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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의를 위한 핍박의 복 (마 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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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를 위한 핍박의 복 (마 5:10-12)


오늘은 팔복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마음 다스림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순교자의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박해, 핍박 그 자체가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복이 되는가? 어떤 경우에도 핍박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모든 핍박은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한 가지 조건의 핍박을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세상에서 겪는 고난은 몇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내 죄의 결과로서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것은 죗값이지 핏값이 아닙니다. 죄인이 죗값을 받지 아니하면 그 사회가 더욱 살기 어려운 장소가 되기 때문에 어느 나라나 죄의 값을 치르게 하는 형벌법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범죄율이 가장 작은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와 싱가포르입니다. 이 나라들은 범죄율이 매우 낮습니다. 죄의 값이 너무 무섭게 치러지기 때문에 죄를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도둑질 한 사람은 손목을 잘라 버립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가서 손 없는 사람을 보면 도둑질해서 잘린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현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기록한 필름을 본 일이 있습니다. 손목을 아주 간단하게 자릅니다. 손목이 뚝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는 길거리에 돈이 떨어져 있어도 그것을 잘못 집었다가는 손이 떨어지니까 집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청년 하나는 싱가포르에 가서 벽에 낙서 한번 했다가 그 나라 법에 의해서 이조시대처럼 벌거벗겨놓고 곤장을 맞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문에 보도가 되니까 클린턴 대통령이 그 나라에 요청을 했습니다. “그 나라 문화를 모르는 사람이 가서 실수를 한 것이니까 벽에 낙서 좀 했다고 그렇게 모욕적이고 신체적 고통을 가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 좀 양해해 주십시오.” 그런데도 싱가포르의 자존심을 꺾지 못하고 잔뜩 얻어터지고 왔습니다. 사실 미국 같은 나라는 그 깨끗한 거리가 도깨비 소굴 같습니다. 낙서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벌을 거의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지저분해지고 도깨비 소굴 같아지는 겁니다. 내 죄의 결과는 피할 수 없는 자기 고난의 문제가 되므로 그것은 당연한 고난입니다. 

그 다음에는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여러분! 운전하실 때 보십시오. 나는 운전을 잘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술 취한 사람이 사고를 내서 죽기도 하고 장애인이 되기도 할 때는 아주 애매합니다. 또 어떤 때는 죄도 없이 감옥에서 10년 옥살이 하다가 그 후에 사실이 판명되어 풀려난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16년 살인죄 누명으로 감옥에 있던 사람이 무죄석방 판결문 낭독할 때 너무 쇼크를 받아서 판결문 듣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어떤 전도사님 한 분은 강원도 춘천에서 살인죄로 누명을 씌워서 27년 동안 감옥에 살다가 근래에 와서 무죄가 판명되어서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젊은 시절 27년은 어디 가서 보상받습니까? 이런 애매한 일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저의 집을 수리할 일이 있어서 목수 한 사람이 와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캄보디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면서 저에게 “혹시 킬링필드라는 영화를 보신 일이 있습니까?” 물어보아서 “그 영화를 봤습니다.”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그 죽음의 장소에 3번 끌려갔다가 3번 다 도망쳐 나와서 살아서 지금 이렇게 미국에 와서 목수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이야기 좀 합시다. 거기서 죽은 사람이 150만 명인데 도대체 150만이나 되는 사람이 무슨 죽을죄를 지어서 그렇게 끌려가서 다 죽었습니까?” 물었더니 “아닙니다. 거기 끌려가서 죽은 150만 명 중에 죽을 죄 지은 사람 한 명도 없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예? 그러면 왜 죽인 겁니까?” “정치하는 사람이 괜히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다 끌어가서 다 죽인 것입니다.” 지금 캄보디아에 가보십시오. 해골바가지 박물관이 있지 않습니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입니다. 애매한 고난이 우리 사회에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합니다. 

그 다음에는 의를 위한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은 자원적 성격이 있습니다. 내가 고난당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얼마든지 피해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고난을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고난 앞으로 일부러 나가는 부분이 오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자원해서 받는 고난을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0절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런 말이 있습니다. 

또한, 팔복이 첫째, 둘째, 셋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 일곱째는 이웃과 관계이고, 여덟째는 원수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통해서 사람을 만납니다. 그래서 잘 만나는 관계를 인연이라고 말하고 고난스러운 관계를 악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양쪽 다 만납니다. 사람을 잘 만난다는 것이 복이 되는데 오늘 말씀은 만나지 않아도 괜찮은 악연의 원수를 자원해서 만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만도 선교사들이 얼마나 많이 찾아와서 순교를 당해 죽었습니까? 안 오면 되는데 온 것입니다.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에 올라오자마자 박규수가 목을 쳐서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왜 왔습니까?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 온 것입니다. 일부러 온 것입니다. 그가 자원해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이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윤봉길 의사는 뭐 하러 중국 상해까지 찾아가서 잡혀 죽었습니까? 안 갈수도 있지 않습니까? 안중근 의사라든지 유관순 여사라든지 슈바이처 박사 이런 사람들은 안가면 어떻습니까? 괜히 아프리카에 가서 평생 그 고생을 했는데 모두 자원적으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일부러 고난을 찾아가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런 것입니다. 의를 위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내가 꼭 의를 위해서 나가서 핍박을 받아야 되나? 다른 사람만 핍박하지 않아도 훌륭한 사람이 되는데 내가 무슨 예수 그리스도나 된 것처럼 찾아가서 핍박을 받아야 되나?’ 그렇게 정리를 하고 평범하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무슨 핍박이 오든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끔 소리를 듣습니다. “예수 믿는 게 그 모양이냐?” 이게 핍박입니다. 그러면 “예수 안 믿는 것은 어떤 모양이냐?”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누구나 인간이기에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을 예수 믿는 조건 하나를 붙여서 말을 할 때는 그 자체가 핍박이 됩니다. 

어떤 면에서 깨끗하게 살려는 사람은 더욱 핍박이 많습니다. 교회도 잘못하는 게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조금만 잘못하면 책망하는 소리가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저는 늘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체나 기관들이 교회 같이만 하라고 하십시오. 세상은 참 밝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위해서 교회같이 일을 많이 하는 기관들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일제 식민지 시대에 목숨 걸고 해방 운동을 하던 사람들 중에 감옥에서 해방 맞은 사람이 기독교인만 5천명입니다. 

가장 많았습니다. 유관순을 비롯한 순교자들이 50명 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일 많았습니다. 1997년부터 2007년까지 10년 동안 교회들이 북한에 보낸 구호물자 3천억입니다. 탈북자 90퍼센트가 교회 도움 입었습니다. 태안 앞바다 기름 유출 입었을 때 봉사 제일 많이 한 사람이 기독교인들입니다. 사회 복지 민간 부분 80퍼센트가 교회 운영입니다. 전국 장애인시설 231곳인데 70퍼센트인 161곳이 교회 운영입니다. 갈보리교회만 해도 1년 예산 50퍼센트가 외부로 나갑니다. 제가 옛날에 살았던 집에 카펫을 깔았는데 한번 깨끗하게 살아보려고 색깔을 선택했는데 잘못했습니다. 

눈이 부실만큼 하얀 색깔의 카펫을 깔았습니다. 외국에는 모두 카펫을 집집마다 까니까 얼마나 깨끗하고 햇살이 비치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습니다. 그런데 잘못했습니다. 더러움을 얼마나 쉽게 타는지 모릅니다. 날마다 카펫 청소를 하다가 세월이 다 갑니다. 어떤 때는 내가 글씨를 쓰다가 볼펜 하나를 떨어뜨리면 그 볼펜 끝의 잉크 자국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난단 말입니다. 제가 경험했습니다. ‘아! 이 다음에 카펫을 깔 때는 어두컴컴한 것을 깔아야겠구나.’ 깨끗한 사람은 조금만 죄가 생겨도 커 보입니다. 다 드러나 보입니다. 그러나 아예 컴컴한 사람은 웬만해도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핍박을 받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의 정리로 오늘 말씀을 이해할 것입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좋은 소리를 듣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너무 칭찬 듣고 공명심, 만족감 이런 것을 생각하고 신앙생활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이렇게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는 세상의 수없이 많은 비판과 핍박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가면 학생과장이라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학생과장과 시간을 많이 가졌는데 이 학생과장이 가끔 학생들을 모아놓고 세미나를 합니다. 

“어떤 목사가 되어야 할 것인가? 앞으로 신학 공부를 하고 나서 어떻게 목회를 할 것인가? 여기서 대해서 각자 의견을 말하라.” 그리고 이제 자유 토론입니다. 누구든지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신학교 1, 2학년 때는 성령을 받아 충만해서 열정의 소명을 가지고 있는, 불이 펄펄 끓는 때이니까 전부 나와서 자기 장래의 희망사항의 목회를 위해서 발표를 합니다. 모두 순교자같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 “나는 교회 나가서 목회를 할 때도 누가 비판을 하면 한 사람만 비판을 해도 그 교회에 있지 않겠습니다.” 그러면서 순교자적 열정의 발표를 합니다. 

학생과장이 맨 마지막에 정리를 해줍니다. “오늘 우리 학교의 예수님보다 더 훌륭한 성자들이 많이 탄생했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말한 예수님도 안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비판 받으셨으며 때로는 예수님을 때려죽이겠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교리적으로 따지고 덤벼들고 마지막에는 죽이라고 소리쳐서 침 뱉고 욕하고 따귀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어떻게 예수님도 안 되신 일을 여러분이 해내겠습니까? 아주 굉장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정리를 해주셨습니다. 

너무 사람이 칭찬받고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면 위선으로 살게 됩니다. 내 모습 이대로 진실된 나를 드러내면서 그냥 살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범한 삶을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포장할 것도 없고 더 나타낼 것도 없고 그냥 그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 다음에 핍박을 당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참고 견디십시오. 로마서 12장 19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그 다음 말씀을 보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만약 원수가 나를 때렸습니다. 화가 나서 나도 한 대 때렸습니다. 

하나님 보실 때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일하는 자는 원수가 때릴 때 가만히 참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셨습니다. ‘아! 내 종이 억울하겠다.’ 하나님이 생각하십니다. 그런데 죄도 없는 사람을 자꾸 와서 때립니다. 자꾸만 때리니까 하나님이 ‘어이구, 이거 안 되겠다. 내가 나서야 되겠다.’ 그래서 “나한테 맡기라.” 하나님이 나서시면 완벽한 일이 벌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십시오. 정말 믿음이 좋고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그 원수를 향해서 하나님이 나설 때 너무 무서워서 상대방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까? 

스데반이 돌을 맞아 원수들에게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기도를 드립니까? “아버지여! 용서해 주소서. 저 사람들은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 왜? 하나님이 마지막에 나서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스데반이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부시를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제일 큰 공로가 있는 선거의 천재가 ‘리 에드워’라는 사람이 있는데 부시는 그 사람 때문에 당선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쓴 정책은 마키아벨리 황태자와 손자병법 두 가지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때려 부숨으로 내가 승리하는 전략입니다. 그래서 성공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 말이 뭔지 아십니까? “파괴는 승리가 아니다. 나는 실패했다. 당신들은 예수의 말씀으로 이 나라를 건설하시오. 원수들을 파괴하는 것은 진정한 승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일찍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한때 배신의 고통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조카가 자신을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의 세력에 밀려나서 좋은 땅에서 쫓겨나 빈들의 집시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생각합니다. ‘큰일 났다.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어떡하지?’ 그래서 하나님이 “그러면 내가 나서서 손을 대겠다.” 하셨을 때 어떻게 합니까? 나가서 필사적인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50명이 살면 그래도 멸망하시겠나이까?” “아니다.” 나중에는 10명까지 내려가면서 왜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아브라함이 했습니까? 롯이 거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내쫓은 롯이 이제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어떤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영적으로 알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을 대시면 완벽합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롯의 집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이 괘씸해서 자기가 나서보십시오. 

오히려 자기가 피해를 입습니다. 그러니까 핍박 좀 받는다고 흥분하고 칼 들고 나서지 마시고 조용히 기도하면서 잘 견디십시오. 하나님께 다 맡기십시오. 그래야 성령 충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중에 손을 대시면 완벽하게 정리를 해버리시니까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원수라도 “하나님 아버지! 제발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은 그것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오늘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이렇게 나와 있는데 핍박이 기뻐하고 즐거워할 일입니까? 가장 싫어하는 일이 핍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핍박 받는 것에 정비례하는 복이 온다.”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핍박당할 때 ‘아!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복을 주시려는 영적 사인이구나.’ 이렇게 마음을 열어보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그렇게 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하늘나라 핍박, 즉 기독교 핍박 국가가 있습니다. ‘오픈 더 미션’이라는 단체가 있는데 선교 단체입니다. 

그런데 이 단체에서는 해마다 조사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현재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가장 핍박하는 국가를 구체적으로 조사해서 발표를 합니다. 그런데 매우 불행하게도 지나간 10년 동안 항상 세계의 핍박 1위 국가가 ‘북한’입니다. 그래서 북한에 교회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핍박 국가도 교회가 있습니다. 북한의 ‘봉수교회’는 전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예배드리는 책임자를 제가 만났는데 이렇게 운영한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사람들 인원을 300명씩 정해서 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 나오는 사람은 배급을 준다고 합니다. 기독교 핍박 국가 10나라를 발표하면 이렇습니다. 1위 국가는 북한, 2위는 아프가니스탄, 3위가 사우디아라비아, 4위가 소말리아, 5위가 이란, 6위가 몰디브, 7위가 우즈베키스탄, 8위가 예멘, 9위가 이라크, 10위가 파키스탄입니다. 그 다음에 그곳보다 조금 낮은 핍박 국가가 라오스, 에리트레아, 나이지리아, 모리타니, 이집트, 수단, 부탄, 트루크메니스탄, 베트남, 체첸이 있습니다. 

그리고 약간 핍박 국가는 미얀마, 중국입니다. 현재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핍박 국가 선교사들은 100퍼센트 다 들어가 있습니다. 잘못하면 잡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자원해서 갔습니다. 왜 갔습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나니” 이것 때문에 자원해서 들어갔습니다. 안가도 그만인데 자원해서 일부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이 “이러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으로 팔복을 끝을 내지 않습니까?

제가 선교지에 다녀온 것을 하나 소개해 드리면 필리핀에는 지금 격리수용 한센병 환자가 2만 명입니다. 소록도 같은 곳인데 열정을 가진 한국의 젊은 20대 후반 선교 지망생이 ‘나는 이왕이면 거기 가서 선교를 하겠다. 불쌍한 환자들에게 선교하고 싶다.’ 그래서 1,200명을 수용하는 그 장소로 선교지를 정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인이 안가겠다는 것입니다. “혼자 가세요.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20대 후반인데 그런 외국에 가서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더군다나 정상적인 사람도 아닌 한센병 환자에게 가서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그곳에 가면 그 사람들과 같이 식사해야 하고 같이 생활해야 하는데…. 나는 절대 못갑니다.” 그럴 때는 어떡해야 합니까? 이혼해야 합니까? 이혼할 수 없어서 포기했습니다. ‘아! 할 수 없구나.’ 그래서 선교지망생이 말하기를 “그러면 포기하고 우리가 가려고 했던 장소이니까 여행 삼아서 구경만 하고 오자.” “좋다.” 그래서 둘이 그곳에 갔습니다. 가서 보니까 안 오기로 작정한 것이 얼마나 잘했는지 사모되는 부인은 “보세요. 내가 반대 안했으면 여기 와서 사역할 뻔 했잖아요? 저 사람들 보세요.” 마음이 다 닫혀서 “봤으니까 빨리 갑시다. 

알지도 못하고 괜히 로맨틱한 생각만 하고…. 사역을 그렇게 하면 안돼요.” 그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오는데 손이 다 문드러진 한센병 소녀 환자 한명이 그 문드러진 손으로 장미꽃 한 송이를 꺾어서 막 문 앞을 나가는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그리고 심각한 눈초리로 그 사모에게 그 장미꽃 한 송이를 전해주면서 “I love sister.”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드는 순간 이 사모는 별안간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면서 그 자리에 팍 주저앉았습니다. “이봐요. 왜 그래요?” 사모님이 막 우시는 겁니다. 그러더니 일어나시며 “우리 여기 머물러요.” 그래서 그 사역을 하시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사모님이 열정적으로 그 사람들의 손과 발이 되어서 날마다 그분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저에게 한번 꼭 다녀가시기 바란다며 후원해 달라고 부탁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선교사님의 차가 ‘어떻게 이런 차가 굴러가나?’ 할 정도로 낡았습니다. 그 차를 세 명이 타고 가는데 주차장에 세워놓고 볼 일을 보고 뒤로 후진해서 나가야 하는데 얼마나 낡았는지 차가 기어를 넣고 밟아도 나가지를 않는 겁니다. “이게 왜 안 나가나?” 그런데 “붕붕” 소리만 나고 안 나갑니다. 

그래서 제가 세게 밟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가 밟으니까 뒤로 가야 될 차가 총알같이 앞으로 가서 남의 차를 와장창 들이박는 겁니다. 저는 세상에 그런 차는 처음 봤습니다. 분명이 백 기어를 넣고 밟았는데 뒤로 안가고 앞으로 총알같이 나가서 가득이나 찌그러진 차가 물이 줄줄 세서 그 자리에서 버렸습니다. 선교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세게 밟으라고 하셨으니 책임지셔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 차도 물어주고 선교사님은 참 좋은 자동차 갖게 되시고…. 그게 왜 내가 탔을 때 그 모양이 되었느냐 말입니다. 

불행스러운 일인 거 같지만 하나님이 다 지혜롭게 장미꽃 한 송이, 그리고 조그마한 기계 고장…. 이런 것들도 다 하나님의 우주적인 섭리 가운데서 의를 위해서 고난 받는 자를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묘한 하나님의 영적 은사를 생각하면서 기쁘게 돌아온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어차피 세상은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종류가 다르지 다 고난스럽습니다. 여러분! 모두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의의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각오와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는 많은 고난의 종류가 있는데 자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의를 위한 핍박과 박해는 복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의 화려한 축복만은 생각하지 말고 의를 위한 핍박과 박해를 견디어낼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이 주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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