와 직분에는 그에 따른 행동과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김동길 교수의 칼럼에 ‘큰 일 작은 일’이란 글이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은 대개 큰 일 맡기를 좋아하고, 작은 일 맡기를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아동들까지도 학교에서 하는 연극의 주역을 맡으라면 싱글벙글 좋아하지만, 한두 마디밖에 하지 않은 역을 하라고 하면 심술을 부리고 안 좋아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이렇게 허영에 들뜬 것인지, 혹은 우리 교육이 잘못 되어서 그런지 잘라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좌우간 우리 사회에 평화가 없는 최대의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저마다 큰일만을 하겠다고 날뛰는 데 있다고 봅니다. 덮어 놓고 큰 것을 택하는 것이 사람의 어쩔 수 없는 천성이라는 것을 시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면사무소의 서기나 했으면 꼭 알맞을 사람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고, 보리밭의 김이나 맸으면 꼭 적당할 인물이 큰 기업체의 사장이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영국의 평론가 존 러스킨도 사람이 지닌 이러한 약점을 지적하면서 “선장이 되기를 갈망하는 자가, 반드시 유능하여 그의 책임 하에 그 배가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리라는 확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무턱대고 선장이라는 자리에 앉아 아무개는 선장이라고 불리고 싶어서 야단들이다”고 꼬집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교회의 직분을 감투나 계급으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장로나 집사나 권사가 되려면 거기에 걸맞은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데, 그러한 책임과 의무는 관심 밖이고, 그저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 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직분을 맡으려고 하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직분에는 거기에 알맞은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의 중직 자들은 예배 생활, 기도 생활, 전도 생활, 헌금 생활, 헌신과 봉사 등 모든 신앙생활과 언행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자리 곧 높은 자리만 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경계하면서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본받지 말아야 할 이유로서,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언행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가리며 표리부동한 자 또는 위선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표리부동하고 위선이 가득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질타를 당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훼손하는 것도, 이처럼 많은 성도들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하지, 그에 준하는 삶을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국민일보에서 교계 지도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국 교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그 기사에 의하면 <한국의 초대 기독교는 사회 변화는 물론, 교육 의료 문화 복지 경제 등 모든 분야의 발전 주역이었으며, 사회통합의 주체였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사회 전반에 걸쳐 도도한 물결을 형성하고 있다. 사회 약자들을 위한 사회시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나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한 사회 전반의 목소리는 냉소적이고 냉혹하다. 우리 사회에 기여한 한국 교회의 공로에 비해, 그 평가는 인색한 편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 성장 둔화의 1차적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란 질문에 응답자의 35%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꼽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진실하시니 만큼, 하나님의 백성들도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삼상 12:24에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고 했고, 시51:6에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라고 했습니다. 제가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언젠가 제가 세상을 떠날 때에 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진실한 목사였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고,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착하고 충성되고, 그리고 진실한 나의 종이여”라는 최종적인 선언을 듣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그 때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진실한 목사였었다.”고, “그는 진실한 장로였었다.”고, “그는 진실한 집사였었다.”고, “그는 진실한 신자였었다.” “그는 참으로 진실한 인간이었었다.”라는 말을 듣도록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살도록 힘쓸 수 잇기를 바랍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할 필요는 없으나,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다.” 이 얼마나 진실이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꼭 살아야 하고, 꼭 성공하고, 꼭 건강하고, 꼭 장수해야 할 필요는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꼭 진실해야 할 필요는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외식입니다. 

5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경문’이라 신 6:8에 따라 만든 양피지 조각으로서, 거기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옷술’이란 민 15:38-41절에 근거하여, 옷단 귀에 술을 붙인 것을 말하는데, 이는 유대인이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여 방종한 삶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표로 만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이면 팔에 경문을 차고 길게 옷술을 늘어뜨린 특유의 검은 가운을 입고 자랑스럽게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곤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유대인의 행동에는 어떤 잘못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이 경문을 차는 것과 옷술을 달고 다니는 것 자체가 잘못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앞서 살펴보았듯이 경문이나 옷술 자체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었기에, 그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경문이나 옷술이 의미하는 본질 자체를 망각하고, 이를 오히려 자기들을 과시하는 자랑거리로 변질시키고 만 그들의 정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경문과 옷술은, 모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장식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외식(外飾)하는 자(hypocrite)란 단어의 본래 뜻은 ‘연극배우’입니다. 고대 극장에서 연극 연습을 할 때면 배우들은 오랫동안 연기할 대상들을 표현하기 위해 분장 대신에 가면을 쓰곤 했습니다. 배우들을 지켜보는 이들은 누구라도 생존하는 사람과 생활을 보고 있다고 착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있었던 풍경은, 청중에게 즐거움과 감명을 주고 박수갈채를 받기 위해 본인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해야 하는 연극(show) 배우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 외식하는 연극배우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누구인가 알아맞히어 보십시오. <그는 기독교 용어들을 자유롭게 사용했습니다. 그는 전능자의 축복과 기독교인의 신앙 고백이 자신의 새로운 정부의 정신적 기둥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역사적인 책임감으로 가득 찬 아주 신중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는 각종 신문, 특히 기독교계의 신문에 종교적인 글들을 실었습니다. 

그는 너덜해진 성경을 보이며 그 곳에서 자신의 모든 힘이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그는 세계 제 2차 대전을 일으키고,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희대의 독재자요 살인마인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종교적인 박사였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실제는 전혀 없었던 외식과 거짓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가장 심한 위선자란, 교회 안에 위선자들이 너무 많다고 하면서,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기를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일관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사업하는 곳은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는데도, 그렇다고 사업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사회가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어도, 그 사람은 은둔자로 살겠다고 마음먹지는 않습니다. 지옥은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선자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곳에 가지 않도록 확실히 준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가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그를 자신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위선자들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면, 그러한 분은 지금 이 시간 자신의 거울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식을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거짓과 허위는 설 곳이 없게 되고, 우리의 참된 모습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척 하는 사람이 가장 큰 위선자입니다.

3. 명예욕과 교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신 것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 잔치와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서 랍비라 칭함을 받기를 좋아하느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만일 주님께서 오늘날 우리나라 교회를 보신다면, 이와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교계의 대규모 집회 광고입니다. 

그러한 광고를 보면 그 대표자 명단에 명예 고문, 고문, 자문 위원, 총재, 명예 총재, 대표 총재, 사무총장, 대표 총무, 등 수 많은 대표자들이 있어서 누가 진정한 그 집회의 지도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왜 이처럼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까? 그것은 바로 오늘날 교계의 지도자들이 옛날 바리새인들처럼 너도 나도 높은 자리에 연연하고 지도자라고 칭함을 받기 원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 목사들이 이러한 면에서도 먼저 회개할 것이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를 놓고 다투는 우리 인간들에게, 주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낮고 천하다고 싫어하는 십자가를 바라보시며,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일을 가리켜 “내가 높이 들릴 것이다”라고 하셨고, 가룟 유다가 주님을 팔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을 때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주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신비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회당과 잔치의 상석이 진정한 상석이 아니고, 가장 낮고 천하며 수치스러운 십자가가, 최고의 상석이 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시 여러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높은 자리만 탐하던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의 바람대로 실제 높아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오늘날 위선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군마 위에서 깃발을 날리며 총독으로 위세를 떨쳤던 빌라도 역시, 여론을 의식해 죄 없으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넘겨줌으로써 비겁자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셔서 아무도 지지 않으려는 치욕과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께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토록 만물의 찬양 받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과연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No Cross, No Crown)는 말은 영원불변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영안을 떠서 과연 어느 자리가 진정한 상석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땅의 상석으로 달려가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십자가로 향하는 삶을 살아서, 세상의 헛된 영광을 구하던 자들이 가슴을 치며 후회할 때, 우리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책망을 보면서, 이를 단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만을 향한 책망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매서운 책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있었던 언행 불일치. 외식, 교만과 명예욕 같은 위선을 버리고,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 진실한 인격, 겸손한 언행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며, 이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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