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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피성을 택정하여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수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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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피성을 택정하여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수 20:1-9)


제가 어릴 때에 주일학교에서 들었던 설교들은 주로 다 성경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극화한 것들이었는데, '도피성'이란 것도 그런 주일학교 설교를 통해서 제일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람과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점점 더 언성이 높아지고 피차 감정이 더욱 격화되면서 결국 싸움이 됩니다.
  
그러다가 자기에게 덤벼드는 상대방을 밀쳐냈을 뿐인데 그가 땅바닥에 쓰러지면서 하필이면 뾰족한 돌멩이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즉사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고의는 아니었지만 상대방을 죽이게 된 그 사람은 즉시 도피성을 향하여 죽어라고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는 그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살인한 사람을 뒤쫓아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쫓고 쫓기는' 아슬아슬하고도 조마조마한 장면이 스릴 있게 진행되는 가운데, 설교를 듣고 있던 우리 주일학생들도 절로 손에 땀을 쥐게 됩니다.

그 살인자가 추적자들을 간신히 따돌리면서 극적으로 도피성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서 빨리 열어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면 도피성 안에 있던 제사장이 문을 열어 그 사람을 즉시 성안으로 이끌어 들인 후에 다시 성문을 굳게 닫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뒤늦게 쫓아온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면서 살인자를 넘겨 달라고 요구하지만, 도피성의 제사장은 요지부동으로 그를 보호해 줍니다.
결국 추적자들은 포기하고 돌아서게 되고, 과실치사를 범했던 그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주일학교 설교는 텔레비전도 없던 시절의 어린 주일학교 학생들에게는 정말 흥미진진한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유명한 도피성의 유래를 전해 주는 '오리지널 스토리'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후 땅 분배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택정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앞서 19장 51절 끝에 보면 "이에 땅 나누는 일이 마쳤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대로, 이 도피성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에 있어서 그야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을 피신시키고 보호해 준 '도피성'은 바로 사망 선고를 받은 죄인을 구원해 주는 '죄 사함'을 상징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도피성이 예표해 주는 진리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 기독신자들이 과연 어떤 '죄 사함'의 은총을 누리고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 자비하심을 따라 베풀어 주신 '최고의 은혜'입니다.

1절부터 3절의 말씀에 "1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3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서 가나안 정복을 완수하고 이제 땅 분배를 시행하고 있던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 직전 모압 평지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 도피성 택정에 대하여 이미 두 번이나 말씀해 주셨습니다.
즉 이 도피성은 여호수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고 모세의 지시를 따른 것도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제도였던 것이었습니다. 

그 도피성의 목적은 "부지중 오살한 자"에게 "피할 곳"을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부지중"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고의성이 없는, 우연한 실수의'라는 뜻이며 '순간적 격분에 의한 충동 때문에'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구체적인 살해 동기나 사전에 의도된 계획 같은 것이 전혀 없이 실수나 우연한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된 경우를 위한 것으로서, 오늘날로 치자면 바로 '과실치사(過失致死)'에 해당되었습니다.

3절 이하에 여러 차례 "피의 보수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보수자"란 바로 '고엘'이라는 유명한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도로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주로 '대신 갚아 주는 사람' 혹은 '기업 무를 자'라는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원수를 갚아 주려는 자'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죽임을 당한 쪽의 가족이나 친척 중에 복수심에 불타서 그 살인자를 잡아 죽이려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부지중 오살한' 것은 합법적인 재판을 받는다면 결코 사형을 당할 만한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원한이라는 감정이 있어서 비록 실수로 일어난 사고인 줄은 안다 할지라도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족을 죽인 사람이라면 역시 어찌하든지 죽여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입니다.
 
도피성은 바로 그런 '인간적인 복수심' 때문에 어떤 억울하고 부당한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세워진 제도였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같으면 그처럼 '과실치사'의 경우에도 정당하게 재판을 받고 개인적인 복수는 당하지 않도록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옛날 사회에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즉 이 도피성 제도는 과실치사를 저지른 사람을 안전하게 보호해 주기 위한 것으로서 당시 주변 이방 민족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제도였습니다.
즉 다른 나라의 것을 모방한 것도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었고, 모세나 여호수아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줄을 아시고 마련해 주신 것이 바로 '도피성'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죄 사함'이라는 것은 그 개념의 발상부터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무슨 죄를 지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것을 갚아야 할 권리가 있는 줄로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면 비록 그것이 '과실치사'라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지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공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 사회의 상식과 법과는 달리 '분명히 죄를 지은 사람이지만 그 죄값도 받지 않고 그냥 용서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에게는 아주 생소한, 전혀 뜻밖의 개념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인애와 자비가 한량없으신' 하나님만이 그런 '죄 사함'이라는 실로 놀라운 은혜를 우리 죄인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가장 큰 일 두 가지를 말할 때에 하나는 '창조사역'이며 또 하나가 바로 '구원사역'인 것입니다.
'죄인에 대한 용서와 구원'은 사람이 스스로 필요하다고 인식해서 하나님께 요청을 올림으로써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자가 득도를 함으로써 비롯된 것도 아니었고, 무슨 교주가 착상해 낸 기발한 아이디어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오직 하나님께서 오직 당신의 인자하심을 따라 죄인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인간의 '법'이나 '공의'만을 따진다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아니 애당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이 '죄 사함'은 오직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해 친히 베풀어 주신 '놀랍고도 위대한 은혜'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공로를 통해서 주어진 '무조건적인 선물'입니다.

4절부터 6절에 기록하기를 "4그 성읍들의 하나에 도피하는 자는 그 성읍에 들어가는 문어귀에 서서 그 성읍 장로들의 귀에 자기의 사고를 고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받아 성읍에 들여 한 곳을 주어 자기들 중에 거하게 하고 5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들은 그 살인자를 그의 손에 내어주지 말지니 이는 본래 미워함이 없이 부지중에 그 이웃을 죽였음이라 6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들은 그 도피성을 사용하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읍 문어귀"는 당시 사회에서 재판도 집행되던 장소였습니다.
도피성으로 도망친 사람은 바로 거기서 "사고를 고할 것이요"라고, 즉 모든 자초지종을 사실대로 진술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부지중 오살한 것'이라고 즉 과실치사였다고 주장하면 그 '즉결재판'에서는 일단 그를 무조건 도피성에 받아 주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온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절대로 그들의 손에 "내어주지 말지니"라고 한 대로, 피가 피를 부르며 복수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악순환을 철저히 방지하도록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후에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정말 고의로 살인한 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한 정식 재판이었습니다.
물론 그때라도 그 사람이 고의로 살인한 것이 밝혀지면 더 이상 도피성에 거주하지 못하고 쫓겨나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실수로 사람 죽인 것이 재판에서 드러나면 그는 도피성에서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영주권이 정식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본문 6절에 보면 그처럼 합법적으로 도피성에 거할 수 있는 기간을 두고 "대제사장의 죽기까지"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이 도피성으로 피해 왔을 때 그를 맞아 들여 주었던 현직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도피자가 이제 도피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그때에는 그가 옛날에 저질렀던 '부지중의 살인'에 대하여 그 어느 누구도 그에게 복수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보호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피자에게는 이제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사면'이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대제사揚� 죽음'이 마치 그 '살인자의 죄를 없애 주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제사장이라고 해도 역시 똑같은 죄인에 불과한 한 사람의 죽음이 그런 죄 사함의 '효력'을 발휘할 리는 만무합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성취하실 '대속 사역'의 예표입니다.
즉 참된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대신 희생제물로 바쳐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대신 갚아 주심'으로써 우리가 '완전하고도 영구적인 죄 사함'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바로 이 '도피성의 대제사장'이 뚜렷이 천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는 분명히 일반 이스라엘 백성이 저질렀지만, 그 죄의 완전 사면은 그 죄와는 직접적으로 아무 상관없는 대제사장의 죽음과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살인죄를 저지른 본인은 자신의 '죄 사함'에 대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며 또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제3자인 대제사장에 의하여 그처럼 완전한 사면을 얻고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니 그로서는 그보다 더 고마운 일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저와 여러분의 '죄 사함'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때문에 주어졌습니다.
정작 죄인인 우리 쪽에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고행'을 통하여 이제 죄 용서 받을 만큼 충분한 '죄값'을 스스로 치렀기 때문에 용서받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선행'의 공로들을 많이 쌓아서 이제 '나의 죄를 사해 주십시오.'라고 언감생신(焉敢生心)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구할 만한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죄 사함을 얻게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100퍼센트 순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공로' 덕분일 뿐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받아 누리게 된 '죄 사함'은 그야말로 '공짜로 받게 된 정말 고마운 선물'인 것입니다.

하지만 공짜로 받은 것이라고 해서 뭔가 불확실하거나 모자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일단 이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우리를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없으며, 세상의 그 어떤 법도 우리에게 '사망의 선고'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제사장의 죽으심을 통하여 '칭의'를 입게 된 사람은 그야말로 '죄로부터 완전하고도 영원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단 '도피성의 제도'는 만약 그 살인자가 대제사장이 죽기 이전에 마음대로 도피성을 떠나면 그런 '사면의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를 쫓던 '보수자'가 그 살인자를 죽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토록 고맙고도 완벽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그 구원의 언약 밖으로 나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을 무조건적으로, 그러면서도 완전하게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베풀어 주신 이 대제사장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제사'를 평생토록 늘 감사드리면서 바로 그 '대속의 공로'에 힘입어 영원한 구원에까지 이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죄 사함이야말로 사망의 저주에 빠진 인생에게 '가장 요긴한 축복'입니다.

7절 이하 9절에 "7무리가 납달리의 산지 갈릴리 게데스와 에브라임 산지의 세겜과 유다 산지의 기럇 아르바 곧 헤브론을 구별하였고 8또 여리고 동 요단 저편 르우벤 지파 중에서 평지 광야의 베셀과 갓 지파 중에서 길르앗라못과 므낫세 지파 중에서 바산 골란을 택하였으니 9이는 곧 이스라엘 모든 자손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을 위하여 선정한 성읍들로서 누구든지 부지중 살인한 자로 그리로 도망하여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도피성들을 세운 장소들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도피성들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세 군데씩, 또한 남북으로도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정한 성읍들"에 세워졌습니다.
후대에 기록된 유대인 랍비들의 전승에도 도피성들을 삼각형 모양이 되도록 지정했다는 언급이 나오듯이, 하여튼 전체적으로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골고루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즉 어느 곳에서 그런 우발적인 살인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그 "부지중 살인한 자"가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빨리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 도피성의 혜택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뿐 아니라 "그들 중에 우거하는 객" 역시 똑같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피성 택정의 목적은 실수로 살인을 범한 사람이 "피의 보수자의 손에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 걸린 죄에 대한 최종 판결자'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9절 하반절에 "그는 회중 앞에 설 때까지 거기 있을 것이니라"고 한 것도 그런 살인자가 '보수자'가 아니라 '회중 앞에서 하나님께서 임명하신 제사장 앞', 다시 말해서 곧 '하나님 앞'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느냐' 아니면 '죄에 대한 심판을 받고 사망 선고를 받느냐'하는 것은 결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판결을 내리실 수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도피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그저 '땅 분배'만 한다고 절로 축복의 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도피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사람 살기 좋아 보이는 땅이라 해도 '피의 보수자' 앞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벗어날 수 없는 괴로움의 땅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오직 하나님께서는 미리부터 아셨던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는 '백이면 백' 모두가 다들 가나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주는 물질적 풍요보다도 더 중요한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생활에 진정한 축복을 넘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죄 사함'을 베풀어 주는 '도피성'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오직 하나님께서만 미리 아시고 그처럼 예비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축복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가나안'이 그랬다면 오늘날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살기 좋아 보여도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이 저주의 선고로 인하여 모든 사람은 다 여전히 죽음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똑같이 적용되는 엄연하고도 냉정한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그 어떤 강력한 나라나 부요한 사회라 할지라도 사람에게 '죄로 인한 지옥의 영벌'을 피할 수 있는 진짜 복지(福地)를 제공해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해 주신 '구원의 도피성'에만 이 무서운 저주, 이 두려운 사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진정한 평안과 자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원하고도 참되신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거저 선물로 주시는 '죄 사함'의 은총입니다.
결코 세상이 주지 못하는 이 놀라운 '도피성', 우리의 인생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완전히 해방되게 해 주는 이 고마운 '도피성'을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찾고 그 구원의 은혜 안에 영원히 거주하는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미국에 살 때에 해수어(海水魚) 즉 '열대 산호초 바닷물고기'를 키우는 취미생활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해수어는 담수어(淡水魚) 즉 민물고기보다 훨씬 더 예민해서 '영역 다툼'이 아주 치열합니다.
그래서 해수어 어항을 세팅할 때에는 특히 작은 물고기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들을 확보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을 영어로 'retreat place'라고 부릅니다.
  
만약 그와 같은 그들만의 '피신처'가 확보되지 않으면 작은 물고기들은 큰 물고기의 등쌀에 스트레스를 받아 금세 죽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큰 물고기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항 밖에서 무언가 익숙하지 않은 물체가 얼씬거리거나 갑자기 실내등이 켜져서 주위가 순식간에 환해졌을 때에는 큰 물고기 역시 자기만의 '은신처'가 있어야 쉽게 안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와 같은 '피난처, 은신처'가 과연 무엇이 될 수 있겠습니까?
죄짐에 눌린 사람들, 양심의 고통에 괴로운 사람들,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들의 심령을 언제든지 편안하게 감싸 줄 수 있는 진정한 안식처는 과연 어디겠습니까?
술집이나 노래방이 그런 사람들에게 진정한 평안을 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절해고도에 있는 아름다운 휴양지나 늘 행복이 넘치는 '스위트홈'이라면 그런 완벽한 자유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사람을 죄의 짐과 사망의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는 진정한 '도피성'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시편 11편 1절에서도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네 산으로 도망하라"는 말은 '힘들고 괴로울 때에는 술집을 찾거나 휴양지로 떠나라.'는 불신자의 조언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인생의 고통과 시험과 두려움을 당할 때에 오직 '여호와께 피하는' 자에게만 진정한 '도피성'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바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 오직 이 음성을 들려주시는 주님의 품만이 죄인에게 있어서 진짜 피난처요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도피성'은 이미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최고의 은혜', '무조건적인 선물', '가장 요긴한 축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길이 저와 여러분 앞에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로 피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죄인인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죄 사함과 구원'이라는 이 놀라운 은혜와 엄청난 축복은 그냥 '무작위'로, '복불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도피성' 되신 예수님을 찾아가서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그 언약 안에 거하는 자에게만 베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죄짐이 괴로울 때, 죽음의 고통이 나를 짓누를 때일수록 죄인의 '도피성'이 되어 주시는 이 주님께로 즉시 달려가 그 넓은 품에 더욱 깊이 안김으로써 금세에서도 참된 평안을 누리고 내세에서 영원한 구원까지 얻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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