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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탈리오의 법칙 (마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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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리오의 법칙 (마 5:38-42)

‘눈은 눈으로 이에는 이’로 렉스탈리오네스, 탈리오의 법칙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유명한 법은 성경의 세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4장에서는 사람이 만일 그의 이웃에게 상해를 입혔으면 그가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할 것이니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레24:19-20)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출애굽기 21장, 신명기 19장에도 있습니다. 

상해를 받았다고 상처 받은 그대로 갚고, 눈으로 당했다고 눈으로 갚고, 이로 당했다고 이로 갚는다는 것인데, 언뜻 보면 아주 야만적이고 무자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찌 이런 법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인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전적으로 오해입니다. 

이 법의 원래 목적은 복수의 한계를 설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제일 빨리 갈 수 있는 속도, 제일 느리게 갈 수 있는 속도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법은 상한은 있지만 하한은 없습니다. 최고로 달려도 여기까지밖에 못 달린다는 것으로 천천히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보복을 해도 자기가 당한 것 그 이상의 보복은 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그보다 더한 것을 금지하기 위하여 이 법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기가 당하면 당한대로 보복을 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해보셔서 아시겠지만 복수에는 큰 문제가 따릅니다. 

그 하나는 복수를 하다보면 항상 지나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한 것보다 항상 심합니다. 특별히 당한 사람이 힘 있는 사람이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합니다. 

더 큰 문제는 복수는 자꾸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한 부족의 어떤 사람이 다른 부족사람에게 맞았거나 다른 어떤 것으로 당했을 때면 이 당한 사람의 집안이 들고 일어나서 보복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저쪽에서는 집안사람이 합해서 온 부족 사람들이 공격합니다. 그러다 나중에는 이 마을 전체와 저 마을 전체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늘 이러했습니다. 복수는 항상 확대재생산 악순환이 되풀이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을 보십시오. 여러분들도 이제 언론을 통해서 잘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은 당하면 제 값으로 갚지 않고 항상 더 세게 갚습니다. 그럼에도 팔레스타인은 힘이 없기 때문에 그냥 당합니다. 그러나 그 당하는 것으로 그냥 끝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 다른 것으로 보복을 합니다. 그래서 자꾸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9·11사태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이 닭인지 달걀인지 잘 모릅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당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그로 인해 결국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또 테러가 계속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9·11은 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입니다. 어쩌면 앞으로 점점 더 확대하여 진행될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시대를 불문하고 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보시기에도 이것이 걱정되셨습니다. 그래서 저것은 아니다, 저것은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든 복수, 보복의 고리를 끊어야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사는 땅에 전쟁이 그치고 아픔이 그칠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법으로 정하신 것입니다. 만약 당했으니 어쩔 수 없이 보복을 하겠다면 눈을 당했으면 눈까지만, 이를 당했으면 이까지만 하라고 이 한계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 라고 하신 이 말씀에는 문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첫 번째 문자적인 의미부터 보겠습니다. 아무리 화가 나고 아무리 힘이 있어도 네가 당한 것 이상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당하게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더 중요한 것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 라는 법을 주었다고 해서 항상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당한 사람이 꼭 보복을 해야 되겠다고 하거나 나도 갚은 만큼 되돌려주겠다고 할 때만 이 법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 사람이 이해를 하고 자기는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이 법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정히 이 사람이 꼭 원수를 갚아야 하겠다, 보복을 해야 하겠다, 복수를 하겠다고 하는 경우에는 그 사람이 직접 그 원수를 갚고 복수하고 보복하는 것은 아니 되고, 법정에 신청하여 아주 공정한 재판관이 판결을 통해서 복수를 해도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을 때, 그때 가서야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보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피해 당사자가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서 정한 사람이 그 형벌을 주는 것이라고 정하셨습니다. 얼마나 공정하십니까?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그런 정도의 법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이런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것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직접 나서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이 법을 두고 우리 주님께서 오늘 말씀하시는 바를 잘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38-39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산상수훈이므로 기독교 신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제자들은, 기독교 신자들은 율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가 주는 새로운 법으로 원수 갚는 일을 생각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율법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여러분들은 그 법을 그대로 적용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법을 주겠다는 것인데 이 말씀의 뜻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괜찮은 종교가 참 많습니다. 유대교도 상당히 괜찮습니다. 힌두교도 괜찮습니다. 불교도 괜찮습니다. 다 좋은데 그러나 그 사람들과는 또 다른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 신자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과는 다르게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다 좋습니다. 이슬람교도들, 힌두교도들, 불교 신자들 다 괜찮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는 이들과 또 다른 그 무엇이 있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법입니다. 

첫 번째는 오른편 뺨, 왼편 뺨으로 말씀하십니다. 만약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편도 돌려 대서 맞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성경학자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여러분, 오른쪽 뺨을 때리려면 어떤 손으로 때려야합니까? 오른손으로는 때리지 못하고 왼손으로 때려야 오른쪽 뺨을 맞습니다. 그런데 뺨맞는 것 자체도 모독이지만 왼손으로 뺨을 맞았다면 어마어마한 모독입니다. 신체적인 폭행도 있겠지만 정말로 힘든 모욕이고 수치입니다.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또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내가 뺨을 맞는 것이 맞아야할 일을 했기 때문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창피를 당해야하기 때문에 창피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전혀 까닭 없이, 전혀 그럴만한 이유 없이, 나에게 귀책사유가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못된 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모욕하고 억울하게 하고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은 화나 나서 자기가 맞은 것만큼 적어도 갚아야 되겠다고 하겠지만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그런 악한 사람들을 대적하지 말라, 상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잘 받으십시오. 여러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상대하지 말라, 상대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쪽 뺨도 대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법입니다. 

두 번째는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40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옛날 어려운 때에도 내복은 몇 벌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내복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속옷이 아니라, 쌀자루처럼 된 것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한두 벌 정도는 여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겉옷은 망토처럼 되어 있어서 제법 크고 가격도 어느 정도 되기 때문에 돈이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두 벌 가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낮에는 옷으로 입고, 밤에는 요로도 쓰고 이불로도 쓰면서 한쪽은 깔고 한쪽은 덮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해보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율법은 이 겉옷을 저당잡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만약 밤에 저당 잡아 자칫 잘못 되면 얼어서 죽는 일까지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저당 잡았다가 밤에는 돌려주어야했던 것이 겉옷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고발해서 속옷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이 속옷은 돈도 되지 않습니다. 너 죽어 보아라는 마음이므로 참으로 악한 사람입니다. 다른 것은 가져 갈 수 있지만 어떻게 입던 내복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까? 남이 입던 것이라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을 텐데 법을 이용하여 그 속옷을 빼앗아가려는 이런 악한 사람이 있을 때, 기독교 신자들은 그런 사람과 상대해서 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당하신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법도 없고 말도 안 되는 사람, 정말로 흉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상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렇다면 차라리 법으로 까지 금지되어있는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법입니다. 

세 번째, 주님께서는 41절에서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는 전제되는 배경이 있습니다. 페르시아 우편제도입니다. 

페르시아는 나라가 크기 때문에 우편원들이 긴 길을 가게 되면 하루 만에 가지 못하고 며칠 만에 가게 되기 때문에 하룻길마다 우편역이 있습니다. 그 역에 가면 여러 가지가 많이 비치되어있습니다. 우편배달부를 위하여 음식도 준비되어있고, 말에게 먹일 물도 준비되어있고, 사료도 준비되어있고, 말이 다쳤을 때, 병들었을 때를 생각해서 새로운 말, 예비말도 하나 준비되어있습니다. 특별한 경우에 이 우편원은 상당한 권한이 있었습니다. 

만약 음식이 모자라거나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시민들에게 당신이 음식을 내놓으라고 하면 음식을 제공해야했습니다. 그것이 법이었습니다. 옷도 제공해야했고 잘 곳이 없어서 오늘 당신 집에서 자야겠다고 이야기하면 잘 곳까지도 법으로 내주어야했습니다. 말도 고장이 나서 안 되겠으니 다른 말을 달라고 하면 말도 주어야했습니다. 심지어 우편배달원이 병들었거나 몸에 이상이 있을 때, 당신이 대신 어디까지 가라고 지시하면 그 사람은 대신 갔어야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너무 힘들어서 십자가를 제대로 지고 가지 못하시자, 로마병정이 제시간에 처형하지 못할 것 같아 한 사람을 지목하여 대신 지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걸린 사람이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몬이 대신 지고 갔습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런 일은 흔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일이 있지 않습니까? 소송해서 법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억울하고 힘든 일이 있습니다.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한다면, 차라리 십 리를 가주라고 말씀하십니다. 힘이 있다고, 권력이 있다고, 법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횡포부리는 일이 있으면 기독교 신자들은 그런 사람들과 상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직접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42절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사람이 무조건 내 놓으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꾸고자 하는 사람은 아마 그렇게 악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약하고 없고 불쌍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달라고 하거나 꾸어달라는 부탁을 했을 때, 주님께서는 불쌍하고 어렵고 절박한 사정이 있어도 이 사람들에게 다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만약 여러분에게 이런 일이 있을 때, 정중하게 좀 주시면 좋겠다고 부탁했을 때, 무조건 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사정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좀 꾸어달라고 절박하게 말한다고 줄 수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도 이런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꾸어달라고 한다고, 달라고 한다고 다 꾸어줄 수 있고, 절박하게 달라고 한다고 다 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무조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 한쪽 뺨을 친 그 사람에게 마저 이 쪽 뺨까지 치라고 내줄 수 있습니까? 나도 바빠서 할 일이 많은데 나에게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는 사람에게 십 리를 가줄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못된 사람에게 정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그것까지 내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런 일이 있을 때 우리의 시선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보면 이쪽 뺨을 주지 못합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그 돈을 주지 못합니다. 십 리를 못 갑니다. 내 딱한 사정을 생각한다면 줄 수도 없고 꾸어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것을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선을 그런 곳에 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정말로 어렵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직접 해당되지 않아도 언론에 보도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마구 욕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길을 가다 차를 운전하다보면 내려서 그냥 뺨이라도 한 대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 주님의 법입니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주시는 법입니다. 여러분의 눈을 상하고 하고 이를 다치게 하는 그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를 해보겠습니다. 고발해서 가지고 가서 자기에게는 소용없을 것까지도 빼앗아가려고 하는 그런 악한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나 같은 사람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사람이 있을 때 그런 사람은 생각하지도 말고, 쳐다보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 주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일이 있을 때 얼른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쳐다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을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이 세상을 감찰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쳐다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모든 문제의 근원을 쥐고 계시고 해결도 쥐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을 쳐다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무 까닭 없이 수치를 당하시고 모욕을 당하시고 그렇게 죽어가셨습니다. 오로지 우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 말씀을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분입니다. 힘도 없으면서 괜히 싸우기만 하고 시끄럽기만 하여 거꾸로 더 다치기만 하고, 더 당할 수가 있으므로, 네가 나서지 말라, 모든 일을 다 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원수 갚을 일이 있으면 네가 갚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쳐다보고 하나님께서 갚으시도록 하라는 이 말씀입니다. 

정말로 좋은 말씀입니다. 얼마든지 손보려면 손볼 수 있고, 넘어뜨리려면 넘어뜨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 아예 지구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시면 얼마든지 떠나가게 할 수 있는 이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선한 일을 하고, 의로운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다가 여러분의 주머니가 빌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빚질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그런 일을 하다가 여러분의 주머니가 비게 되면, 여러분이 정말로 필요한 일이 있으면,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계시는 내가 주겠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돈이 다 누구 것인가?’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정말로 대단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로마서 8장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참으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것 때문에 내가 참는다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내가 선을 이루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선을 만들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문제 해결은 다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도 세상의 문제도 국제적인 문제해결도 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합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악한 사람, 못된 사람, 모진 사람, 정말로 아닌 사람, 그런 사람을 대적하지 않는 것, 그런 사람에게 당할 때 도리어 더 당하겠다고 나서는 것, 이것은 신자들에게 결코 부담이 아닙니다. 힘든 일이 아닙니다. 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정말로 하나님의 자식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선물과 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기독교인은 당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보복하고 싶을 것입니다. 한 마디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며칠 전에 메일을 통해서 한 이야기를 받았는데, 참 좋은 말씀 같아서 여러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한 의사가 아프리카 어느 외진 마을에서 의료봉사를 했는데 젊은 청년 한사람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외국에서 선진 영농기법과 축산기술을 배운 장래가 촉망받던 청년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결혼을 하려는 청년이 암소를 끌고 처녀의 집에 가서 <이거 받고 딸 주쇼> 라고 청혼을 해야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혼하는 암소의 수가 각각 달랐습니다. 특등 신부감에게는 세 마리를 데리고 가서 딸을 달라고 하고, 괜찮은 신부감에게는 두 마리를 데리고 가고, 그리고 아주 보통 사람에게는 한 마리를 데리고 간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아홉 마리 암소를 끌고 갔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나서서 도대체 어떤 처녀이기에 이렇게 아홉 마리나 데리고 갔는가 궁금해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동네 한 구석에 있는 초라한 어느 집이었습니다. 들어가서 문을 두드리니 노인 한 분이 나왔습니다. 그 노인은 아주 보잘 것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온 처녀는 키는 컸지만 아주 볼품없는 처녀였습니다. 대단한 처녀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별 볼일 없는 집의 별 볼일 없는 처녀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청년이 미쳤다고 수군대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그 처녀가 마법으로 청년을 홀린 것이 틀림없다는 소문까지 돌게 되었습니다. 의료봉사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온 의사는 가끔 그 청년이 왜 그렇게 했는지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의사는 다시 한 번 그 마을로 휴가를 가게 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청년은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큰 사업가가 되어있었습니다. 그 사업가에게 저녁 초대를 받아간 의사는 계속해서 궁금해오던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사업가는 빙그레 웃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 의사의 궁금증은 더해갔습니다. 그렇게 궁금증이 더해가던 차에 한 여인이 차를 가지고 오는데 정말로 우아했습니다.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했고, 매너나 모든 것을 다 갖춘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의사는 ‘아, 이 사람이 그때 그 말라깽이 처녀 말고 다른 좋은 처녀와 결혼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때쯤 그 사업가가 의사에게 “선생님 저 사람이 그때 제가 청혼했던 처녀입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저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제 꿈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마을에는 몇 마리 암소를 받았느냐가 여자들의 세계에서는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저도 그런 관습을 무시할 수 없어서 암소를 몰고 갔습니다. 

사실 제 아내는 한 마리의 암소만으로도 결혼 승낙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여인이 스스로 제 가치를 한 마리 암소 값에 한정하고 평생을 사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자신을 두 마리나 세 마리를 받았던 처녀들과 비교하면서 움츠려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청혼 때 몇 마리의 암소를 받았는가가 평생 동안 자기 가치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세 마리를 훨씬 뛰어넘는 아홉 마리를 생각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저는 아내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외모를 꾸미라고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의 아내를 사랑했고 또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처음에는 무척 놀라워하던 아내가 차츰 저의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 아내는 암소 아홉 마리에 걸맞은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는 더 건강해지고 더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그때 그렇게 말랐던 그 처녀가 오늘의 저 아내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본래 아무런 가치가 없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우리를 우리 하나님께서는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고 그 대가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제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사실을 알고 기독교를 신앙하고 계십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아신다면 이제부터는 더욱 더 아프리카의 그 처녀처럼 사십시오. 정말로 여러분들이 그런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는 그렇게 사십시오. 그렇게 살도록 하십시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다 하더라도 내가 이런 값을 주고 산 사람이라는 것을 아십시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너희는 그리스도인이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종교인들과 무언가는 달라야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위해서 내가 여러분들을 내 십자가의 값을 주고 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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