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합 2:1-3)

첨부 1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합 2:1-3)
 
소선지서 12권 중 하박국서는 독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12명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백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증거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이 가진 의문을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이런 면에서 하박국 선지자와 선지서가 독특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이름은 ‘어떤 문제를 품고 씨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품고 씨름했던 문제들은 그가 살던 B.C. 7세기에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하나님께 질문했던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품은 의문은 어떤 부정적인 자세로 비판하려는 의문이 아닙니다. 17세기에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람은 무엇이든 의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휴지가 있으면 ‘이것이 진짜 휴지일까?’, ‘이것이 휴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라고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직업적인 회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이런 방법으로 모든 지식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거하려했지만 이런 직업적인 의문은 신앙에 유익을 주지 못했습니다. 

결국 데카르트가 근대 합리주의 철학과 자연과학의 발달에는 기여했지만 신앙의 발달에는 기여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앙관은 소위 ‘이신론’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하박국의 질문은 데카르트처럼 직업적이고 부정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정말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서 한 것입니다. 모세, 예레미야, 욥, 하박국과 같은 정직한 구도자의 의문이 신앙성장에 큰 유익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정직한 의문에 대답해주심으로 우리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긋나니까 질문한 것입니다. 
 
하박국 1장에서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찌하여 유다에 간악과 패역이 횡행하고 율법이 해이해지고 공의가 왜곡되는데도 가만히 계시느냐고 하나님의 무관심에 대해 의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바벨론 군대를 일으켜 악한 너희를 치려고 준비하고 계시다는 응답을 받으니까 하박국이 놀라서 또 질문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차마 못 보시는 분이신데 어찌하여 그런 악인을 통해 더 나은 의인을 징벌하려고 하십니까? 깡패들로 자기 자식을 징벌하려고 하십니까? 이것은 제가 기대하던 응답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그러십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고 나서 그 응답을 기다립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질문해서 응답을 받으려면 하박국과 같은 세 가지 자세가 필요합니다. 

Ⅰ. 하나님의 음성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Watch and Listen)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합 2:1).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지 기다리며 집중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도 물어보고 저 사람에게도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하나님께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물어보고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고 했습니다. 하박국이 실제로 파수꾼의 일을 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파수꾼이 소식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을 기다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 자리에 가있겠다는 것입니다. 조용한 곳을 찾아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 영적인 귀를 열어놓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박국의 자세에서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모든 주위를 집중하는 것입니다(Attentiveness).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예수님께서 골방만 되고 안방은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골방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기 위해 모든 주위를 집중시킬 수 있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면 조용한 곳으로 가십시오. 주위를 집중할 수 있는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나시기 바랍니다. 주위가 산만한 음식점이나 식당 혹은 시장 같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조용한 곳에서 잠잠히 영적인 귀를 열어놓고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주시면 100%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Submissiveness).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주셔도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하겠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뜻을 보여주실 필요도 없고 보여주시지도 않을 것입니다. 제 생애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 음성을 들었을 때는 100%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였습니다. 순종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면 그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 14:21).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지키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뜻을 알려주셔도 자기 마음대로 한다면 알려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위를 집중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순종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때 어떤 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시간을 정해서 성경책을 들고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기도하는 자리로 가시기 바랍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성경 읽고 기도하기를 반복하면 일반적으로 저녁때쯤 응답이 옵니다. 하지만 저녁에도 응답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하루 더 하십시오. 하루 더 해도 응답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럼 하루 더 하십시오. 삼일 정도 하면 어지간히 큰 문제도 응답이 올 것입니다. 
 
하박국 2장 1절 중간에 보면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내게’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내게’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뜻은 ‘내 안에서(In me)’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내게’라고 번역되었지만 사실은 ‘그가 내 안에서 어떻게 말씀하실는지 듣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안에서라는 표현은 스가랴 선지자도 10번이나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다리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 귀에 알아들을 수 있도록 들려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말씀하시면 귀로 듣지 않아도 내 영혼에 강력하게 하나님의 뜻이 찍히게 됩니다. 이것이 내 안의 성령께서 내 영에게 말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도 성령께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깨닫게 하심으로 말씀하실 수도 있고 내 삶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의미를 깨닫게 함으로써 말씀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Ⅱ. 하나님이 주신 응답을 기록하여 전파해야 합니다 (Write and Preach)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합 2:2). 하박국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규범적인 계시를 받는 존재입니다. 규범적인 계시라는 것은 하박국 선지자에게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읽고 들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규범적인 계시로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규범적인 계시는 성경 66권으로 끝났고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고 그것이 규범적인 계시라고 하면 그 사람은 이단의 괴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박국은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규범적인 계시를 받아 그것을 판에 새겨 사람들이 달려가면서도 볼 수 있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박국 2장 2절의 말씀을 해석할 때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누어졌습니다.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해석하는 사람과 읽으면서도 달려갈 수 있게 하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해석이 맞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 두 가지가 서로 배척한다고 볼 필요가 없고 상호 보완하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 것을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 읽으면서도 달려갈 수 있게 하라고 해석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성도들이 배울 수 있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알려주실 때 난해한 말로 알려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속도로 광고문을 누구도 알 수 없는 난해한 말로 기록해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를 들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렇게 광고문을 써놓으면 도대체 왜 저런 문구를 써놓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말도 안 되는 말, 깊이 있는 것 같지만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쉬운 말,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말, 오해할 수 없는 말로 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성도들의 삶 자체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증거하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응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주셨다면 이제 우리의 삶이 불신자들에게 증거하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2-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를 받게 되면 우리의 간증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편지와 메시지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알지만 불신자들이 읽는 성경은 우리 자신입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을 보고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인생이 달라지고 좋아지는 것을 보니까 자신도 믿어야겠다고 결정한다면 제대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을 보고 교회 다니는 것을 싫어하고 자신은 결코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한다면 잘못된 메시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되어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Ⅲ. 응답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Wait)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합 2:3). 

하나님께 질문하면 답변이 옵니까? 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까? 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같은 악인을 징벌할 때가 옵니까? 옵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상을 주실 때가 옵니까? 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때론 지체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때가 있고 그때는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때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가장 최적의 때입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현재 상황이 매우 급박해보여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보시면 급박하지 않습니다. 영원 가운데 그 시간은 잠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박국 2장 3절 후반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모순된 것 같습니다. 더디다는 말과 지체된다는 말은 동의어 아닙니까? 그런데 하박국 2장 3절 후반에서는 ‘더딜지라도 지체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말로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히브리어 원어로는 모순이 아닙니다. 원어적 의미는 ‘비록 더딜지라도 응답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는 의미입니다. 이중 부정으로 강력한 긍정으로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어법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기다려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을 때라도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과 구원과 승리를 주시는 날이 정해져 있고 그때는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할 때 믿음의 삶은 인내를 요구하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인내하며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신약성서에서 하박국 2장을 인용한 말씀이 히브리서 10장 32~39절입니다. 현재 고난과 비방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더 낫고 영구한 삶을 바라보고 인내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히 10:35~38). 

성도에게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함으로 약속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8절은 하박국 2장 4절을 직접 인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상급과 구원이 지금 바로 오지는 않아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정한 때에 온다는 말씀입니다. 


결론 

19세기 러시아의 최고 문학은 톨스토이의 작품들입니다. 톨스토이는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의 글은 거듭난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놀라운 작품입니다. 그의 불후의 명작은 ‘전쟁과 평화’입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사회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 혼란한 틈을 타고 일어난 인물이 나폴레옹입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장악하고 유럽 전역에 전쟁을 일으키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유럽만 지배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러시아까지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805년 아우스텔리츠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우스텔리츠의 전쟁은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싸운 전쟁입니다. 이때 나폴레옹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 번의 날카로운 공격으로 전쟁은 끝났다.” 한번 공격했더니 전쟁이 끝났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전쟁과 평화’의 주인공 안드레이가 그 당시 지휘관이었던 쿠투조프에게 질문합니다. “내일 전투에 이길까요?” 그러자 쿠투조프는 “아니. 우리가 진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령관이 전투에 진다고 하니까 젊은 장교 안드레이가 깜짝 놀라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쿠투조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번 전투에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쟁은 반드시 최후의 전투가 있는 법이고 최후의 전투에 이기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최후의 전투에 이겨야지 진짜 이긴 것이지 한번 전투에 이긴다고 이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그 당시 러시아의 황제였던 알렉산더 1세가 사령관 쿠투조프에게 계속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쿠투조프는 공격하지 않고 계속 후퇴했습니다. 나폴레옹은 승승장구하여 1812년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공했는데 쿠투조프는 계속 후퇴하면서 러시아 마을마다 불을 질러 먹을 것이 없도록 만들어놓고 사람들도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점령했는데 와서 보니까 폐허가 되어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니고 점령해도 점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겨울이 되어 추워지니까 나폴레옹의 60만 대군은 추위 속에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때 쿠투조프가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시간과 인내야말로 내 전쟁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인내하며 기다렸다가 추위 속에서 죽어가는 나폴레옹 군대를 모두 죽여버린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하여 결국 엘바 섬에 유배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다 또 한 번 기회를 얻어 1815년 유명한 워털루 전투에서 무너지고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되어 그의 인생은 끝이 납니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중간 전투에서 한두 번 이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최후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 진짜 이기는 것이고 이길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은 결국 최후 승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쿠투조프는 러시아를 살려내고 나폴레옹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한두 번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습니다. 술을 끊으려고 하다가도 또 먹을 수 있습니다. 담배를 끓으려고 노력하다가도 다시 필 수 있습니다. 죄와 싸우다 보면 어떤 때는 패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두 번 전투에서 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경 읽기, 기도, 교회 출석, 봉사를 중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두 번 전투에서는 져도 우리는 최후 심판 때 결국 승리할 사람들인 줄로 믿습니다. 

북한에서 굶어 죽는 것을 피해서 나온 탈북자들 31명을 중국 사람들이 다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중국이 기껏 탈출해서 나온 31명의 사람들을 돌려보내 죽게 만드는 것을 보며 참 대국답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 이런 악인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실까요?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이기는 것 같아도 악을 행하고 사람의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지금은 질 수도 있습니다. 한두 번 패배할 수도 있지만 최후 승리는 우리의 것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삶은 기다림의 삶입니다. 믿음의 기다림은 기다릴 가치가 있는 기다림입니다. 인내로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