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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등 (막 15: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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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등 (막 15:6-15) 
 
 
❚채찍질

‘채찍’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죽이나 노끈 등으로 만든 긴 줄인데 보통 짐승을 몰 때 사용하지만 다른 사람을 때리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채찍으로 누군가를 때리는 것을 ‘채찍질 한다’고 말하는데 이 채찍질은 참으로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동양에서는 대표적인 체벌이 몽둥이 매질이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엎드려놓고 볼기를 치는 곤장이 있었습니다. ‘볼기’를 친다니까 가볍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곤장 맞다가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일 정도로 무서운 형벌입니다. 

마찬가지로 서양에서 죄수에게 무거운 형벌을 가할 때 사용된 것이 채찍질입니다. 로마 시대로 넘어가면 채찍질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기 전 받은 예비 체벌이었고 ‘천벌’(scourge)이라 불릴 정도로 잔인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채찍이 정말 무서운 형벌 도구였기 때문입니다. 죄수가 십자가형의 언도를 받으면, 상의를 벗긴 채 나무 기둥의 허리부분에 양손이 묶입니다. 그러면 죄수의 몸은 기역자 모양이 되고 죄수의 벗은 등이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그 등을 향해서 로마 군인이 채찍질을 하는데 이 채찍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긴 가죽채찍이 아닙니다. 

짧고 여러 가닥으로 되어있는 가죽채찍인데 일부러 그 가닥 끝에 날카로운 동물의 뼈나 금속조각을 달아 사정없이 때립니다. 채찍을 내리치면 가죽이 죄수의 몸에 감기면서 뼛조각이나 금속조각이 살에 파고들어 박히고 채찍을 잡아당기면 살점이 찢기며 몸에 긴 고랑을 만들었습니다. 채찍이 죄수의 몸에 닿을 때마다 피가 튀기고 등이 너덜너덜 해집니다.

이렇게 체벌을 받고 나면 죄수는 거의 탈진하여 반죽음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 상태에서 십자가의 가로대를 어깨에 짊어지고 형장을 향해 걷습니다. 그러다 보니 채찍질을 맞다가 쇼크사로 죽는 죄수도 있고, 상당수가 형장으로 가는 길에 기진해서 죽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

이런 적나라한 얘기를 들으니 몸이 오싹해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잔인한 채찍질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죽으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전 맨 처음 받은 고난이 채찍질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고난에 있어 첫 번째 과정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력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인 사순절 둘째 주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2월 22일이 성회수요일이고 이날부터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절기가 바로 사순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한 사순절을 맞아 우리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려 합니다. 오늘부터 다섯 주에 걸쳐 복음서에서 주님이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텐데 좀 특이하게 예수님의 몸 중에서 고난당한 순서대로 살펴봅니다.

맨 먼저 ‘주님의 등’입니다. 오늘 설교 주제지요. 우리 위해 채찍질 당하고 찢기신 주님의 등을 살펴봅니다.
두 번째는 ‘주님의 머리’입니다. 우리 위해 가시관 쓰신 주님의 머리를 살펴봅니다.
세 번째는 ‘주님의 손’입니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의 손을 살펴봅니다.
네 번째는 ‘주님의 발’입니다. 우리 위해 십자가에 못 박하신 주님의 발을 살펴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주님의 허리’입니다. 우리 위해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신 주님의 허리를 살펴봅니다.
그러면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주님의 등’에 대해 말씀을 나눕니다. 이 ‘주님의 등’에는 두 가지의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채찍 맞으신 주님의 등

첫째로, 주님의 등은 왜 채찍을 맞으셔야 했는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본디 채찍질 당할 죄인은 우리였다는 것입니다. 본디 채찍에 맞아 등의 살점이 뜯겨나가고 등이 너덜너덜해져야 할 죄인은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대신 채찍질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에는 ‘종의 노래’라고 불리는 메시야에 대한 찬양이 나와 있습니다. 그 가운데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찔리신 것은 자신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상하심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우리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자기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남을 위해 내놓겠습니까? 

누가 그 잔인하고 무서운 채찍질을 일부로 당하겠습니까? 하지만 여기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채찍질 당하고, 자기 목숨을 내놓은 분이 있습니다. 그것도 가족이나 친구를 위해서도 아니고, 내가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를 배신하고 죄를 지은 죄인을 대신하여 기꺼이 채찍질 당하고, 목숨을 내놓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신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로마서 5:6~8은 말씀합니다.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바로 우리가 채찍질 당할 죄인이고, 등이 너덜너덜 찢거나가야 할 죄인입니다. 바로 우리가 죽어 마땅한 중죄인,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민란을 일으킨 반역자요 살인자인 바라바가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마땅한데 바라바 대신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이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바라바의 모습이 바로 오늘 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야말로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마땅한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아무 죄도 허물도 없는 주님이 우리 죄를 위해 기꺼이 채찍질 당하여 등이 찢기고, 우리 위해 십자가에 달려 모든 고통 남김없이 당하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적인 말씀입니까?

❚우리도 받아야 할 채찍질

둘째로, 주님이 받으신 채찍질을 나도 기꺼이 받는 사람들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후 주님이 받으신 채찍질을 기꺼이 함께 받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뒤를 따르기로 결단한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대제사장과 사두개파가 복음 전하는 베드로와 사도들을 붙잡아 가는데 40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그들이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그렇지만 복음 위해, 주님 위해 목숨 걸기로 다짐한 베드로와 사도들이 이 정도의 채찍질에 굴해서 복음전파를 중단할 리 없지요. 사도 바울도 채찍질을 당할 뻔 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 전하다 로마군에게 체포된 후 로마군의 지휘관인 천부장이 바울을 매달아 채찍질하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행히도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이 있는 사람이라 채찍질을 면한 것입니다만 바울도 복음전파를 위한 채찍질을 기꺼이 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믿음장’의 3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기억하십시오. 이때부터 기독교는 폭발적인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가 당시 유대교나 다른 종교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이 시작된 미약한 종교지만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뒤를 이어 제자들이 “나도 기꺼이 신앙을 위해, 복음을 위해 채찍질 당하겠다, 기꺼이 죽겠다”고 각오한 순간부터 기독교는 엄청난 능력과 그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놀라운 힘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희생하기로 한 성도는 채찍질도 각오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기꺼이 십자가 지고 고난의 길을 걸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위해, 복음 위해 희생하고 채찍질 당할 각오가 된 성도들은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채찍질 당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정도까지 각오해야 우리에게서 십자가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 사람들에게 종종 던진 질문이 있습니다. “쥐가 고양이를 이길 수 있는가?” 물론 불가능한 일이라고 모두들 대답을 했지요. 그런데 이것은 상징적인 질문입니다. 고양이는 영국이고 쥐는 인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간디는 쥐가 고양이를 이기는 방법이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쥐가 쥐약을 먹고 고양이 앞에서 춤추는 것입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아먹을 것이고 그때는 쥐도 고양이 밥이 되지만 고양이도 쥐약 먹은 쥐를 먹기 때문에 죽는다는 얘기입니다. 쥐약은 ‘희생’입니다. 그는 이 정도의 희생을 할 각오가 안 되면 어떻게 영국의 무서운 지배를 이실 수 있겠냐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보다 솔선수범 하여 희생을 실천했습니다. 간디는 높은 교육을 받은 인도 최고의 엘리트로서 런던에서 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대영제국을 등에 업고 크게 한자리할 수도 있었고, 돈방석에 앉아 평생 호화로운 영화를 누릴 수도 있었지만 간디는 스스로 쥐약을 먹은 쥐처럼 모든 것을 희생하고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국민들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기꺼이 손해 보는 사람들

우리는 깨닫습니다. 이 세대는 이기주의가 지배하고 희생은 점점 사라져가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여중생이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데 아무도 모른 척 했답니다. 여학생의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눈과 마주친 아주머니는 재빨리 고개를 딴 데로 돌렸다는군요. 내 딸이라면 그랬을까요? 모든 어른이 부끄러워해야 할 대목입니다. 어른들이 이러니 자녀들은 어떻겠습니까? “너 어디 가서 손해 볼 짓 절대 하지 말라”고 자녀들에게 신신당부 합니다. 

“남을 위해 손해도 좀 보고 희생도 해라”고 가르치는 부모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돈 벌어서, 공부해서 남 주나?” 하는 말은 해도 “돈 벌어서, 공부해서 남 줘라”고 가르치는 어른들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권력만 탐하지 국민을 위해 조금도 희생하지 않는 지도자가 나오고, 십자가 없이 복과 영광만 누리려는 성도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말씀 맺습니다. 만약 “어디 가서 손해 볼 짓 절대 하지 말라”가 예수님의 생각이었다면 그분은 절대 우리 위해 십자가 안 달리셨을 것입니다. “남을 위해 손해도 좀 보고 희생도 해라.”는 정신이 없었다면 주님은 그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채찍질을 우리 대신 당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2006년 1월 2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 톨먼스 빌 광산이 무너졌습니다. 13명의 광부가 지하 78m의 갱 속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들은 유독가스와 산소 부족으로 위독했습니다. 그때 한 광부가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메고 있는 산소통 안의 산소는 곧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몇 시간 후에는 우리 모두 죽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갖고 있는 산소를 한 사람에게 몰아줍시다.” 그들은 자신의 산소통을 어린아이가 둘 있는 스물일곱 살 젊은 광부 랜달 맥로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자네는 아직 젊네. 자네가 우리의 몫까지 살아주게나.” 12명의 광부는 매몰된 지 이틀 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고 오직 맥로이만 살아났습니다. 죽은 광부 중 한 사람인 마틴의 메모지도 발견되었습니다. “아빠는 힘들지 않아. 나의 가족들아, 사랑한다. 하나님 곁에서 너희를 위해 기도하마.”

예수님은 요한복음 15:13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보신 것입니다. 이 12명의 광부들처럼 사람이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데, 우리 주님은 죄인인 우리, 더럽고 추악한 우리, 날마다 주님을 배신하기만 한 우리, 오늘 본문에서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 같은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 위해 대신 채찍질 당하고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은 점점 이기적이고 차가워져만 가는데 이런 때 주님 위해, 복음 위해 기꺼이 손해 보고, 희생하고, 채찍질도 맞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이 시대에 좀 바보처럼 “남을 위해 손해도 좀 보고 희생도 해야지.” 하는 사람이나 “돈 벌어서 남 주고, 공부해서 남 주고, 출세해서 남 좋은 일 하자”는 사람들이 나올 때 주님은 그들을 통해 큰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비록 그분의 등에는 아직도 채찍자국이 선명하고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만 주님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기뻐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 너희가 그렇게 하는 것을 보니 내가 너희 대신 채찍질 당하기를 참 잘했구나.”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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